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늘어나면서 손이 10개라도 모자랄 상황이 되어버렸어요. 이상하다. 테리는 혼자 잘 컸던 것 같은데. 제가 이런 말을 하면 테리는 ‘반대가 아니고요?’ 하고 특유의 ㄱ-한 표정으로 절 보겠죠. 그래도 캠프가 벌써 두 달이 다 되어가면서 편의상 전반조라고 부르는 아이들은 이제 신경을 덜 써주어도 괜찮은 편인데요. 후반조…… 그러니까, 테논부터 시작해서 이후의 아이들은 아직 좀 더 지켜봐주어야 하는 편이에요.
그 중에서도 테스티아는 특히요. 이 아이는 정말 마이페이스에 태평한 타입이라 제가 눈을 떼면 금세 혼자 꼬물꼬물 자기 흥미를 끄는 것으로 가버리고 말아 눈을 뗄 수 없어요.
갓 화석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테스티아는 그랬어요. 커다랗고 동그란 눈을 느리게 끔뻑이면서 이 낯선 세계를 받아들이기 바빴죠. 어떻게 보면 굉장히 순수하고 또 무구하고, 백지 같은 아이였어요. 그래서 자기가 받아들이는 이 세계가 어떤 색인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의문조차 갖지 않고 흡수하기 바빴죠.
-눈을 떴는데, 바닷속이 아니야.
-여긴 어디지. 너는 누구야?
-그렇구나. 그래. 전부 달라. 낯설어.
-그럼 이제부터 알아갈게.
덕분에 저는 책임감이 얼마나 막중했는지 몰라요. 수없이 긴 시간을 뛰어넘어 이 자리에 눈을 뜬 테스티아에게 낯선 세계를 알려주고 이곳에서 테스티아가 마음 붙일 집이 되어주어야 했으니까요. 덕분인지 테스티아는 제게 찰싹 달라붙어서 떠나지 않으려는 것 같지만……, 몬스터볼은 익숙하지 않을 테니 되도록 바깥에 두는데 무언가 흥미 있는 걸 발견해 꼼질꼼질 움직이기 전까지는 주로 제 등이나 팔에 찰싹 달라붙어 있더라고요.
……오늘은 오드리 씨가 붙여주었던 레몬 팩의 냄새가 맘에 들었는지 얼굴에 달라붙는 통에 숨쉬기가 조금 힘들었지만. 테스티아는 신맛을 좋아하나 봐요. 새로 알았어요.
“자, 이건 네 몫이야. 테스티아.”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간장을 바른 주먹밥을 앞뒤로 노릇노릇 구우며 옆에는 테스티아 몫으로 새콤한 과일이랑 포핀, 그 위에 레몬즙도 솔솔 뿌려 주었어요. 테스티아는요. 기쁠 때 가장 굵은 촉수 두 개를 맹렬하게 꿈틀꿈틀 움직이더라고요. 이거 무슨 파라고 하더라. S파? L파? 아무튼 기쁨의 세레모니를 하는 테스티아와 함께 저는 야심한 밤의 식사를 냠냠 했어요.
이건 화석을 복원해줄 때 그곳의 연구원 분께 들은 건데요. 테스티아를 감싼 화석의 지층을 조사해보니까 관동과 성도 쪽의 성분이 나왔다고 하더라고요. 나중에 테스티아와 함께 그곳을 방문해볼까 해요. 고향 바다를 보여주려고요.
아직 테스티아에겐 비밀이지만, 그 때를 기대해줘.
그 두 번째, 가방의 책의 이유
한 손에는 주먹밥, 한 손에는 두꺼운 철학책을 꺼내 팔랑팔랑 넘겼어요. 두께가 족히 손가락 하나 정도 길이는 되는 이 책은 제가 9살 때부터 읽은 건데요. 사실 읽다 말다 읽다 말다 해서 늘 앞부분만 너덜너덜하고 이해가 안 되는 부분엔 메모도 잔뜩 해놔서 지저분한데요. 그래도 오랜만에 꺼낸 것 같아요. 습관처럼 가방에 넣어 가져왔지만 캠프에 와서 한 번도 안 꺼내봤거든요.
