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할 사람은 누구고 사과 받을 사람은 누구였을까. 무엇을 사과해야 했을까. 상처 입히고 싶은 게 아니었다, 결코.
때를 놓친 후회였다. 결과적으로 오랜 상처를 건드리고 말았다. 단단하게 묶인 안대 너머를 열어보지도 않고 안을 헤집었다. 아프게 했다. 어떠한 자격도 권리도 없이 주제넘게.
“올리브 씨가 사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디모넵은 오늘 일을 결코 잊지 않기로 한다.
◇
12월 27일, 캠프를 시작한 날. 수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에 모였다. 하나같이 강한 개성의 소유자였다. 그 사이에서 아, 저기엔 닿아서 안 돼. 미리부터 기억해둔 것이 있다면 검은 안대다.
상처는 단순한 상처로 지나지 않는다. 다치게 된 과정이 있고 낫기까지의 시간이 있다. 흉이 남지 않더라도, 흉이 남았다면 더더욱. 아직도 아물지 않은 그곳을 무신경하게 헤집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꾸준히 의식했다. 눈여겨보았다. 유독 안대에 관해서는 방어적이던 올리브의 태도 때문이었을까. 어느 날 무심코 안대에 손을 뻗었을 때 보인 놀라운 모습은 뇌리에 선명히 박히기도 했다. 안대는 태산처럼 우뚝 선 올리브가 사실은 종이 판넬 뒤에 서있을 뿐이라고 나쁜 비밀을 속삭여 넣었다. 그렇지 않은데. 디모넵이 아는 올리브는 결코 그렇지 않은데.
“어릴 때부터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의지받기만 하는 게 분했고. 살기 위해 하루하루 버티다보니 슬픔을 공유하고 위로받을 친구도 없었어. 설상가상 눈도 잃어서 그나마 내가 유일하게 할 수 있던 일까지 뺏겼지. ……자, 이제 모르는 척 할 필요 없어.”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닌데 올리브야말로 무언가 모르고 있다.
“제가 아는 올리브 씨는요.”
단단하고 강한 사람이었다. 쓰담을 무거워하지 않고 안고 다닐 만큼 강하고 바위타입처럼 단단해서 믿음직스러웠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었다. 안 보이면 찾으러 가고 보이면 매달리고 싶어지고, 작지도 크지도 않은 그 등이 둥글게 박힌 바위 같아서 저 바위는 잘 흔들리지 않겠구나. 깨지거나 부서지지도 않겠구나 그런 안심도 들었다. 오히려 이러다 너무 의지하고 어리광부려버리진 않을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저만 그렇게 볼까요? 캠프의 다들 비슷하게 생각할 거예요. 올리브 씨가 바위타입 관장님이 되고 싶다고 했을 때 누구도 올리브 씨는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걸요. 그게 지금의 올리브 씨예요. 올리브 씨가 쌓은 거예요.”
과거의 올리브가 어땠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의 올리브와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아무도 동정하지 않았고 얕잡아보는 사람도 없었다. 할 수 있는 게 없다니, 얼마나 많은 것을 놀랍도록 해낼 수 있는데. 이곳의 모두가 올리브를 친구로 여겼다.
디모넵은 그랬다.
적어도 디모넵은 그랬다. 올리브에게 의지했고 올리브를 믿었고 올리브가 좋았다. 슬픔을 나누고 싶었고 아픔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동정해서도, 얕잡아봐서도 아닌 순수한 친애로. 많은 것을 나누고 함께하고 싶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는 건요 올리브 씨. 올리브 씨에게 안대가 약점이 아니면 좋겠어서, 안대가 거론될 때마다 움츠러들고 작아지는 올리브 씨가 속상해서, 눈을 잃어버렸든 잃어버리지 않았든 당신은 더는 예전이랑 다르다고, 아무도 당신을 얕잡아보지 않는다고 말해주고 싶어서예요.”
한 발 내딛고 조심스럽게 손을 잡았다. 익숙하지 않은 것, 그만한 경험이 없는 것, 그렇다면 앞으로 익숙해져 가면 될 많은 것들. 그 중에 하나.
“그래도 역시 미안해요. 억지로 말하게 한 건. 좀 더 올리브 씨가 말해도 괜찮다는 안심이 들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는데……. 그치만, 들은 걸 후회하지는 않을래요. 올리브 씨를 더 알게 된 것을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올리브 씨를 안아줘도 될까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그냥, 그러고 싶을 뿐이에요. 덤덤하게 닿아오는 시선 앞에 디모넵은 언제나와 다르지 않은 미소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