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 꽃을 꺾었나

48 언젠가 만약에

천가유 2023. 3. 20. 22:38

: 아케치 요아케

더보기

 

 

언젠가 세이라에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네에에~?”

어느 따사로운 오후, 도쿄 시내 중에서도 조금 한적한 편에 속하는관광객보다는 동네 주민들이 잘 아는 맛집의오챠노미즈 역 골목의 카페에서 드물게 큰 소리가 났다. 얼른 제 입을 손으로 가린 세이라는 이렇게 갑자기요? 난데없이 향해오는 화살표에 아연한 듯 눈만 커다랗게 깜빡였다.

스푼을 입에 문 채 건너편의 요아케는 만약에 말이야, 만약에.’ 하고 어디까지나 가정임을 덧붙여 알렸다. 세이라에게도 그런 사람이 생길 수도 있잖아. 아니, 생기지 않는 쪽이 이상하다니까? 세이라가 얼마나 착하고 예쁜데. 잠시만요, 요아케 씨. 누굴 향해 말하는 거예요~ 한 차례 호들갑이 지나가고 나서야 요아케가 포크로 갈아탔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녀에게는 가정의 이야기지. 세이라에게 그런 사람이 생기거나, 그 사람과 마음을 나누거나 하는 일이. 그야 말한 적 없으니 그렇겠지만. 요아케는 본 적 없는 가정의 이야기를 퍽 진지하게 다뤘다.

그 사람이 세이라가 슬퍼지는 선택 같은 건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에게 중요한 건 세이라의 행복이니까.”

지금은 조금 설렜나? 아무래도 포크를 흔들며 하는 말은 멋있기보다 귀여울 뿐이었지만, 그래도 친구 좋다는 게 뭔지 진실어린 목소리에 결국 낭랑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 . 고마워요. , 파르페가 녹을 것 같은데 어서 먹어야죠. 아앗, 나의 슈퍼 디럭스 판다 오레오 파르페가!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러가게 된 것은 최근 25년 만에 재개봉 하게 된 영화 타이타닉덕분이다. 아니, 이야기는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그러니까 처음 만남의 목적은 분명 영화가 아니었다.

학원을 졸업하고 도쿄로 상경한 뒤에도 여전히 연락을 이어나가는 감사한 친구들 사이에서도 요아케와, 그녀의 오빠를 자칭하는-자칭인가? 요아케도 인정한 부분 같기도 하다-이노리, 두 사람은 특히 별 일 없더라도 자주 만나는 사이였다.

이번에도 요아케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을 때 세이라는 그저 봄이니까, 날이 풀렸으니까, 맛있는 봄 디저트라도 나온 걸까? 가볍게 부름에 응하였는데 정작 만나고 나서야 사안의 중대성을 깨달았다.

청혼 반지가 초콜릿이면 좀 그럴까?”

콜록, 콜록…….”

로맨틱한 프러포즈를 위해서 계속 고민하고 있는데 역시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서, 세이라. 같이 고민해줘!”

저기, 요아케 씨? 프러포즈요?”

. 키쿠라면 당연히 이라고 답해주겠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키쿠가 깜짝 놀라서 감동받을 만한 걸 해주고 싶어서.”

그러니까, 키쿠 씨와 요아케 씨의 결혼을 전제로 한 프러포즈 이야기인 거죠. ……그 청혼 반지를 초콜릿으로 만드는 건 어떨까 하는.”

바로 그거야, 세이라.”

찻잔을 내려놓는 손이 조금 떨렸다. 세이라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요아케가 실망하지 않으면서 반지의 종류를 바꿀만한 것으로.

물론 그녀가 생각하기에 키쿠라면 연인이 초콜릿 반지를 주든 판다 반지를 주든, 그것도 아니면 *에 등장하는 5개의 보석이 박힌 건틀릿 같은 걸 히어로의 필수 아이템이라며 결혼 반지 대용으로 주든 좋아할 것 같았는데(정말일까? 사실 세이라는 아직도 요아케의 남자친구이자 제 오랜 동창이 조금 어려웠다. 초등부 때까지는 제법 친했었는데. 서로의 중등부가 너무 힘겨웠던가. 떠오르는 흑역사에 찻잔을 휘젓는 손이 다급해진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서로 만족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좋은 반지와 그래도 요아케가 말하는 것과 같은 로맨틱함의 보편에 속하는 반지 중에서 어느 쪽을 권해야 좋을지 친구로서 대단히 고민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노리에게 연락해볼까? 떠오른 생각은 3초만에 금세 흩어졌다. 이노리 군은 이런 센스라곤 없는걸요. 친구를 폄하하는 건 못된 일이지만 이건 적절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초콜릿 반지도 좋지만, 결혼이라고 하는 건 두 사람이 영원히 함께하기로 한 약속이잖아요. ‘영원성을 상징적으로 남겨둘만한 것이 좋지 않을까요?”

영원성을?”

네에.”

