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투는 한없이 정중하면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어딘지 도발하듯 얄밉다. 그의 셔츠 자락에 손을 올리다 그대로 멈추고 말았던 에슬리는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처럼 단추를 풀어나가던 손은 애매한 지점에서 멈춰 굳어버린 채였다.
풀어헤쳐진 셔츠 안쪽의 살이 희다. 햇빛에 닿은 적 없다는 듯 검은 셔츠와 대비를 이루는 가슴은 하지만 의외로 제법 탄탄했다. 책밖에 모르는 도련님인 줄 알았더니, 자기 관리는 하고 있다는 걸까.
──그야 제국군의 전(前) 기사라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는 꽤나 역할극에 몰입한 것 같았다. 평소라면 일부러라도 더 지우려고 하는 귀족의 면모를 숨기지 않고 내보이는 것부터가. 뒷머리를 쓰다듬는 긴 손가락에 목을 그에게 기울였다. 목덜미에서 끝나는 짧은 머리카락을 몇 번이나 사랑스럽다는 듯 어루만지며 이어서는 그 아래로 드러난 목가를 더듬어 문지르는 손길에 간지러운 듯 묘한 기분이 피어올랐다.
가볍게 어깨를 떨고 그에게서 상체를 조금 떨어트려 소파의 팔걸이로 무게를 옮긴다. 허벅지에 닿는 그의 온도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힐끔 시선을 내리면 마디가 도드라진 손끝이 제 다리 위를 스칠 듯 말 듯 아슬아슬해서, 어느 쪽이 유혹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뜻하지 않게 차려입고 그 기세를 타 유혹해보겠다고 덤빈 건 좋았다. 그의 무릎 위에 올라 아양을 부리듯 맨살이 드러난 허벅지를 문지르고 모처럼 넘긴 그의 머리칼을 매만지며 드러난 이마에 키스를 했다. 입술은 그대로 그의 눈가에, 뺨에, 살짝 벌어진 입술 위까지 차근차근 내려가 얇은 아랫입술을 할짝이다 조금 더 깊이 입을 맞추기도 했다. 혀를 얽으면 짓궂게 잘근거리는 이가 있었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살덩이가 뺨을 톡톡 두드리며 장난스럽게 휘저어왔다. 그러다 여린입천장을 끈질기게 자극하며 허덕이게 만들더니 숨과 함께 아차하는 사이 주도권을 빼앗겼다.
몸에 꼭 맞춘 드레스는 등부터 허리선까지 부드럽게 피부를 감싸주고 있었다. 그 라인을 그의 손가락이 느릿하게 더듬었다. 다음을 예고하듯 차근차근 움푹 팬 길을 따라 내려가는 손길에 자연스럽게 허리가 꼿꼿해졌다. 맞물렸다 떨어지는 입술의 틈틈이 숨을 뱉어내면 눈앞의 그의 뺨이 붉게 달아올라 있어 제 뺨 또한 똑같이 물들었겠구나 생각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맞닿은 입술 새로 칭찬해주듯 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잘 하고 있어? 잘 하고 있어. 유혹하려 한 건 그녀였으나 어쩐지 그에게 이끌리듯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몽롱한 머리는 그런 구분을 지워내고 그저 본능이, 그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도록 했다.
입맞춤을 이어나가며 넥타이를 끌렀다. 처음부터 느슨하게 하나 풀어져 있던 단추의 그 다음을, 다음을 차례차례 풀어나가며 셔츠 안으로 손을 뻗으려 했다. 했지만…… 에슬리는 제 등께를 더듬어 내리던 손이 치맛자락을 스쳐 엉덩이에 닿았을 때 결국 그에게서 떨어졌다.
그렇게 현재다. 열이 깃든 눈동자가 유리창 너머로 들어오는 빛을 흡수하며 반짝인다. 누구의 열망인지는 굳이 구분할 것 없었다. 다만……, 보란 듯이 엉덩이를 더듬는 손을 슬그머니 떼어내며 에슬리는 시선을 돌렸다.
“이렇게 밝으면……, 역시 좀 신경 쓰여.”
“그쪽이 문제였어?”
그럼 어둡게 하면 되지. 어려울 것 없다는 듯 그가 커튼을 내린다. 두꺼운 커튼은 바깥과 지금 두 사람이 있는 공간을 분리시키듯 빛을 가려주었다. 자연광이 사라진 실내는 조금 어두웠지만 그의 얼굴을 보기엔 어렵지 않았다.
분명 도발을 시작한 건 그녀임에도 여보란 듯 느긋한 태도인 건 그다. 기다란 손가락이 뻗어와 뺨과 턱 근처를 쓰다듬는다. 바라는 대로 어둡게 해줬는데, 어서 더 해봐.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귓바퀴를 타고 전해졌다. 그 얄미운 태도에 에슬리는 쓰다듬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깍지 끼곤 그의 가장 긴 손가락 끝을 가볍게 깨물었다. 그리고 그가 바라는 것처럼 멈춰 있던 손을 조심스럽게 움직여 셔츠 안으로 파고들었다.
닿은 피부는 따뜻했고 살아있다는 신호처럼 두근거림이 전해졌다. 손가락 끝으로 부드러운 피부 위를 원을 그리며 어루만졌다. 손바닥이 느릿하게 그의 가슴을 쓸었다. 실크로 된 넥타이는 사르륵 당겨 완전히 풀어내었고 길게 늘어선 그것을 보란 듯 제 목에 한 바퀴 둘러 리본을 묶었다.
“뭐야? 선물? 아니면 목줄?”
어둠 탓일까. 혹은 평소와 다른 그의 모습 탓일까. 희미하게 음영이 진 얼굴을 바라보며 에슬리는 용기를 삼켰다. 그리고 능청에도 아랑 곳 않고 꾹, 조심스럽게 몸을 그에게 더 기대었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들린다. 무릎을 움직여 그의 위로 보다 체중을 실으며 두근두근하게 뛰는 가슴에 손을 올린다. 그러는 사이에도 머릿속으로는 하나, 둘, 셋, 숫자를 셌다. 긴장해서 서두르지 않기 위한 나름의 수였다.
다섯, 여섯, 손바닥 아래서 쿵쾅거리는 고동은 그도 그녀와 다르지 않게 긴장했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좋을 텐데. 살그머니 입 꼬리를 당기고, 좋아. 열까지 셌다. 그제야 색을 섞듯 그와 시선을 나누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얕게 숨을 한 번 들이쉬고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입을 연다.
“어느 쪽이 좋아? 오늘은 내가 당신을 유혹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달링의 뜻대로.”
그의 눈동자가 조금 커지는 것을 보았을까. 어깨의 힘을 살짝 풀고 에슬리는 조금 즐거운 기분이 되어 돌아올 답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