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은, 오드리 씨는, 언니는 한 마디로 말해서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꼭 말장난 같죠. 그치만요. 사람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건 대단히 어려운 일임에 틀림없으면서 그 중에서도 오드리 언니는 유독 표현하기가 어려운 사람이었어요.
그럼에도 굳이 한 줄로 언니를 나타내보라고 한다면 ‘여러 얼굴을 가진 사람’
지금도 저는 언니의 본 적 없는 낯선 얼굴을 보고 있답니다.
“Let’s go in the garden♪ You’ll find something waiting.”
정확히는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이에요. 머리 위로 자장가가 들려왔거든요.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의 경위는 중요한 게 아니니 넘어가기로 할게요. 여기서 잘 봐두어야 할 건 제가 언니의 무릎을 베고 누운 것이나 덜 자란 머리카락을 흩어 쓰다듬는 언니의 손길이 기분 좋았던 것이나 등가로 테리의 무게가 느껴지는 것 따위가 아니라 언니가 흥얼거리는 자장가예요.
처음이었다고 하면 어떨까요. 누군가가 제게 자장가를 불러주는 일이요.
그런데 처음이었어요. 누군가 저를 위한 자장가를 불러준 일이.
꿈뻑꿈뻑, 졸음이 몰려와 비몽사몽인 가운데 이대로 잠들고 싶지 않아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어요. 시선이 맞닿자 오드리 언니는 겸연쩍은 듯, 한편으론 무척이나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자라고 불러준 건데 깨워버렸어? 그렇게 못 불렀나.” 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고개를 젓는 대신 다시 눈을 감았어요.
“언니는 어디서 들어봤어요?”
쓰다듬어주던 손길이 일순 멈추었다가 곧 느긋하게 이어졌어요. “예전에.” 답은 그걸로 끝. 저도 언니의 머리를 토닥여주고 싶었지만 참았어요. 아마도 여기선 얌전히 있는 쪽이 훨씬 언니를 위한 걸 거예요.
부러움이란 건 제게 없는 걸 타인에게서 발견할 때 생긴다고 해요. 하지만 굳이 옆집 아이가 자는 시간을 노려 찾아갈 일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저는 모르는 어머니의 자장가라는 것을 부럽게 여겨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막상 듣게 되니까, 저를 위해 불러주는 자장가라는 게 굉장히 묘한 기분이지 뭐예요.
오후의 햇살보다도 따사로이 스며드는 노랫소리에 손끝까지 온 신경이 느슨해져 갔어요. 테리의 꽃잎이 살랑살랑 머리에 내려앉고 구름에 올라탄 듯 둥실거리고 또 아득한 기분이 저를 휘감았어요. 그게 뭉클하고 또 벅차오르고, 정말 기묘한 일이었어요. 이게 뭐라고.
──자신을 위해 들어본 적 없는 걸 누군가를 위해 부르는 건 어떤 느낌일까요.
동시에 참 오드리 언니다운 일이에요. 언니는,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무언가 하지 않는 사람이거든요. 언제나 무엇이든 타인을 위해서, 남을 채우며 스스로를 채우던 사람.
그런 사람이 텅 빈 누림마을 연구실에 혼자 남아버렸어요. 그곳에는 더는, 채울 누군가가 없는데. 채워줄 누군가도.
그야 먼 시간이 지나고 나면 돌아올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때까지 혼자 기다려야 할 텐데.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리에서 쓸쓸함만을 벗 삼아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일이 언니를 고독하게 만들지는 않을까요?
이 기다림이 언니를 위한 것일까요? 스스로를 위한 것이라고 믿어도 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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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츰차츰 노랫소리를 타고 의식이 수면 아래로 잠겨들었어요. 무의식의 영역에서 나야 박사님과의 첫 만남을 다시 떠올린 것 같아요.
인터뷰를 마친 뒤 제게 따뜻한 시선을 보내며 네 여정을 응원하겠다고 웃어주시던 그 얼굴을요. 그 때는 조금도 몰랐어요. 곱씹어보면 기묘함은 이미 누림마을을 출발할 적부터 있었는데 말이죠.