그래서 결혼반지라고 하면 다들 다이아몬드를 쓰더라고요. 사실 100년 전만 해도 결혼반지에 다이아보다는 원하는 색의 보석을 썼다가, 한 회사에서 다이아몬드의 단단함과 순백을 결혼과 연관지어서 마케팅한 이후로 지금처럼 그 보석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랐다고 해요. 오늘의 자투리 지식을 나누며 세이라는 "그러니까 요아케 씨도 이왕이면 오래 보존할 만한, 또 매일매일 껴도 닳지 않을 반지가 좋지 않을까요?" 웃었다.

좋아. 그럼 좀 더 고민해볼게.”

"그럼 나온 김에 보석 가게라도 돌아볼래요? 샘플을 봐두면 하고 싶은 게 생각날 수도 있고요."

──이렇게 된 것이다.

 

여기서 어떻게 영화로 이어졌냐고? 그야 친구 만나서 수다 떠는 일이 다 그렇지. 만나서 수다 떨다가 아이쇼핑 좀 하다가, 점심을 먹다 보니까 마침 커다랗게 홍보 중인 영화 포스터를 보았고 때마침 10분 뒤 영화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태어나기도 전에 개봉했던 불후의 명작을 보기로 결정하기까지 이야기는 일사천리로 흘렀다.

방금 전에 점심으로 커다란 야채튀김과 새우튀김이 올라간 우동을 먹어놓고선 캐러멜 팝콘을 2인분 사서 들어간 두 사람은, 정작 후반부 가서는 훌쩍훌쩍 우느라 소금 팝콘으로 만들어 눅눅해진 것을 쓰레기통에 버려야 했다.

그렇지만 정말 좋았어요. 너무너무 로맨틱하고 아름답고…… 이왕이면 해피 엔딩이 좋았을 텐데 아쉽네요.”

맞아. 함께 살아남을 수 없다면 차라리 두 사람 다 가라앉아버리는 쪽이 난 더 좋았을 것 같아.”

두 사람 다 가라앉는 쪽이요?”

함께 죽는 쪽이 좋았단 말인가요? 물론 이 나라는 신쥬(心中)의 나라다. 아마 타이타닉의 결말을 두고 신쥬해버렸어야 한다고 가장 많이 말하는 나라가 일본이겠지. 하지만 그 말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요아케의 입에서 나왔단 점이 세이라를 놀라게 했다.

세이라에게 있어 요아케는 늘상 긍정적이고 활력 넘치는 사람이고, 히어로를 동경할 만큼 정의롭고 올곧고, 정의는 승리한다는 말처럼 마지막까지 멋지게 살아남는…… 그런 모습을 보이는 이가 아니겠는가. 종종 제 히어로 님~ 하고 농담처럼 부를 만큼 요아케는 아침 7시 아동만화의 주인공처럼 절대 지지 않는 주인공의 상징이었다.

그런 요아케의 입에서 함께 죽어버리잔 말이 나온 것이다. 10년지기 친구의 낯선 면을 지금 새롭게 보았다. 놀란 듯 답을 못하는 세이라를 향해 요아케는 여전히 차분한 낯을 하고 부연했다.

난 말이지. ‘차라리 함께 가라앉고 싶다라는 말은, ‘어떻게든 함께 살아가고 싶다라는 말과 비슷하다고 생각하거든."

그리고 만약 내가 잭 같은 선택을 한다면 키쿠는 날 평생 원망할 거야. 그럴 바에야…… 물론 어떻게든 함께 살아남는 편이 제일이지만.

차분하고 온화한 표정, 부드러운 말투, 연인의 이름을 입에 담을 때 보이는 옅은 애정과 수줍음, 눈앞의 요아케는 세이라의 오랜 친구 요아케가 아니라 키쿠의 연인 요아케다. 그 차이를 조금 신기해하며 세이라는 몰래 키쿠를 질투했다. 저의 소중한 친구를 이런 얼굴로 만들어버리는 사람이라니, 부러워라. 그래도, 행복해 보여 기뻤다.

세이라는? 어떤 결말이 좋을 것 같아?”

. 아까도 말했지만 저도 둘 다 사는 엔딩이 가장 좋지요. 하지만…… 정 어떻게도 할 수 없다면, 선택해야만 하는 순간이라면.”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의 바람을 따를 것 같아요. 순종을 닮은 맹목인 듯, 애틋한 순애보인 듯 그녀의 목소리에도 수줍음 비슷한 것이 덮여 흘렀다.

저도 그 사람이 살아주길 무엇보다 간절히 바라겠지만 결국은 말이죠, 사는 것도 살리는 것도 그 사람이 선택한 것이라면…… 그렇게 해서 그이가 행복하다면요. 그 사람이 혼자 살아남아 괴로워하기보다 절 살리고 행복하게 눈 감는다면 그 바람을 이루어주고 싶어요.”

