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의 출발을 알리는 종소리가 공을 때린다. 하루에도 수많은 열차가 왕래하는 도쿄역에서는 한 시간에 열 번이 넘게 울려 퍼지는 소리다. 「열차가 곧 출발합니다.」 초읽기를 하는 안내방송을 따라 꽁지에 불이 붙은 듯 뛰어가는 사람들도 매시간 보이는 풍경이었다. 호루라기를 입에 문 역무원은 허둥지둥 계단을 뛰어 내려오는 남녀를 발견하고 출발 준비를 하는 차장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아무래도 저 두 사람이 이번 열차의 마지막 탑승객 같다.
“세이라, 얼른~”
“가, 가고, 있어요.”
계단을 내려오는 여자의 발걸음은 역무원이 보기에도 불안불안했다. 긴 스커트 아래 얼핏얼핏 비치는 발목 스니커즈는 자주 신지 않은 티가 보였고 계단을 밟는 걸음은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백팩을 맨 남자는 동행의 것으로 보이는 캐리어를 한 손에 들고 그녀를 앞서 재빠르게 내려오고 있었다. 이 사람 혼자라면 시간 내에 타는 게 문제없을 것이다.
예상대로 한참 먼저 계단을 다 내려온 남자는 에휴, 한숨을 쉬고 역무원의 눈치를 살폈다. 역무원은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시간 엄수도 중요하지만 안전도 중요하다. 저렇게 서두르다 계단에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생각하기 무섭게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서두르다 계단 하나를 잘못 디딘 여자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기우뚱 앞으로 기울어졌다. 반사적으로 튀어 나가려던 역무원의 발치에 캐리어가 걸렸다. 주춤거리는 사이 허공을 디딘 여자는 동행의 남자 품에 안착했다. 다행이다. 역무원은 내심 한숨을 삼켰다. “그러게 운동 좀 더 해야 한다니까.” 별 거 아니란 듯한 목소리가 가뿐히 그녀를 내려놓는다.
쓰러진 캐리어를 바로 세워 탁탁 털며 남자는 다시 힐끔, 역무원의 눈치를 살폈다. 침착함을 되찾은 역무원은 자세를 꼿꼿이 하고 어서 타시라고 말했다. 놀람이 남은 목소리는 경직되어 있었고 여자의 송구스러움을 부추겼다. 계단을 내려가는 건 굼뜨더니 사과는 1초에 3번쯤 하며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인 끝에 여자는 물결치던 머리카락을 가다듬으며 열차에 올라탔다.
더는 오는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역무원이 차장에게 수신호를 보낸다. 이윽고 열차의 문이 닫히고 우렁찬 벨과 함께 열차가 역을 떠났다. 남부로 내려가는 신칸센이었다.
“안전하고 즐거운 여행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 1회용 젓가락 하나가 덩그러니 남았다. 조금 전 넘어질 뻔한 여자의 비닐봉지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유리구두 대신 젓가락을 남긴 뒷모습을 떠올리며 역무원은 다시 한번 두 사람의 안전을 바랐다.
“예비용 젓가락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어요.”
“세이라 가방엔 없는 게 없네.”
“뭐든 대비해두는 게 좋은 거지요~”
그러게 떨어트리지 않았으면 되잖아. 하고 말하려던 이노리는 말을 삼켰다. 생각해보면 저도 젓가락을 잃어버린 전적이 많았다. 그렇다고 예비 젓가락을 가방에 넣고 다니진 않지만.
도시락 뚜껑을 연 세이라는 조금 울상이 되었다. 큰맘 먹고 산 고급 초밥 도시락이 계단에서 휘청거린 탓에 안쪽에서 엉망으로 흐트러진 탓이다. 맛엔 문제없겠지만 눈으로 한 번 보고 맛도 봐야 하는 건데. 하지만 원망하려면 길을 헤맨 저를 원망하는 수밖에 없었다. 세이라는 얌전히 젓가락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흐트러진 김초밥을 입에 넣으며 떠나기 전의 일을 떠올렸다. 분명 출발은 순조로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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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추웠던 올겨울, 도쿄에 기어코 눈이 내렸다. 처음에야 좋아하던 사람들은 생각보다 눈이 쌓이자 이상기후다 지구온난화다 호들갑을 떨었다. 집 앞의 눈을 쓸고 잎이 얼지 않도록 식물들을 살피며 세이라도 호들갑에 동참했다. 너무 추워서 안 되겠어요. 고향에 다녀올까 봐요.
