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야식은 감자샐러드와 빵이에요. 고슬고슬하게 삶은 달걀과 감자를 마요네즈에 버무린 샐러드를 모닝빵 사이에 욕심껏 꽉꽉 채우고 슬라이드 치즈도 한 장 넣고 취향이라면 잼을 발라도 좋겠죠. 제가 만들었냐고요? 설마요. 베릴다 씨에게 받아 왔어요. 아, 베릴다 씨는 동산마을에 사는 아주머니인데요. 지난번엔 묘원지기 할아버지를 도와줘서 고마웠다거나 꽃들을 정리해주어 기뻤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나누다 친해졌어요.
빵을 냠냠 먹으며 일기를 쓰려고 다이어리를 꺼내자 옆에 테스티아가 또 꼬물꼬물 오더라고요. 이 아이는 생각보다 더 야행성인 것 같아요. 제 포켓몬 친구들은 대부분 바른생활이라서 밤에는 자고 낮에는 깨는 편인데─제가 잠들 때까지 잠들지 않는 테리와 제 모자 위에서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테오는 예외예요─, 테스티아는 낮에는 껍데기 속에 들어가서 고로롱 자다가 밤이 되면 나오더라고요.
테스티아에게도 빵을 조금 나눠주자 킁, 킁 냄새를 맡던 아이가 맛있게 먹기 시작했어요. 그 옆에 서배 열매도 슥슥 잘라서 내주었어요. 테스티아는 꼼지락거리고 움직이는 빨판 아래로 난 조그만 입을 움직여서 오물오물, 뚝딱 열매를 다 먹어치웠어요. 의외로 잘 먹는 친구예요.
그러고 나자 기운이 생겼는지 두 촉수를 꼼지락거리며 활기찬 모습을 보이다가 제 가방을 뒤져서 어제의 그 책을 꺼내오더라고요. 이 무거운 책을 어떻게 이렇게 잘 꺼내오는 거람.
“또 읽어달라고?”
동그랗고 커다란 눈망울을 느릿느릿 꿈뻑이는 게 그 말이 맞나 봐요. 이 아이, 고대부터 살던 포켓몬이라 그런가. 이런 이야기에 관심이 있을 줄이야.
저는 하는 수 없이 테스티아를 무릎에 앉히고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쳤어요.
“기원의 이야기. 처음에 있었던 것은 혼돈의 물결뿐이었다. 모든 것이 서로 섞여 중심에서 알이 나타났다. 떨어진 알에서 첫 생명체가 태어났다. 첫 생명체는 두 개의 분신을 만들었다. ……”
제가 좋아하는 이야기 중 하나예요. 세계의 기원, 천지창조의 신화. 테스티아의 껍질에 뽀뽀를 해주며 저는 신화 아래로 여러 설들을 더 읽어주었어요.
“포켓몬이 정말 알에서 태어나는 게 맞는지, 포켓몬은 알을 낳는지 여전히 목격한 사람이 없다고 해. 그냥 포켓몬끼리 두고 있으면 어느 샌가 포켓몬이 알을 품고 있어서 말야. 하지만 신오의 사람들은 세계도, 생명도 모두 알에서 비롯되었다고 믿고 있어. 어쩌면 지금도 이 세계는 둥근 알과 같은 모양일지 모르지.”
그리고 알 바깥에는 여전히 혼돈이 있는 거야. 하지만 혼돈은 너무 위험하고 무서우니까 우리 세계가 깨어지거나 망가지지 않도록 반전세계의 포켓몬이 우릴 지켜주는 거지. 기라티라는 전설의 포켓몬이 있다고 해요. 난폭하고 위험해서 깨어진 세계 쪽으로 쫓겨났다는 말이 있는데 저는 그 말이 거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어쩌면 힘이 너무 강력한 나머지 배제된 거라고요.
이것도 엄마가 좋아하던 이야기 중 하나예요. 엄마는 세계의 모든 신화와 전설, 기원을 연구하고 입증해내고 싶다고 했는데 그 중 제일 이루고 싶은 건 깨어진 세계의 증명이라고 했거든요.
“그곳은 어떤 곳일까, 테스티아.”
어쩌면 네 과거의 인연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만난다면 돌아가고 싶어질까? 소리내지 않은 제 물음에 테스티아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무구한 눈만 깜빡였어요.
그 두 번째, 텟샤와의 오후
한참 잠을 설치다 결국 일어났어요. 어쩐지 요즘은 잠을 푹 자지 못하는 기분이에요. 일어나니 바깥은 여전히 흐리더라고요. 내일이면 동산마을을 떠나는 날인데 여행길이 질척한 빗길이 아니면 좋겠어요.
여전히 비몽사몽인 채로 대충 먹을 걸 주워 먹고 다시 기우뚱, 졸음을 쏟고 있자 옆에서 테이가 슬쩍 저를 잡고 받쳐주었어요.
“오늘도 날이 흐리다~”
햇볕을 못 봐서 그런가. 축축 쳐지네. 파김치처럼 늘어져 있으려니 저를 등에 업은 채 받쳐주던 테이가 그대로 밖으로 걸어나가더라고요. 어디로 가는 걸까요? 지일 질 질, 신발 끝이 바닥에 선을 그리는 채 끌려가고 있으려니 테리가 툭툭 치면서 이러면 신발이 상해서 안 된다고 해주었어요. 테리, 그거 말고 더 걱정해줄 게 있지는 않을까?