그리고 살아남아 괴로워하는 건 제 몫이 되는 거죠.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토옥, , 빗방울처럼 떨어졌다. 잔잔한 파동을 그리며 시선은 침잠하듯 가라앉았다.

우울은, 고통은 늘 제 삶을 동반하는 것이어서 물 먹은 솜처럼 슬픔에 잠식되기가 눈 깜짝할 새였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린 건 세탄 세이라가 제 처지에 비관하며 청승이나 떨던 시절을 벗어난 덕일 테고, 그만큼 마음에 딱지가 단단히 앉았단 뜻도 되었다.

……어머나, 너무 어두운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영화에 나온 목걸이는 어땠나요? '대양의 심장'이라던 커다란 블루 다이아몬드요. 요아케 씨의 눈색과도 닮아서, 결혼반지로 다이아를 고른다면 그쪽도 좋겠어요. 키쿠 씨를 닮은 흰색과 요아케 씨를 닮은 푸른 다이아로요.”

그러나 애써 분위기를 환기하려고 해도 히어로의 눈은 피하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겨우 이야기가 가장 첫 장면으로 돌아온다.

요아케는 세이라의 얼버무림에도 빠안히 그녀를 보다 기어코 그 말을 꺼냈다. 언젠가 생길 수도 있잖아, 좋아하는 사람. 만약 그렇게 된다면 말야.

나에게 중요한 건 세이라의 행복이니까, 세이라가 슬프지 않도록 나약하게 굴지 말고 끝까지 버텨서 살아남으라고!.”

물에 빠지는 건 확정이고요?”

근성을 확인하는 거지.”

네에, 네에. 고마워요. 후후, 요아케 씨보다 더 절 생각해줄 사람이 없으면 어쩐담.”

있지도 않은 상대에게 저렇게 과몰입해서는요. 키득거리고 웃으며 포크가 하얀 딸기를 향했다.

막 끝물인 딸기는 톡 건드리기만 해도 짓무른 단향이 나올 정도로 잘 익어 있었고 딸기를 감싼 타르트 생지를 알맞게 구워져 바삭함과 고소함을 자랑했다. 입안에서 녹아내리는 호화로운 단맛을 만끽하던 세이라의 눈이 때마침 요아케의 휴대폰 화면을 차지한 푸른 보석, 대양의 심장을 응시했다.

난데없는 화제가 나와서인가, 문득 조금 그리운 것도 같았다. 저렇게 바다 같이 푸른 눈을 한 사람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니까 조금 별나게도 들리지만, 오래 알았고 지금도 물론 알고 있다.

그 사람을 좋아했다. 좋아했었다.

세이라가 사랑하던 에메랄드빛 바다와는 조금 다른 푸르고 깊은 바다를 닮았던 사람. 춥고 어두울 것만 같았던 심해가 따뜻하고 안온할지도 모른다고 알려주었던 사람. 홀로 외롭고 쓸쓸할 줄로만 알았던 밤에 옆에 누워 스며드는 햇살과 함께 좋은 아침의 인사를 해주던 사람. 때로는 답지 않은 선택을 해가면서까지 지켜주었던 사람.

그 사람이 좋아서, 제 바람이라곤 온통 그 사람을 위한 것뿐이어서 무엇이든 그의 말을 이뤄주고 싶기만 하던 때가 있었다. 조금 전의 답도 무의식중에 그를 생각했던가. 그라면, 세이라에게 살아달라고 할 테니까.

과거나 지금이나 세이라의 답은 같을 것이다. , 그게 당신의 바람이라면요. 제가 당신 몫까지 살아남을게요. 과거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사실은요, 요아케 씨. 언젠가 그런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지만 저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살아남은 로즈는 평생을 괴로워하며 보내지만은 않았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고, 집안에서 벗어나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 거추장스러운 치마를 벗어던지고 말에 올라타고 영화배우가 되기도 하고 비행기도 조종해보고,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만한 삶을 보냈다. 충실하고 행복한 삶임에 틀림없었다.

홀로 살아남는다면 평생을 괴로워하며 죄인처럼 살 거라던 세이라의 어린 착각과 다르게 시간이란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다. 언제까지고 고통에 빠져 있어 봤자 죽지 못해 사는 삶이란 제게 득이 될 게 없었다. 내일이 기다린다면 내일의 무게를 져야만 한다는 것, 그 대단치 않은 사실을 알게 된 지금이 과거와 달랐다.

뭐어어?”

난데없는 친구의 고백에 요아케의 몸이 테이블을 넘어 기울었다. 누군데? 언제? 지금은? 어어, 잠시만요. 파르페가 쏟아지겠어요. 햇살 스며드는 어느 오후, 점점 길어지는 해가 서편으로 기울어가는 시간대. 또 한 번 한적한 카페의 창가 자리가 소란스러움으로 들썩였다. 쉬잇-, 검지를 입에 붙인 세이라는 친구와 눈을 마주치고 웃으며 로즈가 그러했듯 천천히 옛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친구랑 영화 보고 차 마시고 걸즈토크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