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도 아니고 책임도 아니에요. 이건 저의 의무예요. 혹은 사명감이에요. 연구자로서의. ──라고 하면 너무 거창해 보일까요. 하지만 저는 여기에 어떤 의무감을 느꼈어요. 보고 기록하고 기억해야 한다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여러 이야기를 듣고 나누었어요. 누군가는 이 사태에 우리가 책임감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누군가는 이것은 인류의 잘못이며 우리도 잘못이 있다고 했죠. 누군가는 적어도 이 사태에 관여한 사람으로서 우리가 나서야 한다고 했고 누군가는 왜 우리에게 책임을 전가하느냐고도 했어요.
그 사이에서 저는, 우리가 무언가 해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게 부담스럽기도 하고 어째서 우리가 해야 하는지 부당하다고 느끼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했어요. 그러니까 ‘무언가 해내야 하는 것’에 관해서요.
하지만 이 문제는 조금 달랐어요. 하늘의 뿔에 감돌던 기이하고 흉흉한 빛, 땅이 요동치고 파도가 거칠어지며 숲이 울던 그 모든 상황을요. 저는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알고 이해해야 했어요. 어째서인지 그런 강한 의무를 느꼈어요.
“지금쯤 하늘의 뿔에는 대체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걸까.”
불안하고 걱정되고 그래서 심장이 술렁거리고 한편으로는 아주 알고 싶기도 했어요. 그래요. 조금 흥미로웠을지도 몰라요. 이미 벌어지고 만 무서운 일에 말이죠. 원래라면 벌어져서는 안 되는, 동시에 누구도 알지 못할 일이잖아요.
꽉 닫혀버린 방화벽과는 반대편, 안쪽으로 더 진입할 수 있는 통로를 한참 응시했어요. 저 너머에서는 지금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요. 어떤 그릇된 풍경이 놓여 있을까요. 그 컴컴한 너머를 응시하는 제 기분은 꼭 상자를 손에 든 판도라 같았던가요.
두 번째, 그 바깥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자고 일어나도 여전히 포켓리스트는 먹통이었어요.
〔아빠~ 저 그만 잘게요.〕
〔여기 통신이 안 좋아서, 연락 잘 안 될지도 몰라요. 미안해요.〕
〔금방 다시 연락할 테니까.〕
몇 번을 전송 버튼을 눌러도 돌아오는 것은 [전송에 실패하였습니다.] 문구 뿐. 큰일이네요. 아빠한테 연락을 빼먹은 건, ……겨루마을에서 너무 놀라서 그대로 잠들었던 하루만이었는데. 많이 걱정하고 있겠어요.
거짓말이라도 안심시켜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이에요. 제가 한숨을 폭 내쉬자 어깨에 앉아 있던 테레지아도 따라서 한숨을 폭 내쉬었어요. 테리는 그나마 이 상황에서도 익숙하게 괜찮으려고 견디려고 했지만 테레지아는 그게 잘 안 되는 모양이에요. 두꺼운 철벽, 두꺼운 콘크리트의 바닥, 부족한 산소, 지하에서부터 밀려오는 오싹한 힘. 여러 가지 것들이 테레지아가 이제까지 살아왔던 환경과 맞지 않는지 내내 기운이 없어 보여서 걱정이었어요.
“이러다 네 꽃이 시들면 어쩌지. 빨리 나가야 할 텐데.”
테레지아는 제 뺨에 자기 뺨을 폭 붙이고 동의를 했어요. 꽃이 시들어서는 저는 살 수 없을 거라고요.
“미안해. 금방 나가게 해줄게.”
저는 테레지아와 나란히 빛 한 점 없는 이 공간에서 태양을 그리워 했어요.
「달리아 씨. 지금 어디 있어요? 디모넵이, ……그 아이가 샛별시티에 있는 모양이야. 당신이 가주면 안 될까요?」
「제발 그 아이가 무사한지 확인해줘요.」
그 시각, 달리아 라지엘은 누림마을이었다. 최근 전자파를 이용해 뿔 내부를 조사하는 연구가 진행 중이라고 아이가 말했었지. 어느 쪽이냐 하면 달리아는 뿔 자체에 흥미를 두고 있지 않았다. 그의 주 분야는 「전설과 신화, 그 기원」 전설의 포켓몬이 어떤 타입인지 정말 뿔 안에 생명체가 있는지 따위보다는 인간들이 그 기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최초의 이야기는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관해서였다.
그러나 생각보다 조사는 진전이 없었다. 라이지방 사람들은 어릴 적 베갯맡에서 듣던 옛날이야기의 출처 같은 것에 관심이 없었고 보다 자세한 자료를 찾고 싶어도 턱없이 부족했다. 그보다 하늘의 뿔의 이상과 노바라는 단체의 활동을 보며 이곳의 연구는 뒤로 하는 게 나을까 고려하던 차였다.
그가 알고 싶은 건 아르세우스로부터 시작되는 기원에 관한 연구였다. 조금 더 벗겨진 진실을 말하자면 아르세우스가 이 세계를 창조했다는 이야기를 믿지 않기도 했다. 모든 신화와 전설, 기원은 인간의 마음에서부터 비롯된다. 철저한 인본주의 사고의 소유자였다.
이곳에서 더 얻을 것은 없어 보인다─고 판단하려던 그 즈음, 다급한 연락이 왔다.
평소 알림을 꺼두고 살아 전화가 온 줄도 몰랐다. 몇 통이나 쌓인 부재중, 그 위로 두서없는 메시지. 내용을 읽자마자 숙소의 TV를 켜자 마침 그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아니, 타이밍이 좋은 것이 아니다. 어젯밤부터 내내 보도되고 있는 내용이었다.
모든 전력이 꺼진 샛별시티, 그 대신이라는 듯 흉흉히 번쩍이는 하늘의 뿔. 요동치는 힘과 발전소의 상태. 하지만 경찰인력과 체육관 관장이 투입되었으니 안심해달라는 위로로 마무리되는 뉴스, 그 어디에도 트레이너 캠프의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지만.
“……디모넵 씨.”
「……절 사랑하지, 않나요?」
아이의 모습이 스쳐 지났다. 느릿하게 깜빡였다 들어 올리는 두 눈에 몇 년 만인지 모를 재회가 떠올랐다.
「사랑해줄 수는, 없, 어요? ……엄마.」
몇 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호칭. 기어코 나온 그 물음 앞에서 눈을 감는 길 외엔 수단이 없었다. 아이가 지을 표정이 예상되었지. 전부가 제 책임이고 제가 짊어져야 할 무게였으나.
메신저를 켜고 빠르게 번호를 누른다. 연결음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공중 날기 택시. 샛별시티까지. 서둘러 부탁드립니다.”
난데없이 흉작스위치 들어간 자캐에게 당황했던 시리 구간이에요.
TMI인데 대충 샛별시티에서 일이 터질 거라 예상한 건 거기 발전소가 있어서도 했지만 원작 게임에서도 늘 7번째 체육관 도시에서 사고가 터져서(ㅎ)
달리아 씨에 대해 말하자면 모성애는 없더라도 인간적인 친애는 있었다- 입니다.
인간미가 평균에 비해 부족한 사람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일말의 정도 없는 건 아니니까, 눈앞에서 모르는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 할 때 구하러 가는 것 같은 사람에게 내제된 당연한 선 정도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