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 꽃을 꺾었나
20 3년
여기서부터 고등부→
: 개인로그
▶고등부 1학년, 봄
“조, 좋아해요. 선배!”
이제 같은 건물에서 못 본다고 생각하니까 그게 싫었어요.
1살 아래의, 기술반의 아이였다. 귀가 빨갛게 되어 고백을 해왔다. 서로 오며가며 얼굴을 알고 지낸 게 2년, 그러다 방에 둘 진열장을 놓고 기술반에 의뢰를 고민하던 세이라에게 먼저 살갑게 도와주겠다고 말을 꺼낸 것을 계기로 가깝게 지낸 게 지난 반 년.
학원에서 머문 기간이 긴 편이기도 하고 타고난 성정이 온화한 세이라는 후배들에게 제법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어디까지나 의지가 되거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선배로서.
이런 고백은 처음이라 당황해버렸다. 곤란한 듯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리자 아이는 죄송해요. 너무 갑작스러웠죠. 하고 슬그머니 한 발 물러섰다. 그 모습에 반사적으로 아니에요. 하고 입을 열었다.
고백을 해오기까지 이 아이는 얼마나 많이 고민하고 생각했을까. 얼마나 용기를 그러모았을까. 지금 얼마나 무서울까. 퐁퐁 떠오르는 생각에 붙잡아놓고는 다시 거기서 침묵. 얼마간 어색하게 서로의 눈치만을 살피다 세이라는 겨우 아이에게 답을 주었다.
“정말로… 제가 좋아요? 어떤 느낌인지 알려주시겠어요?”
세이라의 답은 아이를 퍽 당황시킨 것 같았다. 어버버하고 허우적거리는 손에 미안해져 다시 눈썹이 축 내려간다. 하지만, 같은 건물에서 못 보게 된 게 서운하다고 하면 매일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되는 건지 생각해버려요. 뒤이은 말에 아이는 그래도 부족해요! 하고 외쳐주었다.
──그럼, 얼마나 보면 만족할까요?
그렇게 해서 봄날, 벚꽃이 피고 질 동안 짧은 연애를 해보았다.
・
・
・
나카노 미야코의 연구실은 여전히 굳게 닫힌 채였다. 약은 마침 떨어질 즈음 새로운 몫이 배달되었지만. 그 날도 세이라는 미야코의 연구실 앞에 쪼그려 편지지에 글자를 적었다.
[……보통은 1시간 이상 앨리스를 쓰지 못했는데 말이죠. 미야코 씨의 약 덕분인지 조금 더 통증을 참고 앨리스를 지속시킬 수 있었어요. 먹으면서 생각했는데 사전약과 사후약으로 나누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앨리스를 쓰기 전에 미리 진통 효과의 약을 먹어두면 사용하면서 점점 심해지는 통증을 보다 참아서 유지 시간을 늘릴 수 있을 것 같고….
쓰고 난 뒤에는 진통과 같이 열을 식혀주는 게 좋을까요. 엄청 뜨거워지거든요. 그리고 부어서 불편하고. 사용 시간만큼 소리가 나오지 않는 패널티가 끝나고도 말을 하기 어려운 느낌이에요.
아, 이번에 먹으면 시원한 느낌이 드는 것 무척 좋았어요. 박하맛 사탕을 먹는 느낌으로, 덕분인지 열이 금방 식기도 했고요. 미야코 씨의 약은 역시 굉장하네요.
…그래서, 앨리스의 사용 강도를 높여보는 일은 순조로워요. 미야코 씨는 언제쯤 돌아오나요? 약 만드는 것 말고도 같이 즐거운 일, 해보고 싶은데.
참. 저 연애…라는 걸 해보게 됐어요. 이것도 이야기 들려달라고 한 거, 미야코 씨였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만나면 들려드릴게요. 미야코 씨는 잘 지내나요? ……]
・
・
・
“이제 그만 해요.”
