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 꽃을 꺾었나
43 당신은 저를 볼 수 있고, 저는 말할 수 있어요
: 타카하타 이노리
이삿짐 정리가 끝나면 휑한 내부가 조금은 채워질 줄 알았다. 하지만 다시 방문한 그의 집도 여전히 살풍경하기만 해서, 세이라는 잔소리를 하는 척 한참 신이 난 기색으로 이곳저곳 구석구석 그의 집을 둘러보았다. 여기엔 이걸 놓고, 저기엔 그걸 두고, 이런 것도 괜찮지 않으려나. 자기 집이라도 되는 양 어딘가의 예술가처럼 팔짱을 끼고 턱을 짚으며 심각하게 고민하는 자세가 제법 웃겼다. 답지 않게 움푹 팬 미간에 주름부터 말이다.
“이노리 군 생각하기에는 이 칸에 액자를 두고 아래 칸에 화분을 둘까요. 아니면 아래 칸에는 인형을 두고 위 칸에…….”
“으응, 잘 모르겠는데. 세이라 보기 좋은 걸로 하면 되지 않을까?”
집주인의 고민은 그녀와 조금 달랐다. 지난번에 깨달은 건데, 겨울의 맨바닥은 엉덩이가 꽤 시리다. 바닥에 뭔가 까는 게 낫겠어. 코타츠도 하나 들여놓을까.
얼마 전 그녀의 집 창고에서 꺼내온 코타츠는 그의 취향에 잘 맞았다. 코드를 꽂고 그 안에 들어가면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이 잘 흘렀다. 거기에 테이블 위에는 귤이랑 밤조림을 쌓아두고 말이지.
“하지만 코타츠를 놓으려면 소파는 치우는 편이 나을 텐데…….”
주택인 세이라의 집과 다르게 그의 집은 맨션이라 가구를 넣어놓을 창고가 마땅히 없었다. 어쩔 수 없지. 코타츠는 세이라 네서 즐겨야겠어. 그녀가 직접 만든 밤조림은 그의 집 냉장고에도 한 통 자리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역시 자기 집에서 꺼내먹는 것보다 세이라 집 코타츠에 앉아 차와 함께 먹는 게 더 맛있는 것 같았다.
그 동안에도 세이라는 그의 집을 속속들이 돌아보았다. 장식품들은 나중에 하더라도 말이죠, 바닥에 깔 러그도 필요하고요. 그릇 수도 적고, 생활용품들이 일단 하나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요. 이것저것 쏟아지는 말이 어찌나 많은지. 이사라는 건 이삿짐센터가 다 해주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인터넷선과 TV선을 연결한 것만으로 모든 일이 끝났다고 생각한 이노리는 잠깐 반성했다.
“그럼 장을 보러 다녀오죠!”
“네에.”
가까운 마트에 가서 세제, 수세미, 옷걸이와 빨래대, 휴지와 물티슈, 걸레에 쓰레기봉투, 생수병과 그 외에도 기타 자질구레한 것들의 장을 보았다. 배달이 가능한 게 정말 다행이었다. 바닥에 깔 러그는 세이라 눈에 찰 만한 게 없어서 나중에 인테리어점을 방문해 사기로 했다. 그의 눈엔 마트에서 파는 것이나 인테리어점이나 대단한 차이가 보이지 않았지만 세이라가 제게 맡겨두라고 큰소리를 쳤다.
“아, 호빵이다. 세이라 먹어?”
“그럼 야채 호빵으로~”
장을 보러 나와 놓고 빈손으로 돌아가던 중 마침 [호빵 개시 중!]이라는 카드가 팔락이는 편의점이 보였다. 호빵만 사러 들어간 두 사람은 오뎅도 조금 담아가기로 했다. 안 그래도 그의 집은 아직 냉장고까지 텅 빈 채였다.
“과자도 좀 사갈까.”
“군것질로 배 채우는 거 아니죠?”