그녀의 고향은 겨울에도 영상 10도를 웃돌 만큼 따뜻한 남서쪽 해안가다. 7년을 눈 구경은 꿈도 못 꾸는 온화한 바닷가 마을에서 살았다. 언젠가 학원을 졸업하면 당연히 돌아가리라 생각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사이 고향집은 아무도 살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졸업 후 자유롭게 되고 나서도 세이라는 섣불리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곳에 눌린 슬픔의 무게가 깊었다.
상냥한 마을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는 그녀를 위해 집을 남겨주었다. 워낙 외진 곳이다 보니 빈집을 구매하려는 사람이 없기도 했다. 그렇게 고향집에 거주하는 대신 1년에 두어 번 방문해 집을 청소하고 돌아오는 게 요 몇 년 사이 숙제였다. 마침 그 시기가 돌아왔을 뿐이다. 새해 참배도 고향에서 치를까. 일정과 경로를 생각하던 세이라의 옆에서 이노리가 물었다. 고향이 어딘데?
그렇게 귀향에 동행자가 생겼다.
“몇 번이나 다녀왔다면서 왜 길도 몰라.”
“안 다니던 길을 골라서 그런 것뿐이라니까요. 그리고, 1년에 몇 번 안 가는데 잊을 수도 있지.”
“자신만만하더니~”
“우웃.”
분하게도 반박할 말이 없다. 열차 이용은 제가 선배라고 자신만만하게 앞장서놓고 역사를 장장 1시간 20분 헤맨 끝에 세이라는 이노리에게 안내역을 넘겨주었다. 정작 도쿄역은 학원을 졸업하고 서너 번 와본 게 전부인 이노리는 티켓에 적힌 정보와 역내 지도를 몇 번 살펴보더니 능숙하게 길을 찾아냈다. 역내 도시락도 그 덕분에 살 수 있었다. “여기서 파는 게 제일 맛있대.” 어느새 추천까지 듣고 온 그는 이걸 살까, 저걸 살까 고민하는가 싶더니 덥석 2개를 담았다. 2개나 사요? 하고 놀라서 그를 보자 그게 뭐 어떻냐는 듯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 문어가 든 거 재밌게 생겼는데 양은 안 많아 보이니까. 열차 타고 오래 가야 하는데 중간에 배고파지면 안 되잖아.”
그런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세이라는 그가 음식을 남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수긍하고 끄덕였다. 그녀 것은 엄청난 용기를 내 이노리가 추천한 호화도시락으로 했다. 사실은 그녀도 처음부터 눈이 가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비싸고 양 많은 걸 사도 될까 고민하느라 한참을 머뭇거리고 서성이기만 했는데, 그런 세이라의 등을 이노리가 밀어주었다. 틀에 넣어 만드는 3단 초밥에 참치살을 길게 잘라넣어 만 김초밥, 거기에 갖가지 호화로운 조림반찬까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처음으로 고향까지 가는 여정이 설레 왔다. 어느새 마음의 돌 같던 숙제 생각은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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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가 열차를 타기 전의 이야기다. 설렘으로 시작했으나 지각과 달리기, 낙하까지 이어져 빈말로도 순조로운 출발은 되지 못했다. 마지막엔 젓가락까지 잃어버리고. 다행히 젓가락은 예비가 있었지만, 시무룩한 얼굴로 초밥을 입에 넣은 세이라는 잠깐 새 찌푸렸던 눈썹을 활짝 폈다.
“맛있어라!”
“맛없어.”
동시에 이노리의 퉁명한 목소리가 나왔다. 입안에서 살살 녹는 참치와 짭짤한 김의 조화를 느끼다 말고 세이라의 고개가 갸웃한다. 그는 문어 도시락을 입에 넣고 있었다.
“별로인가요?”
“간장맛만 나고 푸석푸석해.”
어쩐지 얘는 평이 안 좋더라고. 덧붙이는 말에 고개가 다시 갸우뚱 기울었다. 평이 안 좋은데도 산 거예요? 먹어보면 다를지도 모르잖아. 이노리 군 과감하네요. 그런가? 도란도란한 말소리가 차내를 잔잔히 채웠다. 애매한 시간인 덕인지 다른 승객들은 많지 않아 세이라는 목소리를 낮추면서도 방실방실 웃으며 잡담을 주고받았다. 별로라고 해놓고 이노리는 자기 도시락을 마저 다 먹었다. 맛없는 걸 억지로 먹는 건 아닐까. 걱정이 들어 세이라는 그의 항아리 뚜껑에 제 반찬을 나눠주었다. 이건 맛있었어요. 먹어 봐요. 당연한 수순처럼 그도 그녀에게 반찬을 나눠주었다. 맛없긴 한데, 먹어봐. 그다운 말이라 웃고 말았다.