「엄마가 연구하던 거랑 관련이 있어서요.」
아주 당연하고 새삼스러운 이야기예요. 제 고작해야 열 네 해 된 시간에 그 사람이 남긴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말이죠. 관심을 갖고 있는 것, 제가 공부한 것, 알고 있는 것, 자연스럽게 떠올리는 것, 사소하고 자잘한 수많은 것들에 엄마의 흔적이 남아 있어요. 일부러 엄마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닌데 말이죠. 문득 깨닫고 보면 이것도 저것도 다 엄마와 관련된 거지 뭐예요.
그렇게 떠올리고 나면 자연스럽게…… 그리워지고 말더라고요.
아주아주 우스운 이야기예요.
“아. 테스티아. 이건 먹는 거 아닌데~…….”
책장을 넘기던 손이 멈추자 어느새 자기 그릇을 비운 테스티아가 꼼지락거리고 책 위에 올라와버렸어요. 아이가 올라앉은 페이지가 구겨지면서 끝이 조금 찢어지는 소리가 났는데 정말 먹어버리나 놀라서 보니까 테스티아는 그냥 종이 위에 꾹꾹 눌러 적힌 자국을 점자를 읽듯이 더듬고 있는 거였어요. 테스티아의 버릇 중 하나예요. 촉수의 바닥, 세밀하게 들어찬 빨판을 이용해서 상대를 더듬고 읽는 것.
말캉말캉하고 촉촉한 게 감싸 와서 흡착해오는 건 테논의 전지충이 시절 전기 자극만큼이나 중독성 있어서 테스티아도 암스타로 진화시키기가 조금 아쉬워지는 이유 중 하나였어요.
책을 찢게 둘 수는 없어서 테스티아를 무릎에 올리고 저는 대신 책을 소리 내 읽어주기로 했어요.
“……해서 ‘나’를 인지하고 증명하는 것으로 내적인 방법과 외적인 방법이 있는데, 내적으로는 오로지 나 자신만이 나를 규정할 수 있다. 나를 증명하는 건 나 스스로의 인정으로 충분하다. 라고 하는 것이고 외적으로는 사회 속에서 타자에 의해 나라는 존재가 보여지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가령 여기 의자가 하나 있다고 하자. 의자가 이 공간에 존재하는 건 누구나 보면 안다. 하지만 만일 내가 이 의자를 ‘없다’고 인지하고 없는 것으로 규정한다면? 나의 세계에서 이 의자는 ‘없는 것’이 된다.”
이렇듯 세계를 나의 인지로 구성할 수 있는가 하면 반대로 타인의 인정에 의해 이루어질 수도 있는데 이를 위해 우리는 타자와의 소통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재잘재잘 읽고 있으면 테스티아는 정말 알아듣고 있는 건지 어떤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어요.
“재밌어? 재미없어? 사실 나도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는데 말야.”
밑줄을 긋고 형광펜을 칠하고 단어의 뜻을 적어두고 그 메모를 더듬다 보면 한구석에 보이는 건 ‘엄마에게 물어보기’, 결국 물어보지 못하고 끝난 안타까운 문장이 보였어요. 엄마는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요. 나는 왜 아직도 이런 게 궁금할까요.
“내 세계에서 엄마를 ‘없는 것’으로 규정하면, 엄마가 사라질까. 나는 더 이상 그립지도 바라지도 않게 될까. 어떨까, 테스티아.”
오늘은 어쩐지 편히 잠들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에요. 울적하고 또 꿀꿀해요. 내일은 일어나서 테리에게 쾌청을 써달라고 할까요. 그리고 다 같이 노곤노곤하게 햇볕에 몸을 말리면 나아질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테스티아는 너무 마르지 않도록 대야에 넣어줄 거예요.
책을 가방에 넣고 먹은 그릇들을 정리하고 테스티아와 함께 치카치카 이빨을 닦고 방으로 돌아왔어요. 한쪽 침대에서는 리브가 자고 있어서 깨우지 않도록 살금살금 움직여 이불을 꼭 덮었어요.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달빛이 예쁘게 내리 비치고 있어서 어쩌면 자고 일어나면 하늘이 우리에게 쾌청을 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내일을 기대하며 저는 눈을 꼭 감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