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넵에게 있어 마키타 린은 동갑내기에 닮은 구석이 많은 친구. 트레이너 캠프에서 만난 마음이 잘 맞는 친구.
부모님이 세상 각지를 돌아다니느라 바쁘고 대신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서 자랐다고 하는 친구는 그저 또래라서가 아니라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겹치는 곳이 많아서 그랬던 게 아닐까. 포켓몬을 잘 키우고 싶어서, 강해지고 싶어서, 챔피언을 목적으로 다들 각자의 목표를 갖고 모인 캠프 내에서 ‘트레이너’로서의 목적 말고 다른 목적을 갖고 있다는 점까지도.
그렇다고 이런 부분까지 닮을 건 아니었지만. 첫 체육관전. 비행 타입을 다루는 머스타 씨 앞에서 나란히 패배하고 터덜터덜 돌아 나올 때 떠오른 생각이었다.
체육관 도전은 휩쓸린 감이 없지 않았다. 배틀은 싫어하지 않지만 필사적이지도 않다. 배지를 8개 모아서 챔피언 리그에 도전한다? 한 번도 상상해본 적 없다.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가 아니었다. 단순히 ‘흥미가 없’었다. 강한 트레이너나 배틀을 잘하는 트레이너는 제 목표가 아니었다. 모두가 다 갖는 배지를 갖지 못해서 ‘뒤쳐지는’ 기분이 드는 것 정도가 마음에 걸렸을까. 14살 아이에겐 꽤 중요한 문제였다. 모두 갖는데 나만 갖지 못했어. 내가 어디 모자라는 건 아닐까. 소외되는 기분도 느꼈다. 그래서 ‘다음에야말로’ 결심을 했다.
이런 와중에 동갑내기 친구가 저와 마찬가지로 배지를 따지 못한 건 얄궂게도 위로가 되었다. 그렇구나, ‘나’만이 아니라 ‘우리’가 아직 미숙해서 그래. 같이 힘낼 상대가 있다는 것은 제게 기운을 주었고 린에게도 뒤처지지 않도록 힘내자는 경쟁심은 의욕을 불어넣어주었다. 혜성시티에 도착하면 같이 북새마을에 다녀오자. 약속을 나누었다.
북새마을을 나서 2번 도로를 지나자 어느새 새로운 체육관이 나타났다. 한 번의 패배는 저에게 좋은 승부욕을 불태워주었다. 이번에야말로 꼭. 포켓몬에게 무리를 시키고 싶지 않아 참아두었던 트레이닝 백도 가득 담아왔다. 아이들을 훈련시키고 다른 사람들의 전략 노트를 몰래 곁눈질하고 나름대로 전략이란 걸 세우며 만반의 준비를 다졌다.
──그랬는데, 또 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정말 이길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기분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조금 분하고 허탈하기도 했다. 크게 아쉬웠다. 왜 이기지 못한 걸까 회의감도 들었다.
동시에 반쯤은 자포자기 같은 감도 들었던 것 같다. 꼭 배지를 따야 하나. 그거 없어도 괜찮은데. 배틀은 내게 맞지 않는 걸지도 몰라.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이기지 못했잖아.
내가 못한 게 아니야. 그냥, 내가 약한 거야.
반복되는 패배의 경험은 무기력함을 안겨준다. 좌절도 주었다. 팔다리를 무겁게 짓누르고 그 자리에 주저앉혔다. 이기지 못하는 건 재미없구나. 멍하니 그런 생각이나 했다. 그런데도 한 번만 더, 하고 일어난 건 테토때문이었다.
시합에서는 졌지만 테토는 이겼다. 오로지 테토만은 이기는 경험을 했다. 처음이었다. 루리리 때부터 늘 지는 시합만을 시키던 테토를 이기게 해준 건. 두 번째 포켓몬 앞에서는 테토도 쓰러져 기절하고 말았지만 센터에서 회복한 테토는 한 번 더 할 수 있다고 의기양양하게 어필을 해왔다. 또 해볼게. 할 수 있을 것 같아.