첫 연애의 감상은, 역시 어려워요. 였다.
언젠가 애정을 구분 짓는 일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좋아하는 감정에 차이를 둔다거나 아직 세이라에겐 이른 것도 같았다.
그보다는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쪽일까. 누구를 더 좋아하고, 누가 더 특별하고, 우열을 가리고.
「세이라는 우리랑 있는 거 별로야?」
별로일 리가 없는걸요. 모두, 모두 좋아하는데. 그치만 할머니가…… ……쉿.
왜 모두 똑같이 소중할 수 없는 걸까. 우열을 두면 상처 받는 쪽이 생긴다. 세이라는 자신의 마음으로 아무도 상처 받길 바라지 않았다. 어쩌면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혹은 위선적인 마음. 일부러 회피한다는 걸 스스로도 안다. 이렇게 해서 상처 받지 않는 건 스스로.
“그래서…… 헤어지고 왔어요.”
결국 선택해도 선택하지 않아도 상처를 주고 만다. 어중간한 마음, 어중간한 애정, 그 어중간함 사이의 균열이 누군가를 찌른다. 미안한 일을 해버렸어요. 작게 읊조리곤 침대에 모로 누웠다. 하아? 그걸로 설명 끝? 같은 반응을 보이는 룸메이트에게 배시시 미소만 보였다. 뭘 더 설명할 게 있나요.
그래도 여전히 동경을 버리지 못한 것은 언젠가, 머나먼 언젠가 후회하고 말지도 모를 걸, 상처 받고 말지도 모를 걸 감수하면서까지 아무런 계산도 넣지 않은 순수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해보고 싶다고. 한 사람만을 생각하고 몰두해보고 싶다고 그리는 풍경이 있기 때문일까.
‘엉망진창으로 울어도 좋으니 하루 온종일을 당신 생각만으로 보내고 싶어요.’
조금 불순한 의도가 섞인, 그럼에도 틀림없는 봄바람의 계절이었다.
▶고등부 2학년, 이른 겨울
할머니가 면회에 오지 못하게 된지 꼬박 2년째였다. 이번 겨울도 마찬가지. 옆집의 나카무라 댁에 대리로 부탁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찾아올 사람이 없는 면회일은 의미가 없었다. 2학년의 마지막 학기가 끝난 그 날도 세이라는 수영장으로 향했다.
풍덩, 그대로 침몰. 뽀글뽀글하고 산소거품을 뱉어내며 가라앉고 또 가라앉는다. 물속에서 흔들리는 수면을 보는 일은 기분을 가라앉히는 데 아주 좋았다. 한참 그렇게 바닥까지 내려앉은 채 멍하니 있었다.
고요하다.
면회일의 학원 내부는 언제나보다 조용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아이들은 학원 건물에 없고, 만날 사람이 없는 아이들은 숨을 죽이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저 세이라가 사람이 없는 곳을 찾아서 그렇게 느끼는지도 모르지만.
──작년 겨울이다. 할머니가 폐렴으로 쓰러지셨다고 들었다. 당장에 달려가 곁에 있어드리고 싶었지만 언제나 그렇지. 무리였다. 편지를 썼다. 수도 없이 많은 편지. 내일이 맑길 바라는 기원처럼 내일은 건강해지셨길, 내일은 답장이 오길. 그렇게 꼬박 2주를 넘게 편지를 썼다.
답장이 온 건 3주째의 수요일이었다. 낯선 글씨체. 할머니가 아직 연필 잡을 힘이 없으셔서, 그래도 괜찮다고 전해달라는구나. 이제 거의 다 나았다고 말야. 지금은 식사도 아주 잘 하셔. 걱정 마렴.
그 말에 안심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깨달았을 때는, 손에 붉은 결정석이 쥐어져 있었다. 그러나 쓸 수 없었다. 언젠가의 기억. 도와줄게. 그 말 한 마디에 의지해 간절히 잡았던 손. 결과는 실패. 지금은 안 돼.