이노리야 호빵에 오뎅에 과자를 먹고도 저녁이 되면 저녁밥까지 먹을 수 있었지만 세이라는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과자도 샀다. 빵빵해진 편의점 봉지를 들고 나오면서 세이라는 조금 한숨을 내쉬었다. 군것질 좀 한다고 참견해선 안 되겠지. 그나, 저나 번듯하게 제 앞가림을 하는 성인인걸.
“아무튼 시험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돌아가면 힘내기예요.”
“알았어~”
그 날 이노리는 그녀가 가르쳐준 곳까지 열심히 문제를 풀었고 세이라는 그 옆에서 러그를 골랐다. 하지만 역시 인터넷으로 보기만 해선 성에 차지 않아 내일은 직접 외출해보기로 하였다.
*
사람이 많은 곳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좋은 물건이 있는 곳일수록 사람이 몰리는 건 필연적이다. 그나마 키치죠지는 시부야나 이케부쿠로 등지보다 나았다. 거기는 정말 ‘젊음의 거리’라는 느낌이 물씬 했으니까.
이렇게 말하는 세이라도 충분히 젊지만, 마음가짐의 문제다.
이노가시라 공원을 지나 상점가로 들어서자 세련된 가게들이 줄을 이었다. 예전 같았으면 가게에 들어가는 것부터 머뭇거리고 점원의 권유가 견디기 어려웠겠지만 도쿄 생활도 벌써 3년차에 접어든다. 마음에 드는 가게를 발견한 세이라는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문을 밀 정도로 성장했다.
“러그를 조금 보고 싶은데요.”
점원의 안내를 따라 진열된 것들에 한 번씩 눈을 두었다. 그의 취향은 아무래도 심플한 것이겠지. 집안이 모노톤이었으니 거기에 맞추는 게 좋을 것이다. 무난하게는 잿빛 도는 민무늬의 러그도 있고 거기에 살짝 채도 다른 사각형을 얽은 스퀘어 형이라든지 헥사곤 무늬, 타일 무늬, 포인트 컬러가 들어간 것도 좋아 보였다.
“사이즈는 어떤 것을 찾으시나요?”
“으음, 그게.”
얼마난 사이즈가 좋더라. 그러니까 대충, 침대 밑에 깔 만한 것으로, 이왕이면 소파 앞에 둘 것과 세트여도 좋겠다. 손대중으로 크기를 설명하며 이렇게 두 개를 보려고 하는데요. 말하자 점원은 곧 카탈로그와 함께 커피를 내주었다. 이런 가게는 커피도 믹스를 주는 법이 없다. 설탕을 넣지 않은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홀짝이며 세이라는 신중하게 카탈로그를 넘겼다.
원한다면 주문 제작도 가능하다고 했지만 그렇게까지 할 건 아니었다. 애초에 집주인도 아닌 그녀가 멋대로 고르는 것인데, 적당히 나서야지. 세이라는 곰곰이 그의 집을 떠올렸다.
장식장을 벽으로 세워 생활공간을 나눈 심플하던 공간. 예쁜 것으로 용도를 다하는 알록달록하고 자질구레한 게 가득하던 그녀의 집과는 지극히 다르다. 청소하기엔 편할 것 같았다. 안 그래도 그녀의 집은 매일매일 청소를 해도 부족할 노릇이었다. 잡화가 많다는 건 그 잡화의 개수만큼 털고 닦아야 한단 의미다. 세이라는 그의 집에 잡화를 늘려줄 계획을 재고하였다. 꾸며준대놓고 청소하는 수고를 늘어버려선 안 되니까. 건너편이 숭숭 보이는 장식장이라든지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책상 옆이라든지 쓸쓸한 베란다라든지 텅 빈 신발장 위라든지 뭔가 걸기 딱 좋은 벽까지 너무 아쉽지만……, 참을까.
“이사하셨나 봐요, 손님.”
“저는 아니고, 친구에게 줄 선물이랍니다. 막 이사해서 아무것도 없는 집이거든요.”
