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던 날의 밤은 빗소리가 소란스러웠다. 지붕을 두드리며 투둑, 툭, 투둑. 리듬감 있게 울려 퍼지는 빗소리에 자연스럽게 콧노래가 나왔다. 내일은 갠다고 했지. 비가 갠 다음 날의 아침 공기를 유독 사랑하는 디모넵은 내일 더 일찍 일어날 것을 다짐했다. 흠뻑 젖은 땅이 햇빛을 받으며 말라가는 시간을 놓칠 수야 없었다. 암, 놓쳐선 안 되지.
질척질척한 진흙탕 위로 아끼는 장화를 신고 나가서, 잎이 마르도록 함께 볕을 쬐는 건 아이의 소중한 취미 중 하나였다. 목새마을의 땅은 어떤 냄새를 풍기며 마를까. 보글보글 진흙탕이 끓어오르는 풍경을 그리며 평소보다 일찍 이불을 덮은 아이는, 그러고선 기묘한 꿈을 꾸었다.
“좋아해요, 올리브 씨.”
“난 너 안 좋아해.”
뜬금없는 대담을 두고 아주 놀랍고 또 아주 신기한 이야기를 하나 하겠다. 그의 목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디모넵은 찬물을 끼얹은 듯 확 정신이 깼고 동시에 이게 꿈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꿈일 거라 믿고 싶었던 마음의 표출도 섞여 있었지만 이 생각은 살짝 덮어두기로 한다.
왜 꿈이라고 확인했느냐 하면 설령 디모넵이 상대를 ‘올리브 씨’라 부르던 시절이라 하더라도 그가 저렇게 딱 잘라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할 리 없기 때문이다.
그야, 그치만, 리브는 모두를 좋아하는걸. 그 중 하나가 나고.
──정말?
여기서 ‘정말?’ 하고 묻는 악마는 대체 누구인가. 사실 나는 마음속에 심술꾸러기 악마를 키우고 있었나. 자신에게 되물어본다. 기실, 이는 악마보다 부채감에 가까운 것이다. 이유는 더 말하기도 입이 아프므로 앞서와 마찬가지로 살짝 덮고 지나간다.
요점만 말하자면 디모넵은 「난 너 안 좋아해.」 이 6음절의 말로 지금 이 순간이 꿈인 것을 깨달았지만 깨달았음에도 마음이 꽈배기처럼 비틀려 꼬여 괴롭고 말았단 것이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후회하고 주춤거리고 물러서거나 도망치지 않는 게 그의 강점이자 때론 아차 싶은 단점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 포인트였다.
“그럴 수 있어요. 응. 그럴 수 있어.”
혼자 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를 앞에 두고 상대의 표정이 기묘해지는 것도 아랑 곳 않고, 디모넵은 불끈 주먹을 쥐었다. 멋지게 자신감 있는 표정도 잊지 않았다.
“그럼 내가 더 힘내볼게.”
힘만 내지 않고 방법도 찾아볼게.
지금의 그가 이 말을 들었더라면 “뭘 맨날 힘낸대. 그만 내!” 하고 외쳤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지금의 이야기. 꿈속 상대의 벙찐 표정을 앞에 두고 디모넵은 제 할 말만 뱉은 뒤 힘차게 자리에서 도망쳐버렸다.
도망쳤다는 것까진 굳이 숨기지 않기로 한다.
깨어난 건 예정보다도 훨씬 이른 새벽이었다. 봄의 끝물, 일출이 빨라져가는 와중에도 이제 막 동산으로 해가 빼꼼 고개를 드러낸 정도의 시간. 눈을 뜬 디모넵은 반사적으로 옆자리를 찾았다. 이곳은 하우스메이트의 방이었다.
올리브는 곤히 자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뻗쳐서, 편하다는 이유로 아무거나 골라잡은 티셔츠 끝이 말려 올라가 엉성하게 이불을 덮은 채였다. 안대는 없었다.
