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또 훌쩍 늦은 시간이었다. 에셸은 안경을 벗고 두 손으로 눈두덩이를 꾹꾹 눌렀다. 그대로 주변을 더듬거리자 차갑게 식은 머그가 손에 잡혔다. 머그를 눈에 붙이자 제법 시원하고 기분이 좋았다. 위키링이 있는 동안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생각보다 더 당신에게 의지를 많이 하고 있었나 봐요.”
머그만이 아니었다. 텐트 안쪽엔 따뜻한 난로가 있었지만 그 자리는 알들과 포켓몬들에게 양보하고 가장 구석진 자리에서 업무를 보던 에셸은 조금 언 듯한 뺨이나 손이나 두 다리를 찌뿌듯하게 뻗어가며 풀었다. 손바닥 아래로 피부가 차가웠다. 그러다 에취, 작은 재채기를 하고 만다. 몬스터볼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미처 눈치 채지 못한 채 에셸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검토한 메일의 전송버튼을 눌렀다.
“이걸로 하나 또 마쳤고. 후우……,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요?”
잔단 소리를 알아들었는지 동굴 안을 돌아다니며 잠든 사람들의 자리를 봐주던 냐미링이 느긋하게 돌아왔다. 이 몽나는 오늘도 만족스러울 만큼 사람들의 꿈을 취했는지 포동포동함을 뽐내고 있었다. 꾹 누르면 퐁, 튕겨나올 듯한 감촉에 에셸은 폴라에게 간식 너무 주지 말라던 루버의 말에 겨우 공감했다. 식사량 조절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그보다 이렇게 먹고 다녀도 되는 걸까? 꿈 조절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내일은 몽나의 도감을 더 읽어봐야지.
저글링은 오늘 너무 많이 구른 탓인지 일찌감치 볼 안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에셸의 포켓몬 중 아마 가장 바른 생활을 하는 포켓몬이겠지. 천궁도 말했지만 달링 파티의 기둥이자 대들보이다. 후와링은 이번에도 천장에 붙어 내려오질 않았는데 5번을 불러도 내려오지 않는 포켓몬을 보며 에셸은 자신의 트레이너 자질에 다시 한 번 회의감을 느꼈다.
모든 포켓몬을 아꼈다. 하지만 어쩐지 구심점이 없었다. 포켓몬들끼리 서로 어우러지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를 안다.
비비안느와 대화하면서도 차분히 반성한 점이지만 이번엔 그가 경솔했다. 하고 싶은 일과 할 수 있는 일, 해도 괜찮은 일을 구분하지 못하고 저질렀다. 그렇다면 이 불켜미의 마음은 어떻게 돌려야 할까. 어울리지 않게 찌푸린 표정으로 고민하던 에셸은 항복을 표하듯 두 손을 털었다. 피곤해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오늘도 같이 잘 생각은 없는 듯한 볼을 손바닥에 놓고 매만지다가 볼 너머로 굿나잇 인사를 남기는 게 고작이었다.
내일은 꼭 위키링과 대화해야지. 다짐하며 알을 품에 안는다. 한기가 느껴져 부르르 어깨를 떨고 더 꼬옥 안았다.
──어라. 알에서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제가 밖에서 곤란해 하는 걸 보고 웃은 건 아니죠?”
고스트 타입은 장난꾸러기가 많다던데, 너도 혹시 그럴까. 부화가 머지않은 알에게 귀를 가까이 해보았지만 웃음소리는 두 번 들려오지 않았다. 어떤 새침떼기가 기다리고 있을까. 알이 주는 온기에 기대 에셸은 금세 잠들었다. 잠든 여자에게서 한 번 더 재채기가 나올 즈음, 마지못한 표정으로 불켜미가 볼에서 나오는 풍경은 오직 알과 흔들풍손만이 보았을 것이다.
그 날 밤은 오랜만에 무척이나 따뜻했더라고, 여자의 꿈을 먹은 몽나가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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