디모넵은 그런 테토의 기세에 못 이기는 척 내일의 짐전을 예약했다. 그래, 딱 한 번만 더 해보자. 딱 한 번만.
“칼라마네로, 환상빔이다.”
“테토!!”
시합은 어제보다도 순조로웠다. 두 번째라서 그럴까. 이번에야말로 이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 순간, 테토가 혼란에 빠졌다. 눈앞이 핑글핑글 돌아 앞뒤도 분간하지 못하고 휘청거리던 테토는 자기 꼬리에 얻어맞고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만 같았다.
‘또 지겠구나.’
‘역시 무리인 거야.’
‘나는 약해.’
‘그만 두자, 체육관 도전은.’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응원해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테토가 아직 쓰러지지 않았으니까, 여기서 내가 포기할 수 없어. 그런 생각에 겉으로는 의연한 척을 했지만 내심으로는 그래. 테토를 믿지 못했다. 이번에 지면 정말 그만 둬야지. 더는 하지 말아야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칼라마네로 기절! ……승자, 디모넵, 테토!”
“이겼, 어?”
정말로? ……내가 이긴 거야?
실감하지 못하는 트레이너를 두고 마릴리는 어디서 다시 기운이 샘솟았는지 폴짝폴짝 뛰어 올라 기쁨을 만끽했다. 기절하지 않았어. 시합장 위에 끝까지 서 있었어. 내가 이겼어. 해냈어.
‘봐, 디모넵. 내가 해냈어.’
테토는 알고 있었다. 승리의 기쁨을. 견디고 견딘 끝에 얻어낸 그 값진 경험을. 그래서 마지막까지 혼자 포기하지 않았다. 또 한 번 이 기쁨을 느끼고 싶다는 오직 그 한 가지 마음으로.
그리고 기쁨의 경험을 디모넵에게도 나눠주었다. 좌절을 딛고 일어나 얻는 꿀보다 감미롭고 달콤한 경험을.
…… ……
……
…
……닮은 구석이 많은 친구는 또 한 번 눈앞이 하얗게 질리는 경험을 해버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이나 쌓이고 만 그 좌절의 무게를 디모넵은 섣불리 가늠할 수 없었다. 무릎이 꺾이고 만 친구에게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까.
린은 정말 배지를 바라요? 포켓몬이 다치고 쓰러지는 걸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게 아니었어요? 괜찮아요. 꼭 배지를 따지 않아도. 그게 아니더라도 린에겐 하고 싶은 일이──……,
아니. 하지만 그 말 말고.
한 발 앞서 가버려놓고 이런 말을 하는 건 치사할지도 모른다. 린에게 ‘디모넵은 이겼으니까 그런 말 하는 거야.’ 이런 답이 돌아와서 정말로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요 린.
“이대로 지는 경험만 한 채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고개를 묻어버리고 만 린의 두 어깨를 조심스럽게 감싸 쥐고 마주보았다. 침울하게 내려간 눈을 억지로 맞추었다.
“딱 한 번이라도 좋아요. 린이 보면 좋겠어요. 마지막까지 체육관에 우뚝 서 있는 린의 포켓몬의 뒷모습을. 이기는 기쁨을 느껴보면 좋겠어요.”
그건 아주, 무척이나 대단히 기분이 좋거든요. 내가 무슨 목적으로 여기 왔는지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지도 잊을 만큼 눈앞이 반짝반짝한 빛으로 가득 차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운이 샘솟는 그런 경험이에요.
틀림없이 린에게 필요한 경험일 거예요.
“더는 못할 것 같아도, 이 이상 지고 싶지 않아도, 그런 엉망진창의 슬픈 기분만을 안은 채 이 경험을 끝내버리는 건…… 슬프니까요. 꼭 이곳 체육관이 아니라도 좋아요. 다음 체육관에선 할 수 있을지 몰라요. 그 때까지 내가 린을 응원할 테니까, 린을 믿고 있을 테니까 이대로 포기하지 말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