게이트는?
아무도 몰라. 알려주지 않아.
고등부 건물에 있었어.
찾을 수 없어. 찾아도, 쓸 수 없어.
무력함. 무기력함. 탈력. 체념. 노력하기로 했음에도 때때로 이렇게 무너져 내리고 만다. 일어서는 일이 힘에 부쳤다. 내딛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해를 피해 밤을 배회했다. 아릿한 찬 공기를 삼키고 손가락이 굽어드는 것도 모른 채 허우적, 또 허우적. 그 날 밤부터였나. 잠을 설치게 된 것은. 아침이 오는 게 두려웠다. 할머니에게서 오는 편지가 혹시 검은 것은 아닌지 악몽을 꾸었다.
앨리스의 사용이 더 심해졌다. 어서, 어서, 모두 긁어내야 해. 텅 비어버릴 때까지. 그렇게 해서 돌아가는 거야. 어서, 조금 더. 기익, 긱, 벽을 긁는 것만 같은 거친 소리가 들렸다. 무시했다. 뚝, 그리고 투욱, 아픔에 익숙해졌다.
마음이 조급했다. 그러다 몇 번을 쓰러졌다. 걱정을 샀다. 미안해요. 사과도 잘 나오지 않았다. 반성하지 않잖아. 또 할 거잖아. 그 말에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콜록. 콜록콜록. 만성이 된 기침이었다. 목캔디의 맛이 잘 느껴지지 않았다. 혀가 질릴 만큼 삼킨 탓인가.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앨리스 총량은 얼마나 될까. 알기 무서워서 일부러 알아보지 않은 채 무턱대고 사용하기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누군가는 자신의 앨리스 수명이 끝나지 않기를 노심초사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배부른 바람인 걸까. 입 안이 썼다.
그리고 2학년 가을, 결국 거듭되는 혹사 행위에 병동의 선생님에게 크게 혼이 났다. 이유를 설명하자 그런 무모한 짓을 하는 아이가 어디 있냐고 또 혼이 났다. 네 앨리스, 잘못 쓰면 위험하기도 하잖니. 선생님의 손길 끝으로 툭, 가느다란 초커 형태의 제어구가 닿았다. 수영장 벽면에 흠집을 내버린 뒤 착용하게 된 것이었다.
여전히 어색한 제어구─실은 자주 벗는─를 만지작거리며 눈을 피하자 한숨을 내쉰 선생님은 총량을 살피는 일을 도와주겠다고 하셨다. 그만 무모하게 굴고. 그 말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네 안을 스스로 더듬어보렴. 네가 가장 이미지하기 편한 형태가 좋을 거야. 보통은 물 잔에들 많이 비유하지. 네 잔의 물이 얼마나 남았는지 말이란다.
들려오는 목소리를 따라 눈을 감고 자신의 안을 더듬어간다. 앨리스를 쓸 때마다 드는 감각, 그 근원을 향해. 세이라가 잡은 이미지는 물 잔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것이었다. 비유하자면 동굴, 바닷물이 차오르는. 지금 그 동굴 안에는 물이 얼마나 차 있을까. 어쩌면──,
-세탄?
-……아, 네.
저도 모르게 제 목을 더듬다가 허둥지둥 선생님에게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뻐끔뻐끔 인사를 하자 걱정스런 시선이 닿는다. 왜 그러니. 얼마나 남은 것 같아? 역시, 이런 혹사로는 별 소용이 없지? 그러니 그만하자는 눈빛에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앞으로는 조금 더 조심할게요.
보아선 안 될 것을 본 것만 같았다.
「설마 저주겠어~? 조심하란 걱정이지.」
다시 겨울, 졸업까지 앞으로 1년이었다. 그 때까지 그녀는 견딜 수 있을까. 돌아갈 곳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오늘도 천천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으며 세이라는 노래했다. 널리널리 퍼져라. 바다 건너편의 할머니에게까지 닿도록.