어느새 익숙해진 풍경을 보는 순간 반사적으로 안심했다. 악몽의 다음이어서일까.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한 그 모습이 새삼스럽게도 보였다.
안대 대신 사납게 남은 흉 자국이 있었다. 올리브의 맨얼굴은 디모넵을 종종 복잡한 기분에 잠기게 했다. 그래도 요즘은 복잡함보다 솔직하게 기쁜 게 더 컸다. 제 억지라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힘내고 있었다.
그가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흉 자국 근처를 기웃거리다 닿지 않도록 허공에 뽀뽀를 했다. 깨우면 안 되니까.
“헤헤.”
처음 옆에서 잠든 게 언제였더라. 안대를 두고 싸우기 전이었나 후였나. 아무튼 그 사이다. 맹렬하게 쫓아다니던 것도 딱 그 시기였다.
텐트에 들어가는 것도 쉽게 허락해주지 않았는데 기어코 옆을 비집고 들어가기도 했고, 같이 자자고도 했다. ‘내가? 너랑? 여기서? 왜?’ 라는 표정을 보고 이러다 쫓겨나는 건 아닌가 하다가 실제로 쫓겨도 났다. 그래놓고 결국 옆에서 잤다. 멋대로 잠들어버린 저를 어쩌지도 못했던 거겠지. 끝내 자는 얼굴은 보여주지 않았다. 상냥하고 무르고 한편으론 확고하고 혹은 섬세하던 사람.
딱 한 걸음, 처음 선 안으로 들이기 어려워하던 사람.
이유에는 안대도 있을 테고 천성적인 낯가림도 한 몫 하지 않았나 싶다. 곱씹을수록 디모넵과는 여러모로 달랐다. 달라서, 몰라서, 충돌이 잦았다. 그런데도 왜 열심히 쫓아다니고 좋아했느냐 물어보면 글쎄, 이유가 있을까. 그냥 그가 좋은 사람이라. 매력적인 사람이기에 이끌렸던 거겠지.
싱숭생숭한 꿈 탓인지 생각이 여러 가지로 퐁퐁 솟았다. 몽글몽글하게 덩어리 져 둥실둥실 머릿속을 떠다니는 여러 생각들을 정리하지 못하고 디모넵은 결국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났다. 잘한 것, 못한 것, 지나간 것, 아쉬운 것, 하지만 추억의 가방을 뒤적이면 그보다 가득한 좋은 것, 알록달록 영롱하게 빛나는 것들이 더 많다.
만약에 정말로, 꿈속에서처럼 과거의 제게 올리브가 그런 말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그럼, 제가 방법을 찾아볼게요!」
상처받고 실망하고 물러나고, ──는 못했겠지. 그야, 그만큼 좋아하는걸. 더 친해지고 싶었어.
이상한 꿈을 꾼 덕분일까. 오랜만에 벌써 한참 옛날 같아진 시간들을 떠올렸다. 올리브 씨가 리브가 되고, 존대가 반말이 되고 안대 벗은 얼굴이 당연해지고 또 익숙해지고, 그래도 여전히 기쁜── 거쳐 온 모든 시간들에 다행이라는 감상을 담았다.
여러 쓰고 달고 시큼한 시간들을 거쳐 지금의 자리가 생겨났다. 내년에는 이 자리에 꽃도 필 테지. 이사한 땅은 몹시도 좋았다.
혼자 침울해졌다 혼자 들뜨기 시작한 디모넵은 기운차게 데구르르, 한 바퀴 구르고 그대로 엎드려 발장구를 쳤다. 리브가 일어나면 오늘은 같이 광합성을 하자고 제안해볼까? 그리고 또 같이, 파자마를 맞추자고 가자. 엄청나게 귀여운 걸 봐두었는데 그 사이 팔리진 않았겠지. 이게 뭐냐고 퉁명스런 표정 할지도 모르지만~…… 분명 같이 입어줄 테니까. 어서 해가 뜨길, 또 눈을 뜨길, 설렘을 안고 아이가 젖은 잎사귀를 펼치듯 구부렸던 팔을 쭉 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