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게 내리쬐는 햇살 아래 꽃잎이 녹아내리는 냄새를 맡았다. 카밀라에게는 낯선 여름의 향기였다.
“잘 따라오고 있냐?”
메아리치며 들려오는 매미의 울음소리, 어느 한구석 부족한 곳 없이 작렬하는 금빛 태양, 태양빛 아래로 살랑살랑 봉오리를 활짝 연 색색의 꽃들, 꽃향기를 가득 안고 스쳐 지나는 여름 바람, 바람을 따라 고개를 움직이면 보이는 뭉게구름, 하얀 구름을 배경으로 앞서 걷는, ……당신.
모든 것이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콘크리트 바닥을 구경하던 기억이 있다. 거대하고 높다란 건물의 옥상에서, 쏟아지는 빛을 피할 구석 하나 없이 그저 넓기만 하던 방수칠 된 녹색의 바닥 위에 쪼그려 앉아 일렁일렁 춤을 추며 피어오르던 열기를 구경했었다.
녹아내릴 듯한 방수재의 냄새, 퀘퀘하고 푸석푸석하던 시멘트 냄새, 풍경을 이지럽히던 신기루 같은 열기, 페인트 냄새에 취할 것만 같았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화상을 입는 줄도 모르고 태양 아래 하나의 점처럼 웅크리던 기억이 있었다.
그녀가 알던 여름이다. 그 지독하던 기억 위로 알록달록 새로운 기억이 덧칠되었다.
손을 뻗으면 사라질까 흐트러져 망칠까 겁이 날 만큼, 현실감 없는 풍경이었다.
“네-에!”
씩씩하게 대답을 하며 졸졸 따른다.. 습관처럼 환히 지은 미소에 뺨이 당겼다. 힐끔, 돌아보던 시선이 정면으로 돌아간다. 불어오는 바람에 낯설고 익숙한 향기가 뒤섞였다. 달콤하게 녹는 꽃향기, 청량한 나뭇잎의 향기, 그 위로 아스팔트의 냄새가 섞이고 그 모든 것보다 먼저 당신의 냄새를 맡았다.
역시 아직 꿈속인 것은 아닐까? 혀 위로 느껴지는,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낙인의 감촉을 더듬으며 카밀라는 이 모든 것이 잘 만들어진 환상 같다고 느꼈다.
어떤 환상통을 느꼈다.
꿈의 시작은 어디서부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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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헬 씨를 소중히 대할래요.」
찌그러진 그릇에 물을 담으면 찌그러진 형태의 물이 되고 만다. 어딜 봐도 예쁘지 않다. 온전한 그릇만큼 물을 담을 수도 없다. 불안정하고 금세 흔들리고, 뚜껑을 덮는 것조차 할 수 없지.
카밀라는 말하자면 찌그러진 그릇이었다. 움푹 패이고 구겨지고 칠이 벗겨지고 금이 가 깨지고, 몇 번을 덧칠해도 숨겨지지 않는 하자품이었다.
온전하지 못한 점을 누구보다 스스로 잘 알았다. 그래서 더 불안해했고 갈구했다. 온전한 척 하는 삶을.
눈앞의 남자는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었다. 한 번쯤은 어울려줄 수도 있고. 퍽 너그러운 말을 하며 기회를 주었다. 기만자, 같은 세계에 태어나 전혀 다른 인생을 산, 원망스럽고 미운 사람, 부러운 사람, 그녀를 초라하게 만드는 올바름과 올곧음과 선량함과 많은 빛나는 것들을 가진 사람, 그래서, 그래서 더──
더 바라게 되는 사람.
당신 옆에 있으면 나도 그런 척을 할 수 있게 될 것 같았다. 평탄함을 따라하고 평범함을 쫓아하고 평온함을 가장하여 그렇게, 나도 그렇게, 행복하게.
「제가 당신의 소중한 사람이 되면 안 될까요?」
당신이 빈틈을 보였다 생각했다. 외롭고 쓸쓸한 얼굴에,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면 될까. 꾸역꾸역 저를 욱여넣고 둥지를 틀어도 될까. 그러면 내가 당신의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있을까 기대했다. 그렇게 뻗어든 손을 당신은 또 잡아주었지.
그리고 돌아온 답에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마음은 차곡차곡 쌓여야지. 한순간에 만들어지는 게 아냐.」
차곡차곡, 어떻게요?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익숙해질 때까지 있어줄 테니까.
정말요? 어떻게 믿지?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내가 쭉 이상한 채이면 어쩌죠. 조금도 나아지지 않으면. 쌓아올리던 그것이 언제 무너질지 어떻게 알죠? 절대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고 붕괴되지 않을 거라고, 괜찮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죠.
이런 나로는 역시 안 되는 게 아닐까요.
당신이 보여준 부드러움 앞에서 또 울고만 싶어졌다.
그 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통증이 사라지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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쏴아아──쏴아아──
비가 내렸다. 모든 것을 씻어 내리는 비였다.
이런 걸로 제 오래 되고 해묵어 굳은 것들이 씻겨나갈 리 없는데, 마치 이걸로 모두 괜찮아질 거라는 양 가증스럽고 위선적인 빗줄기.
하나, 둘 다들 돌아갈 준비를 했다. 비일상에서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 가운데 미아 같은 얼굴을 하고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꼭 그녀만인 것 같았다.
괴리를 느꼈다. 선을 보았다. 나는 저 사이에 섞일 수 없다. 그런 스스로를 연민하고 웅크리는 건 특기였지. 세상에서 내가 제일 불쌍한 것 마냥.