할머니, 세이라를 외톨이로 만들지 말아주세요. 부탁이에요.
“세탄 세이라 양.”
“네에…?”
“3일간 외박 허가입니다.”
그러나 되돌아온 것은.
▶고등부 2학년, 겨울. 지독하게 추웠던 겨울.
1.
신기하게도 차분했다. 어쩌면 이제야, 라고 생각했던지도 모른다. 이별의 예고는 옛적에 던져져 있었다. 단지 그 날이 오늘이냐 내일이냐 정도의 차이.
생각보다 덤덤한 스스로에게 놀랐다. 검은 옷을 찾아 입었다. 룸메이트의 얼굴을 보고 갈 수 없었다. 「잠깐 다녀올게요. 곧 돌아와요.」 메모 한 장을 남긴 채 학원을 떠났다. 고향으로 향했다. 기차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버스를 타고, 홀로 긴 여행길이었다. 고향으로 갈수록 기온은 온화해져갔지만 글쎄, 이상하리만치 추운 계절이었다.
9살의 외박, 16살의 외박, 그리고 18살의 외박. 학원을 나갈 때마다 늘 좋은 일이 없는 것 같다. 16살의 그것은 이제 나쁘지 않은 추억이라 말할 수 있지만, ……아직도 바다를 잃던 감각이 생생했다.
‘1년 뒤엔 아주 학원을 나가야 하는데, 그 때에도 좋은 일이라곤 하나 없으면 어쩌죠.’
막연히 그런 상상을 했다. 몹시 슬퍼졌다. 쓸쓸해졌다.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우린 아직 열여섯 살이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해, 나는…」
열여덟은 그럴 수도 있을까. 열아홉은? 성인이 되어서는?
아니지. 슬슬 투정은 그만 부려야 할 때였다. 그러니 삼켰다. 삼키고, 또 삼켰다. 목 안쪽이 화끈거렸다.
2.
10년 만에 돌아온 고향이었다. 영영 오지 못할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한 번 더 오게 될 줄을 알고 있었다. 이게 마지막이 되리란 것도.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귀를 기울일 여유도, 그리운 집을 느긋하게 둘러볼 여유도 없었다. 집 앞에는 흰 천이 올라와 있었다. 『故 世潭 波恵』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자 늦었다는 꾸중부터 들었다. 누구더라. 아마 모르는 얼굴이겠지. 모르는 얼굴이지만 친인척의 하나일 것이다. 9살 그 시절에도 이렇게 모두 모여 있었겠지. 어렴풋한 기억을 따라 자신의 자리를 찾았다. 이미 마을의 스님이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잠이 든 것처럼 고요한 얼굴이었다. 몸을 닦고 흰 기모노를 입히고 관에 누인다. 관 안에는 생전의 그녀가 아꼈던 것들을 함께 넣어준다고 했다. 이것도 넣을 거야? 누군가의 목소리에 그 때까지도 아래만을 향하던 고개가 위로 올라왔다. 바로 어제까지도 할머니의 곁에 있었다는 양 반질반질하게 먼지 한 톨 올라가지 않은 오르골이었다. 그건, 안 돼요. 소리를 내려고 했지만 이상하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손을 뻗자 오르골을 들고 있던 여자가 그것을 세이라에게 넘겨주었다. 할머니 가시는 길에 같이 드려야 하는 게 아닐까란 생각도 들었지만, 놓을 수 없었다. 관의 뚜껑을 닫고 화장터로 배웅한다. 사람 한 명의 무게보다 가벼워진 뼈를 골라 납골함에 담는다. 그러면 정말 이별이었다.
장례식은 굉장히 조용했다. 슬픔조차 실리지 않은 고요였다. 그래서 더 불필요가 소리가 들렸다.