오픈하자마자 실적을 올린 것이 기분 좋았던지 직원은 사근사근하게 세이라에게 러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추천해주었다. 비단 자신의 가게 상품만 아니라 이곳 상점가의 다른 가게에 무엇이 있고 어떤 게 좋은지 소개해주는 그의 말솜씨에 세이라는 저도 모르게 귀가 솔깃해졌다.
햇빛만 있으면 알아서 잘 자라는 선인장과 실용성도 있을 것 같은 앤티크 분무기, 복을 불러온다는 멋스런 태피스트리에 플라워리스 무드등.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그의 집에는 하나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그러나 세이라는 몹시 좋아하는 것들의 소개를 듣고 있자니 입이 멋대로 전부 주세요! 하고 외칠 것 같았다. 한 번 더 자기 욕망을 진정시킨 세이라는 직원이 소개해준 가게에 구경해보기로 하고 최종적으로 고른 러그의 배달을 부탁하였다.
[To : 오늘 내일 중에 러그가 간대요.]
놀라지 않도록 당사자에게도 메일을 보내놓고 마저 거리를 걸었다. 겨울 아침의 쌀쌀한 공기 틈으로 하얀 숨이 터졌다. 곧 눈이 올까? 도쿄에서 눈을 보기란 쉽지 않다. 기실, 눈이 내렸다가는 그 날 하루의 교통이 마비될 테니 오지 않는 쪽이 나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세이라는 눈이 없는 겨울이 못내 아쉬웠다. 고향은 사시사철 온화한 곳이었는데 매해 겨울, 눈을 선물해주던 학원에서 보낸 시간이 너무 길었던 것이지.
『 앨리스 』
누가 최초로 그 힘에 이름 붙였을까. 운명이 이름을 따라가듯 12년을 이상한 나라에서 보냈다. 마법 같은 일들이 끊임없이 벌어지는 놀랍고도 아름다운 세계였지. 하지만, 작았다. 간신히 토끼 굴을 빠져 나왔을 때는 시간이 너무 지나버린 나머지 현실세계에 도리어 적응하지 못했다. 바깥세상의 모두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알고 보니 이상한 건 저였다.
대학을 다니며 비앨리스와의 교류가 늘고 친구들에게, 교수님에게 다시 한 번 사회 지식을 배웠다. 그녀가 12년간 머물던 세계는 참 작고, 또 좁고, 지독히 폐쇄적인 공간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앨리스라는 힘이 특별하고 위험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 소수를 학원에 몰아넣고 키우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 새삼 그녀의 담임선생님이 떠오른다.
“와아.”
상념을 멈춘 건 어느 작은 가게 앞이었다. 썬캐처가 매달린 가게의 지붕 아래는 한낮의 햇살이 알록달록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림자 지는 곳마다 크리스털의 깎인면이나 햇살을 따라 파랗거나 노랗거나 다채로운 무늬가 새겨진다. 콘크리트 지면 위로 빛이 만드는 그림이란 제법 몽환적인 풍경이었다.
“이런 거 좋아하지 않으려나.”
다른 잡화라면 청소가 골치 아플지 모르지만 썬캐처라면 매달아두는 것으로 끝이고 괜찮지 않을까. 합리적인 이유까지 붙여가며 세이라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입구 쪽의 전면유리로부터 햇살이 파도처럼 넘실넘실 스몄다. 넓지 않은 안쪽에는 각양각색의 썬캐처가 매달려 있었는데, 그 전부로 볕이 쏟아져 눈이 휘둥그레 해질 만큼 시각을 자극했다. 꼭 신데렐라의 무도회에 온 것 같았다.
넋을 잃고 두리번거리는 그녀의 기억 속으로 얼마 전 다녀온 디즈니랜드의 퍼레이드가 떠올랐다.
태양이 사라진 자리를 사람들이 만들어낸 인공의 조명이 대신하는 풍경이었다. 세상에 빛이 난 자리와 빛이 없는 자리의 대비가 극명하여 퍼레이드에서 눈을 돌리면 사물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만큼 캄캄했고, 거기서 조금만 고개를 돌려도 퍼레이드의 빛 때문에 다른 풍경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신기했다. 이토록 아름다운 풍경이, 이토록 저만 보라는 듯 자기주장을 해오다니.