하늘의 뿔을 조사해달라는 의뢰 말이에요. 그게 나야 박사님의 SOS이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나중에서야 들더라고요. 박사님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거예요. 보통 비전공자들에게 그런 걸 맡기지 않는데 그것도 트레이너 캠프에 온 사람들에게 상당히 무관한 주제를.
어쩌면 나야 박사님이 정말로 부탁하고 싶었던 건 하늘의 뿔에 관한 학문적 발견이 아닌, ……자신과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을까요.
외로움이라는 거예요. 고독. 정을 향한 굶주림. 그 분은 강한 척하던 게 아니라 정말로 강한 사람이 맞았지만, 인간이 늘 강하지만은 못하잖아요.
겨루마을에 도착해서 하늘의 뿔에 관해 박사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을 적이 떠오르네요. 박사님은 그 때, 고작해야 14살 어린애에 불과한 제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어주고 의견을 나누어주었어요. 거기서 보였던 건 숨길 수 없는 열망이었어요. 저와 같은 눈높이에 서줄, 같은 것을 봐줄 사람을 간절히 찾는.
어렸던 저는 그저 박사님에게 인정받은 게 기뻐서 제가 뭐라도 된 것 같아서 뿌듯하고 말았는데 하물며 박사님은 어땠겠어요.
꿈과 성과에 목말라 있었고 정에 굶주리고 인정을 찾고 있던 사람. 무리에서 어울리지 못하고 홀로 힘겨웠던 시간. 제 과대 해석일지도 모르지만 그냥, 자꾸만 상상해버렸어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고 누구도 기다리지 않는 것을 연구하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런 싸움인지.
자기가 원해서, 자신의 꿈이어서 하는 연구라고 하지만 물과 양분이 없이는 꽃이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사람도 저를 채워줄 것이 없으면 견딜 수 없어요. 그런데 나야 박사님에겐 아주 오랜 기간 그게 부족했어요. 바라는 꿈의 실마리, 사람들의 인정.
그래서 결국, 그릇된 길에 빠지고 만 거죠.
그 사람을 옹호할 생각이 없어요. 합리화 시키려는 것도 아니고요. 저는, ……그 사람이 사회적으로 용서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오드리 언니와는 여기서도 생각이 맞지 않겠죠.
그를 원망하거나 그 사람에게 분노하고 있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저는 나야 박사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쪽인 걸요. 어쩌면 겨루마을에서 달리아 씨를 만나버리는 바람에 다른 생각들이 날아가지 않았더라면, 저도 오드리 언니처럼 박사님에게 마음 깊이 감화했을지도 모르고요.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 사람이 사회에 용서받아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언젠가 미래의 저를 위해서. 미래의 우리를 위해서.
우, 이 이야기는 그만 할까요? 제 무의식의 결론은요. 저 뿐만 아니라 미래의 많은 예비 나야 박사님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해서라도 그 사람이 ‘사회적’으로 용서받아서는 안 된다는 거였어요.
하지만 한 사람 정도는, 그 사람을 기다리고 그리워하고 또 용서해도 되지 않을까요. 누군가 한 사람만은 말이죠.
누림마을로 오드리 언니를 보러갈 때면 마을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어요. 프라네타 사태 이후 버려지고 방치된 그곳에 전기가 돌아간다더라. 가까이 가보면 사람의 기척이 난다더라. 누구는 슬쩍 문을 열어보았더니, 빼빼 마른 여자애 하나가 멀거니 서 있다더라. 왜? 뭐 하러?
언니는, 그런 소문들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굴었어요. 늘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던 언니로서 정말 이례적인 일이죠. 수많은 시선과 목소리를 무시해버릴 만큼 그곳이 언니에게 더 중요하고 가치 있다고 택한 거예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무언가 하지 않던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 자리에 남은 거예요.
역시, 저는 그런 언니를 응원해주고 싶어요. 그래서…… 아, 자장가가 어느덧 잦아드네요. 제 무의식도 이제 곧, 더 깊은 곳으로, ……첨벙, 하고.
……처음, 오드리 씨를 언니라고 부르던 날이 떠올랐어요. 언니는 그 사소한 호칭에서 무얼 얻고 기뻐해준 걸까. 그런 언니를 보며 저는…… ……언젠가 또 자장가가 듣고 싶어질 때 언니를 찾아가도 될까요? 텅 빈 연구실이 쓸쓸하지 않도록, 허전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