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시간이었다. 목소리가 하나 줄었을 뿐인데 누군가 공간에 음소거라도 한 듯 조용해진 시간이었다. 그야 그렇겠지. 이 상황에서 웃고 떠드는 쪽이 ‘이상할’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이런 분위기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아요, 앨런 씨.
그가 자신의 몸에 운명을 봉인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두 가지 모순된 반응이 들었다. 하나는 역시 당신이 그럴 줄 알았어요. 또 하나는 당신은 그러지 않을 줄 알았는데.
자기희생적인 면이 있는 사람이지만 동시에 정말로 제 몸을 갉아먹을 짓은 하지 않는 요령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당신이 그렇게까지 한 것은 아마도 ‘나는 괜찮아’, ‘아직은 괜찮아’, 그 마지노선이 있었기 때문이겠지.
그러나 100%는 아닌, 당신 또한 도박이었을.
“바보 같아요, 앨런 씨. 당신은 그게 냉정하고 합리적인 판단이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엄청 바보 같다구요. 혼자 있는 집이 그리운 게 아니래놓고 혼자 남았네요. 안심하고 마음이 쉴 수 있는 곳을 찾았는데 거기는 그런 곳이에요? 나라면 역시 외롭고 싫을 것 같은데. 운명이랑 껴안고 있으니 외롭진 않아요? 여긴 너무 조용하고 우울해요. 지내는 건 말이죠, ‘어디’도 중요하지만 ‘누구와’도 엄청 중요한 문제예요. 이 말 들으면 앨런 씨는 뭐라고 할지 궁금하네요. 돌아올 거예요? 정말 돌아올 수 있어요?”
책임지지 못할 일을 저질러놓고 내심 무서워하고 있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곤란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짓던 표정을 떠올렸다. 그렇게 몸사려놓고 중요한 순간에 엉망인 게 어떻게 보면 참 그다웠지. 분위기가 험악해지는 게 싫다고 해놓고 그 험악한 분위기 직접 만들기나 하고. 웃기지도 않았다.
-그러다 죽어요. 죽을 거예요.
봐요, 내 말대로죠? 슈트라도 된 것 같네.
한 번 운명을 몸에 가둔 순간부터 그 봉인을 온전히 해소하기란 무리일 거라 생각했다. 말하자면 저금통이었다. 안에 든 것을 꺼내기 위해선 배를 가르는 것 외에 방법이 없는.
“홀로 세계를 구한 영웅이 된다거나 하는 취미는 없을 줄 알았는데 이제 어떻게 할 거예요. 기다리긴 뭘 기다린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무슨 선택을 할 수 있는지도요. 죽을 거예요? 살고 싶어요? 그럼 멋진 척은 그만하고 있는 힘껏 발버둥 쳐봐요.”
운명을 몸에 가둔 순간부터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것만 같아요. 당신에게 정해진 운명은 죽음일까요. 외로움일까요. 그게 싫거든요 앨런 씨. 운명에게서 발버둥을 쳐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