졸업하자마자 그에게 들이닥친 건 즐거운 20대의 청춘이나 치열한 젊음, 스릴 넘치는 사건, 그런 게 아니었다. 반대로 성인이 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어깨를 짓눌러오는 여러 책임, 의무, 이어받아야 한다고 눌러오는 윗세대의 기대와 기대만큼이나 부푼 가문의 무게였다.
그러나 도망칠 생각이었다면 이미 머리에 피가 마르기도 전에 집을 뛰쳐나갔을 것이다. 도망치지 않은 건 그의 선택이었고 그의 책임이었으며 이제 와서 후회 같은 건 느끼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이곳이야말로 그가 숨김없이 그 자신을 내보일 수 있는 곳이었고, 그가 사랑하는 곳이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어깨를 짓누르는 책임의 하나로 끊임없이 맞선이 날아오는 건 정말 귀찮은 일이었다.
“잘 안 돼도 내 탓 하면 안 돼?”
“잘 안 되면 그 아가씨 탓을 해야지!”
“아니, 걔 탓은 또 왜 해?”
“하하하. 아무튼 이번엔 틀림없으니까! 잘 하고 와라.”
멋대로 등을 두드리고 나가는 삼촌들에게서 언제나처럼 고운 비단으로 휘감긴 맞선 상대에 대한 정보를 받았다. 하지만 이것도 100번쯤 보고 있으면 슬슬 펼쳐보지 않아도 안의 내용이 훤히 보였다. 귀찮아진 코우는 푸른 비단의 그것을 아무 데나 던지고 벌러덩 누웠다. 어차피 딱 3시간만 지나면 다시 보지 않을 상대였다.
───맞선 당일이 오면 아침부터 분주해진다. 이런 일이 벌써 세 자릿수에 육박하는데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변함없는 에너지로 그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꾸며주셨다. 어머니 말로는 “딸도 없는데 이런 재미라도 있어야지.”라고 하시는데, 덕분에 또 새로운 기모노가 생기고 말았다. 이번 기모노는 전체적으로 까만색에 소매와 밑단 정도만 화려한 색상의 실로 무늬를 놓은 것이었다. 맞선용의 옷이라기보다는 기선제압에 어울릴 것 같은 의상이다. 오비를 당기는 손길에 으윽, 하고 숨을 뱉으며 코우는 얼른 지긋지긋한 맞선을 끝내고 옷을 벗어버리겠다는 생각만 하였다.
그 생각을 읽어내듯 어머니가 찰싹 소리를 내며 허리를 쳐왔다.
“귀한 집 아가씨니까 지난번처럼 성의 없이 굴지 말고.”
“예에예에.”
그러는 이쪽도 귀한 집 아들 아냐? 궁시렁대면서 코우는 적당히 대답을 해두었다.
이번 맞선 장소는 변함없이 으리으리한 고급 요정이었다. 이런 곳에서 나오는 음식은 어쩐지 먹다가 목에 걸릴 것 같단 말이지. 또 불편한 자리가 되겠구만. 생각을 하며 코우는 미리 예약한 방으로 안내를 받아 복도를 걸었다. 그 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려온 건.
“거기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걸어가는 사람은 설마 제가 아는 그 사람일까요~?”
“헤헹, 네가 아는 그 사람이 얼굴천재 코우님이시라면 맞다고 해두지.”
덕분일까. 오랜만에 가벼운 목소리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익숙하면서도 조금 낯선 것 같은 얼굴이 보였다. 조금 낯설어졌지만 변함없이 반짝이는 눈동자도 똑똑히 보였다.
“오랜만이잖아, 나나쨩. 못 본 새 좀 자랐어?”
“선배가 그런 인사치레도 할 줄 알았어요?”
“엉? 진심이었는데…… 아, 굽이었어?”
“……굽이에요.”
프핫, 웃음이 터지자 아이는, 아니지 이제 제법 자라 더 이상 아이란 호칭이 어울리지 않는 그녀는 그러나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듯 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에 마치 학원 시절로 돌아가듯 머리를 쓰다듬다 뒤늦게 아차하고 손을 떼자 그녀가 눈을 깜빡인다. 아 다행이다. 괜찮았나 보네.
“이런 곳엔 무슨 일이야?”
“저요? 음~ 음음음, 비밀! 이에요. 그러는 선배는요?”
“뭐야. 자긴 안 가르쳐줘놓고? 그럼 나도 비밀 할래.”
“에~? 뭐예요, 난 못 가르쳐주는 거고 선배는 안 가르쳐주는 거니까 다르지. 아 혹시 맞선?”
