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이 움직인다. 햇살은 각도를 조금 바꾸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실린 것은 코가 아릿할 정도로 짙은 장미 향. 느릿하게 깜빡이는 붉은 눈동자가 눈앞의 풍경을 훑는다. 시야에 가득 들어차는 것은 제 머리색과 꼭 닮은 꽃밭이었다.
사시사철 언제 어느 때 와도 시드는 일이 없는 만개한 장미의 향연. 그 한 가운데를 단단한 품에 안겨 거닐었지. 카르테, 이름을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와 따뜻한 품, 시드는 일이 없는 꽃밭처럼 변하지 않을 거라 믿었던 시간이었다.
──꽃밭은 변함이 없었다. 그 주인을 잃었음에도. 싱그러운 생을 자랑하며 시간이 멈춰 있었다. 어쩌면 거기서부터 잘못이었다고, 낫을 쥔 손이 가볍게 떨린다. 이조차 그에게 배웠던 것이지. 제가 손에 쥔 것 중에 그를 통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런 상대였다.
날카롭게 휜 끝이 그의 목전에 놓인다. 서늘한 날을 앞에 두고 상대의 시선엔 흔들림이 없었다. 흔들리는 건 저 뿐이다. 떨림을 숨기고자 아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꽃밭은 아직도 그대로예요, 스승님.”
저는 자랐고 스승님은 변했지만.
온화한 기억이었다. 옷자락을 쥐며 매달리면 세 쌍의 흰 날개가 자애롭게 감싸 안아주었다. 고개를 들면 애정이 담긴 시선이 내려왔지. 하늘에서부터 내리는 빛이 그의 품에 다 담긴 것만 같았다. 그를 통해 천사가 무엇인지 배웠다.
지금은 그를 통해 타천을 배우고 있었다. 검게 물든 한 쌍의 날개, 오른쪽의 역안, 짙은 피 냄새, 더 이상 찾을 수 없는 성(聖).
그는 변했고 저는 자랐다. 성장한 권능은 이제 선명히 그녀만의 빛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베어버리겠다는 듯 힘을 끌어올리는 그녀를 앞에 두고도 그는 이것만은 변하지 않았다는 듯 나른한 미소를 띤 채 손을 놓고 있을 뿐이었다.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생각인가요?”
한 때는 지고의 자리에 올랐던 이다. 배신자를 처단하겠다고 이미 숱한 천사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가 흰 날개를 붉게 적시며 쓰러졌다. 그녀라고 그를 막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까지 내려온 건 그것이 제 일이었기에, 그리고……,
“어째서 무기를 들지 않는 거죠? 이미 수많은 동료들을 베어놓고. 이제 와서 못 하겠다는 건가요?”
무언가 기대했을까. 무엇을 기대했을까.
그는 여전히 무기를 쥘 의지조차 보이지 않았다. 대신 닫힌 줄로만 알았던 입매가 유하게 움직였다.
“내가 그대를 어떻게 죽여.”
비겁한 말이었다. 그리고 지독한 말이었다. 눈가가 붉게 달아오른다.
“얌전히 죽어주시려고요? 그렇다면 차라리 돌아와 주세요. 용서를 빌어요. 신의 자비는 스승님을 받아줄 거예요.”
“미안. 그건 들어줄 수 없어.”
“그러니 제게 스승님을 베라고 하는 거군요.”
이러기 위해 가르쳐주셨던 건가요. 원망이 담긴 목소리에 그가 씁쓸하게 웃는다. 미안해. 그의 사과를 받을 때마다 속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입안에서 텁텁한 재의 맛을 느꼈다. 재를 뱉어내듯 원망 섞인 말을 토한다. 배신자. 응당한 반응이었지만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정말 내가 배신자인 걸까?
“죄를 회피하려는 건가요. 그 날개와 눈동자가 틀림없는 증거인데.”
차라리 변명을 해주었으면. 왜 이런 선택을 한 건지 납득을 시켜주었으면. 그도 아니면 아주 악당이 되어주지. 어째서 달라진 눈동자로 같은 시선을 보내와서는, 무기 대신 손을 내미는 걸까. 먼저 배신한 건 그면서 왜 제 말에 더 아프단 표정을 짓는 걸까. 스승님에게도 무언가 이유가…… 대신 변명하려는 마음 한구석의 목소리에 고개를 내젓고 대신 손에 힘을 준다. 흔들려선 안 된다. 흔들려선 안 돼. 그녀에겐 주어진 사명이.
사명, 이.
손이 떨린다. 붉게 회전하는 눈동자 너머로 지상에 내려가고부터 보게 된 여러 일들이 지났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옳은 것인가요? 우리의 행함은 틀리지 않았나요? 그렇다면 어째서, 스승님이, 로넨이, 에단이, 타천 같은 선택을……. 종종 떠오르는 회의에 답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 도리어 들려오는 것은 뱀의 속삭임과 같은 간악하고 달콤한 말들. 그 때마다, 그녀의 헤일로는 심정을 대변하듯 기익, 하고 불길한 소리를 냈지.
마치 지금처럼.
기익, 긱. 하고 금속으로 된 헤일로에 금이라도 갈 듯.
주춤하고 발을 물렸다. 두려워진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를 베는 일? 아니면 제가 흔들리는 일? 할 수 없어. 그렇게 확 든 생각에 처음으로 겁을 배운 아이처럼 눈앞의 상대를 두고 한 발, 다시 한 발. 물러났다.
사명을. 행해야 하는데.
──아. 흔들리는 시야로 붉은 꽃밭이 가득 들어찬다. 의식이 아찔해질 정도로 짙은 장미 향. 덤불에 몸이 사로잡힌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사명을 행하려면,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
“……다음, 에 다시. 뵐게요.”
사명을 앞에 두고 도망쳐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그 죄를 무엇으로 치르든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