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영 마지막 날 아침은 어쩐지 생각보다 춥지 않았다. 또한 자고 일어났을 때 볼의 위치가 달랐던 점을 그의 눈썰미는 놓치지 않았다. 자고 일어난 에셸은 몬스터볼과 알을 나란히 두고 안심한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포켓몬은 그를 싫어하지 않았다.
“알에서 속삭임 같은 게 들렸어요, 위키링. 부화가 머지않은 모양이에요. 그 때는 꼭 곁에 있어줘요. 같이 지켜봐야죠.”
혜성시티의 숙소는 이리나와 함께 쓰게 되었다. 오랜만에 훈기가 감도는 방, 푹신푹신한 이불과 침대, 바람 들어오지 않는 공간에 에셸은 깊이 마음을 놓았다. 모험을 즐기는 마음은 어디 간 건지. 지금은 그저 호텔 방이 눈물나게 좋았다. 짐 정리를 마치고 가볍게 샤워까지 끝내자 금방이라도 잠이 쏟아질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잠들기엔 할 일이 남았다. 알을 무릎 위에 올린 채 그 표면에 귀를 붙인다. 눈을 감고 너머에 집중하자 작은 웃음소리와 속삭임, 바깥을 기대하는 알의 기분이 깊이 전해졌다.
“당신도 바깥에 나오길 기대하고 있나요? 저도 무척 기대돼요. 언제쯤이면 기지개를 켤 준비가 될지 두근두근하답니다.”
이미 태어난 포켓몬들과 함께 머메이드의 공연을 보는 캠프의 다른 트레이너들이 잠깐 좋아 보이기도 했으나 에셸은 달리 걱정하지 않았다. 냐미링의 텔레파시가 알과 시야를 공유하고 있음을 알려준 덕이다. 러블링은 알속에서 몹시 즐겼노라고 몽나가 전달하는 감정의 파동을 느꼈다.
“모처럼 좋은 구경을 한 김에 한 가지 더 보러갈까요?”
잠을 깨울 겸 기지개를 켜며 침대에서 내려온다. 후와링의 길게 내려온 손을 자신의 가방끈에 묶어두고 저글링과 냐미링을 대동한 채 에셸은 알을 안은 어깨끈을 맸다. 위키링의 몬스터볼까지 챙기고 살금살금 새벽 공기를 맞으러 향한 곳은 혜성시티의 자랑인 얼음호수였다.
야밤에는 아무래도 위험하기 때문에 출입이 제한되는 곳이다. 그래도 에셸은 무리를 해서라도 이 새벽의 풍경을 알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시리도록 찬 공기였다. 얼어붙은 호수 위로 바람이 불 때마다 살이 에일 것만 같았다. 입김이 하얗게 번지고 양 귀가 꽁꽁 얼어 붉어졌다. 뱉어내는 숨이 곧바로 서리가 되어 날아갈 것만 같은 추위 속에서도 에셸은 알에게 가로등 빛을 따라 퍼지는 호수의 눈꽃과 빛그림자를 설명했다.
“낮에 사람들이 많을 때 오는 것도 좋아해요. 그럴 때면 이 얼어붙은 호수가 어쩐지 따뜻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거든요.”
가족과 연인과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오는 만인의 호수다. 일년 중 대부분의 계절이 얼어붙어 있다 해도 이곳은 라이지방 중에서 가장 따뜻한 장소 중 하나였다.
“그런데 밤에 오면은요. 꼭 이 호수의 주인이 된 것만 같아서, 그 적막감이 좋더라고요.”
그렇게 말하는 에셸도 정말 새벽에 호수에 와보긴 처음이었다. ──사실은 말이죠. 아무도 없는 밤에 눈꽃호수에서 좋아하는 사람과 데이트를 하고 싶다는 꿈이 있어요. 언젠가 읽었던 로맨스 소설을 떠올리며 에셸은 알에게만 비밀 이야기를 소곤거렸다. 소설에서 나온 묘사라고는 두 사람이 새벽의 호수를 걸었다는 짧은 문장 몇 개가 전부였으나 그 일로 인해 두 사람의 관계는 많이 달라졌다. 그 장면은 작품에서 중요한 국면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고작 몇 문장을 가지고 많은 상상을 했었다.
지금도 그게 어떤 느낌인지는 다 짐작이 가지 않았지만.
“다음엔 둔치시티를 구경시켜줄게요. 그곳에도 제가 아끼는 장소가 있거든요. 그 즈음엔 이렇게 알 속에서가 아니라 바깥에서 보고 있겠죠. 가족에게도 소개를……”
에취.
재채기가 나왔다. 알이 조금 흔들렸다. 아무래도 추위를 이길 수가 없다. 이대로라면 알도 너무 추우리라. 아직 할 이야기가 많았지만 안 되겠다 싶어진 에셸은 돌아가려고 걸음을 돌렸다. 돌리려 했다. 그러나 사고보다 행동이 느렸다. 몸이 저린 냐미링만큼 느려진 것 같았다.
달링, 위기에 당면? 혼자 헛된 생각을 하며 부르르, 몸이 굳어버릴 듯한 추위에 내놓아진다. 그러나 여기서 멈췄다간 다 같이 동사였다. 그럴 순 없다며 다시 한 번 힘겹게 걸음을 떼는 그 때에 볼이 딸깍, 열렸다.
“위키링.”
못마땅한 표정의 불켜미가 익숙하게 에셸의 품 안으로 들어갔다. 금세 알도 인간도 체온이 올라간다. 아까까지 추위로 인해 발갛게 얼었던 뺨과 귀가 차츰차츰 혈색을 찾아간다. 밤공기가 두렵지 않게 된 에셸은 불켜미를 힘껏 끌어안았다. 불꽃이 트레이너를 다치게 하는 일은 없었다. 그 연인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말하지 않아도 알 것만 같은. 에셸은 이제야 조금 소설 속 장면이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위키링이랑 갈등을 겪느라고 자캐 설정값 중에 <로맨스 소설을 좋아함> 잊고 있다가 이 때 한 번 어필해봤어요. 이게 이후의 복선이 된 거 즐겁고 좋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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