문어 도시락을 금세 비운 이노리는 곧장 추가로 산 것도 열어버렸다. 소고기를 얇게 썰어 넣은 도시락은 맛을 배신하지 않았다. 하나 더 사길 잘했지. 자신의 준비성에 대한 자화자찬을 들으며 결국 둘이서 도시락 3개를 깨끗이 나눠먹었다. 식후에는 세이라가 보온병에 챙겨온 차를 마셨다. 커다란 가방에서 나온 묵직한 보온병에 다시 무언가 말하려던 이노리는 한 번 참고 넘어가주는 양, 김이 모락모락한 녹차를 삼켰다.
창밖은 컵에서 나오는 연기처럼 희뿌연 구름이 가득했다. 지상까지 내려온 구름무리를 헤치고 열차는 쉴 새 없이 달렸다. 산이 나오고 평지가 나오고 강이 나오고 호수가 나오고 다시 산이 나오고 얼핏 바다가 보이고, 스쳐 지나가는 풍경에 세이라는 종종 설명을 곁들였다. 여기가 어디쯤이고, 저기는 뭐가 유명하고요. 저곳이 역사상에서……. 여기까지 와서 수업을 하려는 건 아니지? 하고 볼멘소리를 내면서도 이노리는 라디오 방송을 시작한 친구의 말을 끊지 않고 들어주었다. 떠들다 지치면 다시 차를 마시고 지나가는 카트에서 과자를 사고, 함께 가져온 닌텐도를 꺼내 게임을 하기도 했다. 포켓GO도 해보려고 했지만 열차가 움직여서 무리였다. 대신 포켓몬 센터는 쏠쏠하게 거쳐갔다.
“세이라네 고향에도 체육관 있어?”
“하나쯤은 있지 않을까요. 편의점도 하나 있으니까요.”
“편의점이 하나밖에 없단 말야?”
“그렇답니다.”
에~ 세상에 그런 데가 어딨어. 라고 말하는 저 사람은 앨리스 학원을 제외하고 도쿄를 벗어나 본 적 없는, 말하자면 도시의 도련님이다. 세이라는 부러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런 데가 세상에 있답니다.
아름다운 청록색의 바다, 뱃고동 소리와 갈매기 무리, 흰 모래사장, 그 너머로 생선을 말리는 건조대의 향연과 마을 터주대감인 고양이까지. 고향에 대한 설명을 재잘거리려던 세이라는 그러다 막 열린 입을 가렸다. 갑자기 말도 안 되는 걱정이 들었다. 아니, 말도 안 되는 걱정일까? 그럴듯한 걱정은 아닐까. 도시에서 나고 자란 이노리에게 제 고향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보일 것이다. 상점가라고 할 것도 없이 구멍가게만 몇 개 있고 음식점이나 가게들은 8시가 되기도 전에 문을 닫는다. 마트는 없고 편의점도 역 근처에 하나, 역에서 세이라의 집까지는 버스로 15분은 걸렸다.
도쿄가 막 밤의 향연이 펼쳐질 때 이 마을은 모두가 잠자리에 든다.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자랑할 거라고는 바다가 보이는 풍경 정도. 세이라는 하루 온종일 그 앞, 벤치에 앉아 바다만 보고 있어도 지겹지 않았지만 보통은 30분이면 질릴 것이다. 그도 금세 질려버리면 어쩌지? 지겨워하면? 하루 만에 돌아가고 싶어 하면 어떻게 해야 될까. 닥쳐오지 않은 미래가 그녀의 얼굴을 수심에 잠기게 했다.
“재미없으면 어쩌죠, 이노리 군 보기에요.”
“에? 뭐가?”
“정말 작은 마을이어서 몇 시간도 안 돼서 볼거리가 없어질 거예요.”
동네 뒷산이라도 데려가야 할까. 거기가 제법 경사가 있어서 오르기 힘들다고 들었다. 등산은 싫지만 그가 좋아한다면, 어떻게든 시간을 벌 생각만 하는 그녀의 이마로 어처구니없어 하는 이노리의 딱밤이 가볍게 떨어졌다.
“이상한 걱정을 다 하네. 너랑 놀면 되잖아.”
“우……. 아무것도 없어서 심심하지 않겠어요?”
“맨날 그렇게 놀아놓고?”
듣고 보니 그도 그랬다. 별 거 하지 않아도 집에서 노닥노닥거리기만 해도 시간이 잘 갔다. 그는 게임을 하고 그녀는 뜨개질을 하고, 서로 다른 일을 하며 보낸 적도 있었다. 뭘 새삼스레 걱정한 걸까. 겸연쩍은 동시에 안도가 들었다. 익숙지 않은 곳으로, 더군다나 제 고향집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보니 의식해버린 모양이었다. 멋쩍게 제 머리카락만 꼬던 세이라는 곧 다소곳하게 손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