둥그런 알의 표면이 푸릇푸릇하게 뒤덮였다. 껍질에서 풍기던 풀냄새가 겨우 냄새에 지난 게 아니라는 듯 이 아이는 이렇게 자기주장을 해왔다. 한 층 더 부드럽고 폭신폭신 해진 표면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면 그 아래로 단단하고 얇은 표피와 선명한 고동이 있었다.
이제 정말 머지않았다. 저를 안심시키려는 듯 풀빛으로 꽁꽁 휘감은 알을 쓰다듬던 디모넵은 작은 심호흡과 함께 그 꼭대기에 이마를 붙였다. 푸르게 뒤덮인 알의 표면을 보고 처음에는 안심했고 두 번째로는 헛웃음이 났다. 아직 태어나기도 전인 아이에게 눈치를 준 것만 같았다.
아니야, 호구마. 나는 정말로 너를, 어떤 너라도───
……정말로?
메시를 보고 겁을 먹었다. 샬룬 덕분에 주저앉았다. 폴룩스에게서 도망쳤다. 그리고 또, 그 다음엔 또, ……디모넵은 고스트 타입의 포켓몬을 무서워한다. 그것은 숨길 수도 없는 진실.
원래부터 이렇게 무서워했던 것은 아니다. 어린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늦게 자면 팬텀이 그림자를 훔치러 온다느니, 어른 손을 놓고 돌아다니면 흔들풍손이 잡아간다느니 고스트 포켓몬의 괴담을 들으며 자란 탓에 생긴 겁은 있었지만 지금처럼 경기를 일으킬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이렇게 두려워하게 된 걸까.
몇 번이고 같은 질문을 받았다. 그 때마다 일부러 생각하거나 떠올리지 않았다. 그 날을 떠올리기 위해서는 거쳐야 할 기억이 많았다.
「……무리라면 먼저 돌아가세요, 디모넵 씨.」
어머니의 얼굴이 스쳐 지난다.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기억이 있었다.
12살의 디모넵은 그 날도 어머니를 그리고 있었다. 적어도 1년에 한 번씩은 집에 돌아왔었는데, 그런 약속 나는 한 번도 한 적 없다는 듯 마지막 방문부터 꼬박 2년 반을 나타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물어보면 아버지는 곤란한 얼굴로 “글쎄, 그 사람도 자기 일이 있으니까.” 모호한 답을 주었지.
그 때의 아버지에게 어렴풋 서린 그리움, 쓸쓸함, 그리고 아이를 향한 죄책감까지 그 복잡한 감정을 어린 디모넵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버지의 표정만은 깊이 기억에 남았다.
그러다 돌연 돌아왔다. 돌아왔다고 해야 할까. 나타난 것은 아닐까. 천관산에 일이 있어 가는 길에 들렀다고 했다. 이상 에너지가 관측되었으니 이 타이밍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서두르는 어머니에게 그럼 나도 데려가 달라고 고집을 부렸다. 어머니는 2년 반 만에 보는 제 아이를 퍽 낯설고 서먹하게 응시하다가,
「디모넵 씨가 올해…… 11살, 아니. 12살이었나요. ……그래요. 하지만 언제든 돌아가고 싶으면 돌아가도 좋아요.」
허락해주었다.
왜 허락해주었던 걸까. 차라리 그 때 안 된다고 했으면. 어머니 탓을 하기 쉬웠을 텐데. 따라가고 싶은 이유는 대단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재회한 어머니와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었고, 어머니가 그렇게 좋아하고 집착하는 연구가 얼마나 대단한지 직접 보고 싶었다. 어머니와 함께 같은 활동을 한다는 성취감도 있었을 것이다.
캄캄하고 축축하던 천관산 동굴 안쪽, 포켓몬의 빛에 의지해 내딛던 조심스런 걸음걸음, 작은 돌멩이 하나가 굴러가는 소리마저도 광활하게 울리고 한편으로는 천장에 매달린 수많은 주뱃과 골뱃의 날개짓이 숨 막히게 고요하던 곳.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들만의 규칙으로 견고하던 곳. 인간의 손을 타길 거부하던 땅. 돌이켜보아도 좋아서 갈만한 곳은 아니었다. 하물며 12살 어린아이가. 그럼에도 오기를 부리다가 결국 2층도 가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어머니는 디모넵을 한 번, 위층을 한 번 보다가 한숨을 내쉬고 화강돌에게 말했다. 「디모넵 씨를 입구까지 바래다주고 돌아오세요.」 천관산에서 포착된 기묘한 에너지원에게 서두르고 싶었던 거겠지.
이 때까지만 해도 디모넵은 화강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조금 꺼림칙한 느낌도 있었지만, 어머니의 포켓몬이니까.
옛날 일이다.
빙글빙글 돌아가던 시야, 튀어나온 바위와 돌에 이리저리 부딪쳐 욱신거리던 몸, 떨어지고 또 떨어졌다. 아주아주 깊고 깊은 골짜기. 눈앞에 별이 돌아가는 것 같았다. 아니, 별 대신 화강돌의 기묘한 도깨비불이 시야 가득 맴돌았다. 멀리서 링곰의 포효가 들렸다. 도저히 혼자 힘으론 기어 올라갈 수 없었다. 화강돌이 빙글빙글 서성거렸다.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꾸만 눈이 감겼다. 108개의 영혼들이 디모넵을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는 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오지 않았다. 끝내 어머니는…… …….
‘필요한 타입에 고스트 같은 걸 적는 게 아니었어.’
디모넵은 화강돌을 무서워한다. 고스트 타입이 무섭다. 그들은 제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고스트 타입만 보면 숨이 막혔다. 마주 볼 수 없었다. 겁이 났다.
옛 기억을 끄집어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극복되는 건 없었다. 그저 묻어두었던 상처가 조금 쓰라려올 뿐.
어느덧 알의 부화가 머지않았다. 파릇파릇하게 뒤덮인 표면을 쓰다듬으며 디모넵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