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리는 디모넵의 엔트리의 가장이에요. 동시에 디모넵의 파티의 가장이기도 해요. 엔트리와 파티의 차이가 뭐냐고요? 엔트리는 포켓몬들만, 파티는 디모넵을 포함해서예요.
즉, 테리는 최근 기운이 없고 시무룩한 디모넵에게 힘을 북돋아줄 필요성이 있는 거예요. 어제 막 새 친구를 사귄 디모넵은 품에 전지충이를 꾹 안은 채 가끔 전기자극이 올 때마다 파르르, 웃, 헤헤, 하고 이상한 반응을 보이며 웃곤 하던데 저렇게 두어도 되는 걸까 걱정이 되는 것 있죠.
풀 포켓몬은 말이죠. 여러 약초나 독초, 다양한 가루들에 대해서도 박식한 편이랍니다. 애석하게도 테리는 가루 종류의 기술을 배우지 못하지만요.
‘그건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에요.’
투덜투덜.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지만요.
그래서 테리는 파티의 가장으로서 다른 포켓몬들을 모아놓고 쑥덕거렸어요. 디모넵이 기운 나게 하기 위해서 일단은,
‘돈을 벌어오는 거예요.’
테리, 체리꼬, 꽃집 종업원 경력 있음.
테리의 채찍질에 포켓몬들은 서둘러 일하러 나왔어요.
그 두 번째, 테마리의 경우
테리의 채찍질을 받으며 나온 테마리는 도대체가 인간 사회란 것은 이해할 수 없다고 짜증을 부렸다. 자신의 트레이너는 왜 새싹 대신 버섯을 키우기 시작한 것이며 울적해서 벽만 보고 있지 않나 기껏 사온 도시락도 뒷전이고 기차 바닥을 파고 들어갈 듯 땅을 파는 트레이너를 테리가 질질 끌어다가 햇볕에 말리는 걸 보는 것도 벌써 어제오늘 일이었다.
아니, 그건 좀 진귀한 광경이었다. 빨랫줄에 수건을 걸 듯 창틀에 트레이너를 널어놓고 그 위에 누름돌처럼 앉아 있는 테리는, ……생각보다도 저 체리꼬, 트레이너의 어리광을 받아주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가차 없기는.
햇볕에 노곤노곤하게 얼굴이 피어나는 트레이너와 광합성을 하며 포지티브 폼이 되어 그 위에서 빙그르르 춤을 추는 체리꼬, 그러다 혹시 트레이너나 체리꼬가 떨어질까봐 그 아래서 발을 붙잡은 채 수심이 가득한 그랑블루나 그러거나 말거나 하늘을 날아 열차를 따라잡는 피죤까지─마릴리 그 녀석은 당최 우리랑 어울리지를 않는다. 어디 가서 또 인간에게 아양이나 떨고 있겠지─. 난장판이 따로 없다고 느꼈다.
‘그러니까 그 푼돈 좀 벌어오는 걸로 트레이너가 좋아할 수 있다 이거지? 그래, 알았다.’
저 난장판에 별로 끼고 싶지도 않았고.
테마리는 글러브를 툭툭 두드리며 자기에게 맞는 역할이나 하고 오기로 했다.
‘여기서 제일 센 놈이 누구냐, 앙?’
그 세 번째, 테이의 경우
생후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테이는 아직 돈의 가치를 잘 몰랐다. 그야 이 사회는 복지가 굉장히 잘 되어 있기 때문에 모두가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힘내며 적당히 평화롭게 살 수 있는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냥 맛있는 것과 조금 더 비싸고 맛있는 것에는 차이가 있었고, 여가를 공원에서 보내는 것과 유원지에서 보내는 것의 차이도 있었다. 다시 말해 상당히 평화로운 축에 속하는 우리 사회에서 부유함이란 행복의 선택지를 늘려주는 것이었지만,
아직 어린 테이는 그 가치를 잘 몰랐다.
‘돈이 있어야 도시락을 10개는 더 살 수 있어요.’
‘디모넵이 좋아하는 맛있는 과자와 빵도 살 수 있어.’
‘내 몬스터 볼을 꾸밀 귀엽고 깜찍한 데코 스티커도 살지 몰라.’
‘그런 건 다 됐고! 일단 저 녀석이 덜 울적할 수 있다는 거야.’
그런 테이를 둘러싸고 디모넵의 포켓몬들은 트레이너도 하지 않은 경제 교육에 들어갔고, 테이는 곧 이해하게 되었다.
트레이너에게 힘이 되는 것, 그것은 즉, MONEY.
‘나도, 돈을 벌어올게.’