그 말에 테이가 저를 다시 잘 업어준 건 조금 부끄러운 일이지만요. 그치만 제 발로 걸을 기운은 없어서 얌전히 테이 등에 매달려 이동한 곳은 묘원을 넘어 나오는 조그마한 숲속 공터였어요.
“텟샤?”
숙소를 나올 때만 해도 비는 그쳤다지만 먹구름이 짙게 깔린 채였는데, 여기까지 오자 신기하게 먹구름 사이로 햇살이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더라고요. 그렇게 햇빛이 비치는 자리로 텟샤가 돌 위에 걸터앉아 광합성을 하고 있었어요.
한껏 빛을 머금은 텟샤의 피부는 뱀의 비늘이 반짝이는 것 같기도 했고 한편으론 잘 닦인 나뭇잎이 광을 내는 것 같기도 했어요. 싱그러움과 신비로움을 한 자리에 모아두고 있었죠. 저는 그만 텟샤에게 한 번 더 반해버릴 것 같았답니다. 동시에 이러다가 텟샤가 저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을 것만 같아서 경외심이 들기도 했어요.
그 때문인지 선뜻 다가가지 못하는 제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텟샤가 먼저 손짓을 해주었어요. 이리 오라고요. 텟샤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걸치자 볕이 데운 돌이 따끈따끈해서 그대로 녹아내릴 것만 같았어요. 저는 텟샤와 테이와 테리와 돌 위에 옹기종기 모여서 한참, 또 한참 우리 모두 풀이 된 것처럼 햇볕을 쬐었어요.
그 세 번째, 모두와 보내는 저녁 숲
───잠에서 깼을 땐 어느새 해가 저문 시간이었어요. 아직 해가 완전히 저물 때는 아니었지만 숲속이라 그랬을까요. 서산으로 사라진 햇빛이 나무들에 가려 닿지 않아 캄캄했어요.
제가 잠든 동안 저를 깨워야 할까 말아야 할까 셋이서 머리를 맞대며 고민했나 봐요. 그 사이에도 셋의 몸이 따뜻해서 기온이 내려간 줄도 몰랐지 뭐예요. 깨어난 저를 보고 테이가 안심하길래 미안해, 하고 사과하며 웃었어요.
그 사이 저희 주위에는 신기하게도 여러 포켓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어요. 딱정곤 무리, 판짱 무리, 호바귀 무리, 등등 작고 약하고 힘없는 친구들이. 어째서 여기 모인 걸까? 하늘의 뿔의 에너지 반응으로 인해 숲의 자기 자리가 좁아지면서 강한 포켓몬의 옆으로 오려고 했던 걸까. 저는 이 아이들을 다 책임질 수 없는데 말이죠. 우린 곧 숙소로 돌아가야 하고요.
가방에서 나무열매를 꺼내 모두에게 나눠주자 제법 배가 고팠는지 다들 허겁지겁 나눠 먹었어요. 그 아이들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고 있으려니 걱정이 들지 않을 수 없었어요. 유우는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걱정하는 만큼 손해라고 했지만, 또 우리 책임인 것도 아니라고요. 그 말에도 동의는 해요. 어느 쪽이냐고 하면 저는 오히려 제가 책임질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편일 거예요.
저는 고작해야 14살의 어린애고 모든 사람들을 대표할 만큼 대단한 사람이 아니에요. 누군가 타인의 잘못을 두고 인간을 대신해 미안하다고 생각할 만큼 착하지도 않고요. ……그래서 오히려 마음이 무거운지도 모르겠어요. 이런 저에게, 팔름 씨는 부탁한다고 했으니까요.
겨우 이런 저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에요. 만일 여기서 우리가 눈을 돌리고 모른 척 해버렸을 때는 정말 아무도 막을 사람이 없는 걸까 하고 말이죠. 그건 정말로 무서운 일이 아닐까요? 이런 생각을 하는 저는 역시 큰 그릇은 되지 못하나 봐요.
“미안해, 얘들아.”
가진 나무열매와 포핀을 모두 주고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모여서 몸을 붙이는 걸 어쩌지도 못하고 지켜봤어요. 하늘의 뿔 근처로 어떤 힘있는 포켓몬들이 모여들고 있는 걸까요. 이 아이들은 언제쯤 자기 터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저는 이런 아이들에게 무얼 해줄 수 있을까요. 고민하다가 테이의 목덜미를 문질러 쓸며 부탁했어요.
“테이. 오늘은 여기서 이 아이들과 같이 있어주지 않을래? 텟샤랑 테리랑 같이. 여기가 아니면 이제 이 아이들이 더 도망갈 곳도 없을 것 같아.”
우리는 내일 떠나니까 이것도 고작해야 임시방편밖에 되지 않겠죠. 그래도, ……그래도요. 제 말을 이해했는지 테이는 온순하게 눈을 꿈뻑이고 자기 뺨을 제게 부벼왔어요. 그 뺨에 작게 키스하며 저는 이따 밤에 또 보러 오기로 약속하고 숲을 뒤로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