오직 그 빛만이 보였다. 그것은 특별한 빛이었을까?
「아까 네가 물어봤던 거 대답해줄게.」
「아까 물어봤던 거요?」
「앨리스는 이제 안 써. 안 쓴지 오래 됐어.」
홱 하고 돌린 옆얼굴이 제법 어른스러웠다. 아니, 스러운 게 아니라 어른이 된 것이겠지. 아이들은 자라 이상한 왕국에서 벗어났고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투쟁을 하고 있었다. 멋대로 짐작할 뿐이었으나 비슷한 길을 걸어온 처지이니 이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일류미네이션을 반사하는 눈동자가 또렷했다. 어느 먼 과거처럼 어떤 색이든 볼 수 있으나 이제 보지 않고, 대신에 어떤 색이든 담을 수 있도록 잘 여문 금빛이었다.
더는 특별한 빛을 찾지 않아도 좋았다.
《그 애, 앨리스를 많이 쓰면 눈이 안 보일 수도 있다던데……》
남의 걱정을 순순히 들을 줄 모르며 고집을 부리던 어린아이도,
《내 눈에 보이는 것과 다른 네 마음은 거짓일까?》
색으로 타인을 구분하던 아이도 이제 없이.
허황된 빛 대신, 모두가 그러하듯이 지극히 평범하고 당연한 빛을 쬘 수 있도록 스스로 걸어 나왔다.
그렇게 맞이한 이 넓은 세계에 부디 축복을.
그리고 염원을 담아.
고민하던 세이라는 이윽고 노란 빛이 유독 고운 썬캐처를 골랐다. 선물용으로 포장 가능한가요? 그녀의 물음에 따라 점원이 포장지를 가져오고 리본을 잘랐다. 이제 특별히 색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나 그녀나 여전히 노란색은 선호하는 색이었다. 색이 주는 심리학적 효과를 생각하면 굳이 나쁠 것도 없다. 모노톤으로만 된 방은 역시 조금, 쓸쓸할 것 같았다.
다른 가게에서 곱게 물든 녹색 실과 그 외에도 몇 개의 실타래까지 산 세이라는 쇼핑을 마치고 두 손 가득 쇼핑백을 든 채 전철에 올랐다. 차창 너머의 햇살이 눈부셨다.
《지금의 저는 어떤 색으로 보이나요?》
이제 안 쓴다는 말을 들어서 다행일까? 아직도 쓴다고 하면 호기심이 살짝 고개를 들었을지 모른다. 어린 시절의 치기와는 다르다. 그 땐 스스로의 감정을 아는 것이 두려워 그의 앨리스를 꺼렸지만 지금이라면, 스스로를 마주 보는 일이 그렇게까지 겁나지 않았다.
“그래도 이노리 군에게 노란색을 보여줄 자신은 없으니까, 역시 말하지 않길 잘했어요.”
행복이란 어렵다. 세이라는 스스로 늘 행복하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어느 때는 행복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행복하지 않기도 하다. 행복의 앞에 다른 감정이 우선하기도 한다. 그 감정은 밝은 색일 수도 있고 어두운 색일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어린 시절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지만── 달라졌다.
가끔 어두운 색의 감정이 비쳐도 그 감정이 저를 물밑 깊숙한 곳으로 당기는 누름돌 같이 느껴져도, 이런 자신조차 부정 않고 받아들이며 내일은 조금 더 가벼워지기를. 바랄 수 있게 되었다.
지금 행복하지 않아도 내일은 행복할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자세한 이야기까지 앨리스로 볼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소리내기로 해요. 말로 표현해요. 당신은 저를 볼 수 있고, 저는 말할 수 있으니까요.
참 대단치 않으면서 멋진 일이지 않나요. 어른이 된다는 것은요. 색을 찾지 않아도 보일 만큼 기분 좋은 표정이 되어 세이라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의 방에 썬캐처를 달아줄 시간이 벌써부터 기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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