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카하타 이노리
가을이 세상에 노란 필름을 씌울 때
안녕하세요, 이노리 군. 어느덧 완연한 가을이지요. 산책을 나갈 때마다 사박사박 밟히는 낙엽 소리가 귀를 즐겁게 해주더랍니다. 이노리 군은 요즘은 어떻게 보내고 있나요? 그야 얼마 전에도 보았으니 새삼스러운 질문일지 모르지만 모처럼 편지잖아요. 소리 내어 말하는 것 말고 문장으로 적어보는 당신의 이야기가 궁금해요.
이렇게 편지를 적다 보니 문득 생각났는데 늘 소리가 안 나오는 건 저였으니, 글을 적는 쪽도 저였고 상대는 소리를 들려주었더라고요. 물론 타인의 소리를 듣는 것도 좋아하지만~ 글로 적어 남는 것이 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답장을 써달란 말은 아니에요? 제 편지를 읽으며 어떡하지 고민하는 당신의 표정이 선해요. 후후, 당신은 당신의 좋은 방법으로 대답을 들려주세요. 요즘은 어떻게 지내는지, 무엇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저는 얼마 전에 미술관을 다녀왔어요. 빛을 아름답게 표현하기로 유명한 화가의 전시회가 있어서 보고 왔는데, 정말 아름답더라고요. 눈으로 볼 때는 스쳐 지나갔을 풍경이지요.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도 시간의 흐름을 따라 변화무쌍한 풍경을 저로서는 붙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텐데, 그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상상력을 더해 그림으로 표현하다니. 예술이란 대단하지 않나요? 작가님이 그린 다채로운 빛의 세계는 제가 눈으로 보던 것 이상의 풍경을 그려내 주어서, 당신이 앨리스로 그리던 색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생각해보았답니다. 현실적이면서도 몽환적이고, 현실에 존재함에도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빛. 매료될 법도 해요.
특히 흰 커튼이 노을을 따라 황금색으로 물들던 그림이 인상 깊었어요. 물감으로 어떻게 이렇게 투명하고 눈부신 색을 담아낸 걸까요? 노란색은 원래부터 좋아하던 색이었지만 그 넘실거리는 황금색은 뇌리에 오래 남을 것 같아요. 금金과 황黃은 다른 색이라고 하지만요.
가을에 접어들며 세상이 온통 노란 필름을 씌운 것처럼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어요, 이노리 군. 앨리스로 찾던 색과 다르더라도, 여전히 노랑은 예쁘지 않나요? 이런 말을 적으면 노란색만 좋아하는 건 아니라고 답하려나. 그래도, 당신이 변함없이 그 색을 좋아해주고 있어 저는 내심 기뻤답니다. 이제와 생각하는 일이지만,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 겪어온 수많은 우리의 경험이 지금의 우리를 이루고 있진 않은가 곱씹게 된답니다. 그 경험에는 싫은 일이나 슬픈 일이나 사실은 겪지 않아도 좋았을 일들도 물론 있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그 수많은 일을 딛고 여기 서 있기에, 감사해요.
지금의 추억 또한 미래의 저희를 풍요롭게 만들어주겠죠. 그때에 당신과 나눌 이야기가 벌써부터 기대되네요.
선캐처의 빛은 지금도 아름답게 당신의 방을 물들이고 있나요? 샛노란 보석이 빛을 받아 만들어내는 프리즘. 줄어드는 햇빛을 따라 옷을 갈아입는 가로수, 발아래 밟히는 바스락 소리의 노랑. 바람결에 흔들리는 가을 국화. 한 솥 끓여 퍼내는 카레의 색, 레몬 사탕. 앨리스 없이도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노랑이 있어요. 그 하나하나가 당신의 행복이 되길.
편지는 여기, 우체통에 두고 갈게요.
2021.11.01.
가을을 담아, 세이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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