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기억이라곤 극히 한정적이다. 남길만한 기억이 없는 탓이다. 괴롭고 힘들고 아프고 끔찍하고, 아니면 남겨둬 봤자 하등 영양가가 될 것 없는 수많은 기억을 지우고 불태우고 찢고 하다 보니 남은 것이 몇 없었다.
그 남은 기억의 대부분은 책으로 채워져 있었다. 유일하게 간섭에서 벗어나는 시간, ‘자유’라고 부를만한 얄팍한 순간. 거기서 읽었던 책 중에 꼭 당신 같은 이야기가 있었다.
어떤 바보 같은 사내가 남에게 모든 것을 내어준 끝에 스스로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남지 않아 버려지는 이야기. 이건 이야기니까 허구니까 만들어낸 것이니까, 이런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사람들이 상상한 것에 불과해. 실제로는 없을 거야.
있을 리가 없지. 누가 이렇게 멍청하게 자기를 갉아먹어. 그게 무슨 이득이 된다고.
───그랬는데 눈앞에 당신이 있지 뭐예요.
여자의 눈이 물끄럼 당신을 향하였다. 탁한 머리색, 탁한 눈색, 피곤한 안색, 반짝이는 별의 이름을 가졌으면서 도통 스스로는 빛나지 않는 사내.
이미 모든 것을 타인에게 내주어 빛낼 것을 잃어버리고 만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폴룩스는 당신보다 밝던가요?”
그 빛은 진짜인가요. 맥락 없는 질문과 함께 당신과 여자 사이로 다시 노란, 노랗다 못해 희게도 보이는 광구가 떠올랐다. 또 다시 빛이 당신과 여자 사이로 숨을 공간을 지워낸다.
함께 바로 며칠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초라한 몰골, 음영이 드리운 얼굴 위에 손전등을 비추듯 억지로 빛을 드리우고 그림자조차 몰아내 피할 자리를 막아서던 날이 있었다.
결정을 내리고 선택을 하기 두려워 도망갔다고. 제 선택은 늘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고, 그게 괴롭다고 고해하던 사내. 그렇다면 계속해서 도망가도 괜찮았을 텐데 제 발로 돌아왔던 이해할 수 없는 남자.
당신 자신도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했지. 여자는 당신에게 이유를 만들어주기로 했다. 당신의 두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 쥔다.
“위선은요, 카스토르 씨. 따라할 선善이 선행되어야 해요. 황무지에서 꽃이 필 수 없는 것처럼요.”
그리고 모방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더라고요. 저로 말하자면 거짓을 뒤집어쓰고 선을 모방하고 사랑을 좇으려 했는데, 이렇게 실패만 하잖아요.
“당신은 선한 사람이에요, 카스토르 씨. 위선도 이쯤 되면 선이 아닐까요.”
천사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랑스럽고 무구하게, 20년을 넘게 만들어낸 표정이 완벽하다. 한 마디 한 마디의 목소리가 노래하듯 흘렀다.
“선한 의지와 선한 행동이 꼭 선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더라도요. 당신의 존중이 저를 지키는 것이 되지 못하더라도요.”
“착하네요, 카스토르 씨. 착한 아이예요.”
그러니 상을 드릴게요.
목까지 올린 지퍼를 내리고 웃옷을 벗었다.
“치료해주세요. 더는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속삭임은 간절하고 애절하게도 들렸다. 당신이라면 저를 구해줄 수 있죠. 당신밖에 저를 구해줄 사람이 없어요. 이걸로 기뻐할 거죠? 나를 치료하며 쓰임을 확인할 건가요.
이런 걸로 무슨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걸까. 변태.
이마에는 깨진 상처, 얼굴과 목의 긁히고 찢긴 상처들, 옷을 벗자 드러나는 수많은 멍과 타박상, 하나하나는 경상이지만 모아놓고 보면 무시할 수 없는 양이다. 그 상처들을 하나하나 손으로 짚으며 자요, 해줘요. 명령을 내린다.
그러다 이를 꼭 깨물었지. 또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아요. 당신의 선함이 역겨워요. 그런데도 나, 당신에게 치료받으러 왔어요. 이게 면역요법이란 건가요? 내 알레르기를 낫게 해줄 거예요? 그렇게 나를 꺾고 아프게 하고, 그걸로 당신 또한 아프고말고. 스스로를 꺾고 나를 꺾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