눈치 빠른 것도 여전하네. 들통 났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던 코우는 문득 어떤 가능성이 머리에 스쳐지나갔다. 그러니까 어쩌면, 제 이번 맞선 상대가 그녀인 것은 아닐까 하는.
이럴 줄 알았으면 맞선장을 던져버리는 게 아니었는데,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께적지근한 기분이 들고 만다. 사실이라면 그녀는 어쩌다 이런 자리에 끌려오게 된 걸까. 어쩌다 저의 가문과 같은 곳이 엮여서, 맞선까지. 그녀는 상대가 저라는 걸 알고 있을까? 가문에 대해 어디까지 들어버린 걸까. 알면서도 설마 저랑 태연하게 대화를 나누는 걸까? 사실은 싫어하고 있으면 어쩌지. 순식간에 무수히 많은 상념들이 제 안에 흙탕물을 친다.
“손님, 저어…… 상대 분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앗, 죄송해요! 지금 갈게요. ──선배. 이따 서로 볼일 마치면 잠깐 보면 안 돼요? 오랜만에 만났는데~ 앗, 그치만 맞선이면 역시 오래 걸리려나.”
싸하게 가슴속에 피어오르던 감정은 전조도 없이 급작스레 피어오르던 것만큼이나 순식간에 다시 가라앉아버렸다. 진흙탕을 만들던 미꾸라지의 장난이 겨우 멎은 듯, 서서히 물결이 고요해졌다. 피식 익숙하게 웃은 코우는 제 눈치를 살피는 그녀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나도 오래 안 걸릴 거야.”
“그건 그거대로 문제 발언인 것 같지만~ 뭐 좋아요. 그럼 이따 봐요. 그리고 이거,”
손을 뻗어온다 싶더니 낼름하고 입안에 들어온 건 초콜릿이었다. 조금 쌉싸래한 맛이 혀끝에 돌다가도 마지막은 결국 달짝지근하게 녹는 녀석. 언젠가가 떠오르는 맛이다.
“이번 상대가 어쩌면 선배의 소중한 사람이 되어줄지도 모르잖아요. 가기 전부터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잘 다녀와요.”
활짝 웃는 그녀의 모습이 어쩌면 그에게 좋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그가 두고 온 것, 그가 결국 붙잡지 못했던 것, 그가 그어놓은 선 밖에 있는 것들을 떠올리고 말았으니까. 만약 그가 조금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아직 그 안에 있었을지도 몰랐을 것들이 기억나버리고 말았으니까.
“사이토 코우라고 합니다.”
“듣던 대로 멋진 분이세요. 후후.”
“그런 말 많이 듣습니다.”
“……후후후. 또 유쾌하신 분이기도 하고.”
학원에서 보낸 나날들은 어쩌면 그가 제 이름처럼, 가장 빛에 가깝게 지냈던 나날이었다. 바보 같은 짓을 해도 누구 하나 손가락질 하는 사람이 없었고, 서로 어깨를 부대끼고 더한 바보짓을 궁리했다. 밤이면 악몽 대신 같이 떠들어줄 사람들이 있었고 낮이면 햇살 아래로 당겨줄 사람들이 있었다.
이제는 당연하게 누릴 수 없게 되고 말았지만, 그래서 애써 기억하지 않으려고 했었지만, ──떠올리는 것마저 고통스러워 할 필요는 없었단 걸 문득 뒤늦게 깨달은 기분이었다.
여전히 그는 소중한 것이라거나 지키고 싶은 것 따위 만들 수 없었다. 그의 선택은 가족과 가문이었고, 그 이전에 자기 자신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 가는 정도라면 스스로에게 조금쯤 허락해도 되지 않을까? 굳이 선 안에 들이지 않아도, 너희가 소중하다고 말하진 않더라도, ……굉장히 자기 좋을 대로의 해석이었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나머진 젊은이들끼리 이야기 나눠야지, 그 말을 끝으로 어른들이 사라지자마자 코우는 금세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버렸다. 입안에는 아직도 초콜릿의 맛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아~ 피차 서로에게 관심 없는 거 뻔히 보이니까, 적당히 눈치 보다 끝냅시다. 제가 워낙 인기가 많아서 이 뒤로도 스케줄이 밀렸거든요.”
이러라고 준 초콜릿이 아니었을 텐데, 그녀가 이 광경을 보았으면 또 주먹을 움켜쥐고 퍽 때렸을까. 고운 화장이 찡그려지는 걸 유쾌하게 바라보며 코우는 당장에 일어나고 싶어 근질거리는 걸 겨우 내리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