또 그렇게 웅크리고 있으면 누군가 날 동정해줄까? 기민하게 굴리던 눈에 그가 보였다. 아, ──아.
“앙헬 씨.”
비에 젖은 뻐꾸기가 둥지를 찾아 울었다.
기억 속의 작은 손은 네모난 나무 블록을 쌓아올리고 있었다. 하트가 그려져 있고 별이 그려져 있고 나무가 그려져 있고 햇님이 그려져 있고 고양이가 자동차가 꽃이 케이크가, 보기에 좋은 것들을 다 넣어둔 듯 물감이 칠해진 나무 블록을 쌓아올렸다. 하나, 둘, 셋, 넷, 벨레로폰은 8층이니까 8개까지 차곡차곡.
콰-앙.
블록을 걷어찬 발은 누구의 것이었을까.
다시 한 번 쌓아올린다. 맨 아래는 자동차, 그 위로 고양이, 그 위로 꽃, 그리고 케이크.
와르르.
지진?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어.
한 번 무너지고 두 번 무너지고 세 번 무너지고,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아니, 원래 이런 게 아닐까? 그렇지. 원래 이런 걸지도 몰라. 나는 아무것도 쌓아올릴 수 없어.
“앙헬 씨. 앙헬 씨.”
다가가 소매 끝을 꾸욱 붙잡았다. 내리깐 시선이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움직인다. 느릿하게 속눈썹을 깜빡이며 그의 반응을 헤아렸다. 타이밍을 노려 침을 삼켰다.
“저 있죠. 모, 모아놓은 돈도 없지 않고. 요, 요리는 잘 못하지만, 청소도 빨래도 잘하고요. 그거, 그런 거 말고도 시키는 건 뭐든 다 할 수 있어요. 필요한, 필요한 사람, 앙헬 씨에게. 네.”
가장 잘하는 것은 동정을 사는 것, 거짓말과 내숭은 특기다. 어떻게 하면 상대가 제 말을 한 번이라도 더 들어줄지 조금이라도 마음이 흔들릴지 수없이 많이 해보았다. 그럼에도 고쳐지지 않는 버릇이 있다면 진심이 되는 순간 말을 더듬고 마는 것이다. 혀를 씹었다. 멍청한 소리 하지 마, 이 버러지야. 지금은 말이나 더듬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쓸모 있는 사람이 될게요. 쓸모 있어질게요. 그러니까 소중한 사람이, 소중한, ……그런데 나, 소중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이건 실패다. 써먹을 수 없다. 잡았던 소매 끝을 놓았다. “나 같은 걸 소중히 대해줄 거예요?” 클로로포름에 뇌가 쩌는 것처럼 멍청한 소리가 여과 없이 흘렀다.
무리다. 도망갈까. 입안에서 가지를 부러트렸다. 이 가지는 둥지가 될 가지인가, 아닌가. 한 번만 다시 해도 될까요. 두 번째엔 더 잘해볼게요. 당신이 날 주워주고 싶을 정도로 아주 잘.
“네가 뭘 기대하든 실망하게 될 거야.”
머리 위로 소리가 떨어졌다.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들었다. 내가 기대하는 게 뭔 줄 알고요.
“대신 언제나 같은 곳에 있을게.”
봐요, 그런 거라고요.
“한 가지만 약속해. 나랑 함께 지내는 동안만큼은 내게 필요한 사람보다 너를 위하는 사람이 되는 거야. 알겠지?”
“약속할게요.”
뇌를 거치지 않고 냉큼 답이 나왔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남지 않았다. 기억하는 거라곤 당신이 옆자리를 허락해주었다는 것뿐이다.
너 정말 생각하고 답한 거 맞냐? 불신하는 시선을 해사한 미소로 지운다. 저 잘할게요. 뭐든 잘할게요. 앙헬 씨가 시키는 거, 바라는 거, 다 해볼게요. 미소에 한숨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그게 아니래도. 내리던 빗줄기가 차츰차츰 가늘어진다. 초여름의 끝을 알리는 빗줄기, 모든 것이 순환하고 재생하는 한 계절의 흐름.
그 흘러가는 길 위에 서있었다. 두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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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잘 하고 있나요?
“앙헬 씨, 저기 아이스크림 판대요.”
그 때 당신은 왜 화를 내지 않았을까요. 어째서 눈물을 닦아주었을까요. 나를 동정했나. 나라면 그래도 된다고, 그럴 자격이 있다고라도 생각했던 걸까. 지금도 저는 당신이 왜 저를 받아주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내게 그런 가치가 없는 것만 같아.
“이거 봐요. 앙헬 씨, 구아바 맛이랑 아보카도 맛이랑 와, 두리안 맛도 있다.”
여름이 끝나면 이 신기루도 끝나지 않을까 나는 아직도 불안하고 두렵고 무서워요. 더위가 한 풀 꺾이고 나면 나를 둘러싼 이 뜨거운 온도도 식어버리고 말까봐. 불안하게 요동칠까, 변해버릴까 또 무너져버릴까. 그러면 나는 또 새 둥지를 찾아 날아가려 할까요.
기대하고 실망하지 않게 해주세요. 늘 같이 있어주세요. 환상통이 사라지지 않도록. 이 환상이 깨지지 않도록.
“이거, 이걸로 주세요~”
여름의 농밀한 바람이 불었다. 햇빛에 달궈진 공기가 터질 듯 부풀어 실려, 두 사람을 어루만지고 지나간다. 나풀거리고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리본도 같이 흔들린다. 처음 해본 리본이었다. 무척이나 예뻤다. 좋아하게 될 것 같았다.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좋아하는 게 생길 것 같았다. 카밀라는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