성공적인 경제교육에 어느 샌가 선글라스를 찾아 쓴 테리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 네 번째, 테논의 경우
전지충이는 기억하고 있었다. 진화하기 전의 자신은 여기저기를 자유롭게 굴을 파고 움직이며 먹고 싶은 나뭇잎이나 수액을 흡족하게 채웠다. 배가 든든히 부르면 턱 쪽에서 파직파직하고 전류가 흘러 가끔 귀찮게 구는 새 포켓몬이나 영역을 빼앗으려드는 벌레 포켓몬을 쫓아내기도 무척 유용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몸뚱이가 비대해지더니 예전처럼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다. 턱 아래로도 살이 오르고 다리도 토실토실해져 네모동글하게 변한 몸은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부엽토를 먹기에도 벅차고 말았다. 보드라운 흙을 턱으로 마구 헤집어 파내 축축하고 따뜻한 그 안쪽에 웅크리는 게 기분이 좋았는데. 하지만 몸이 둔해지고 나서부터는 생각도 둔해져 얌전히 낙엽더미 위에 몸을 묻고 지냈던 것 같다.
그랬는데, 어쩌다 열차에 올라타게 되었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투구뿌논에게 잡혀와 멋대로 날아온 건지 지나가던 인간에게 배터리 대신 주워진 건지 기억나지 않지만, 기차 생활은 별로 즐겁지 않았다.
여긴 흙도 부엽토도 없고 매일매일 열차가 철로를 달리는 소리로 시끄럽기만 하니까.
“여행은 좋아해?”
그러던 제 앞에 어느 날 작은 인간이 나타났다. 인간에게서는 그리운 잎사귀 냄새가 가득했다. 아이의 손에 번쩍하고 허공으로 들렸을 때는 아주 오랜만에 신선한 공기를 쐬어 기분이 좋아졌다.
열차에 탄 뒤로 내내 잊고 있던 공기다. 여행, 새로운 곳, 이 작고 답답한 쇳덩어리를 벗어나는 것.
“그래? 그럼 내가 날개를 줄게. 같이 훨훨 날아다니면서 여행하자.”
전지충이는 몬스터볼에 들어가 눈을 감았다. 이곳은 열차보다 훨씬 고요하고 포근했다. 그의 이름은 테논이 되었다.
“언젠가 높이 날아오를 네 이름이야. 캐논처럼.”
테논은 기대를 품었다. 트레이너와 함께 화창한 하늘 아래를 나는 꿈을.
……그런데, 이 트레이너 어디 갔지?
햄버거를 와구와구 먹던 테논은 어느새 사라진 트레이너를 찾아 힘겹게 몸을 꼬았다.
그 다섯 번째, ‘드디어’ 디모넵의 경우
……
……
……
아? 드디어 제 차례인가요? ……이대로 제 차례는 돌아오지 않고 끝나는 줄 알았어요. 포켓몬들에게 자리를 빼앗기다니, 혁명의 주인공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니까요. 스러지는 악역으로요. 갑자기 포켓몬들이 멋대로 우르르 몰려다니며 저를 따돌리지를 않나. 저 모르는 사이에 다른 트레이너에게 시비를 걸지 않나. 테리는 대체 언제 선글라스를 꺼내 쓴 걸까요. 저거 로드 씨에게 받은 건데. 숙련된 조교의 얼굴을 하던 테리가 낯설어서 저는 저 아이가 제 포켓몬이 아닌 줄로만 알았어요.
얼떨결에 트레이너도 없이 배틀을 한 분들에게 꾸벅꾸벅 사과를 하고 아이들을 데려오자 아이들은 왁자지껄 자기 할 말이 많다고 저에게 매달려왔어요. 하나하나 이야기를 다 들어주기엔 힘들어서 대표로 저는,
테이를 불렀어요.
왜 테이냐고요? 가장 어리고 가장 솔직할 것 같았거든요.
“자, 테이. 말해봐. 그렇게 싸우고 싶었어? 갑자기 왜 그랬던 거야, 너희.”
제 말에 테이는 슬쩍 시선을 피했어요. 뭔가 말하기 어려운가 봐요. 저는 테이의 어깨를 잡고 탈탈 흔들었어요. 그러자 테이가 슬쩍 저에게, 자기 손가락으로 슬쩍 O를 그리는 게 아니겠어요?
“누가 그런 걸 가르쳐준 거야~~~~!”
내부고발자에 의해 제 앞에 선 테리는 도리어 저에게 ‘그러면 포켓몬들을 걱정시키지 말라고요, 디모넵. 트레이너 자격 부족이에요.’ 같은 소리를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