-재산은 어떻게……
-가게랑 집은……
-이제 아무도 안 살 집인데 그냥 처분해요.
-저 애는?
-앨리스잖아. 바다 근처로 못 와.
-아직 보호자가 필요할 나이지?
-지원금은 어떻게 돼?
궁금하지 않은 소리들이 쌓여간다. 머리 위로, 어깨 위로, 세이라를 파묻어가는 것 같았다. 열여덟도 아직 어리구나. 쌓여가는 소리들 틈에서 멍하니 생각했다. 저 말들에 한 마디도 입을 열 수 없었다.
그저 소리에 침몰될 것만 같았다.
?
슬픔을 소중히 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이 감정 또한 내 것이라고 품어주는 것일까. 나는 슬프구나 인정하고 나면 그 다음은? 언젠가 이 감정에 끝이 찾아올까? 언젠가는 언제일까.
파도처럼 밀려드는 슬픔 앞에서 세이라는 늘 힘겨웠다. 슬픔에 휩쓸리지 않도록 댐을 세워도 보고 제 몸을 묶어도 보고 차라리 인정하고 어디까지 휩쓸릴 셈인지 지켜보기도 하고,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마음이 맑아지는 일은 없었다.
「나랑 바다에 가 줄래요?」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 파도에 섞인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 소리, 소리, 소리, 그 혼재 속에서 유일하게 또렷하던 목소리. 약속은 심해에 내리비치는 유일한 빛이었다.
그러나 때때로 그 빛 앞에서 눈을 감아버리고 싶기도 했다.
4.
배는 옆집에게 넘기고, 집과 가게의 처분은 알아서, 보호자는…… 어차피 서류상의 보호자일 뿐 누구여도 좋았지만 더 이상 싸우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3일째, 학원으로 돌아가야 하는 날, 한 마디도 입을 열지 않는 세이라를 두고 마음대로 떠들어대는 어른들을 피해 전화기를 들었다. 어색하게 번호를 누르고 겨우 입술을 뗐다. ──나카지마 선생님. 저기…….
오르골만 간신히 챙겨 멋대로 정한 것이 들키기 전에 어른들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자기 집인데도 불구하고 도망치듯 벗어났다. 막 버스에 오르려던 세이라에게 낯익은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세이라쨩, 이거 가져가. 그렇게 말하며 아주머니가 건네주신 상자에는,
손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게 되었다고 했다. 센베 가게는 반년이 넘게 닫혀 있었다. 먼지가 내려앉은 화로를 똑바로 볼 수 없어 3일간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아주머니는 그 사이 할머니의 말을 대신 편지에 옮겨주던 분이셨다.
상자에는, 삐뚤빼뚤해서 알아보기 힘든 글자의 편지가 가득했다. 세이라, 내 아가, 우리 손녀, 어쩌누, 내가 너를 두고 가면. 미안하구나. 미안해. 몇 번이나 쓰려다 다 쓰지 못한, 부치지 못한 편지들. 그리고 편지지 더미 아래 깔린 짜다 만 카디건. 잘린 흔적, 앞으로는 더 이어지지 못할 시간들.
……아아. 그렇구나.
그제야 실감이 들었다. 이제 아무도 없다. 슬퍼할 사람도 슬프게 하는 사람도 소리 낼 사람도 들을 사람도 없다.
아무도 없다.
5.
버스를 타고 비행기를 타고 기차를 타고, 다시 학원으로. 아직 남아 있는 저의 자리로 돌아왔다. 몸은 돌아왔지만 마음은 어딘가에 두고 온 사람 같았다.
그로부터 두 달 간, 세이라는 소리를 잃어버린 듯 입을 열지 않았다.
하루만에 이만큼 갠록치기 정말 힘들었는데(계획 없던 사람)
고등부 프로필 막판에 이것저것 고민이 깊어져서 헤맸었네요.
'누가 그 꽃을 꺾었나'의 다른글
- 현재글20 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