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스터 : 디 이노센트 제로

33) 02.03. 시간이 덮어준 것

천가유 2022. 4. 27. 21:08

For. 제롬 / 과거로그

더보기

 

5주차 리포트

 

제가 알려주려고 한 건 그게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지금 여기에서도 찾을 수 있는 제 행복에 관한 말이었답니다. 그렇게 말하며 여자는 두 검지를 세우고 히-, 제 양 입꼬리를 당기는 시늉을 하였다. 이것 봐요. 이렇게 웃는 거요.

제리 씨가 한 번 웃어준다면 저는 그것만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이야기였는데.”

처음 이야기를 꺼낼 때만 해도 뻔뻔하게 말하려고 했다. 이래봬도 제법 철면피인 여자였다. 그랬는데, 박자가 어긋나버리는 통에 어쩐지 부끄러워져 슬 양손을 내렸다. 누가 봐도 남의 옷인 품이 남는 겉옷을 당기며 민망한 낯을 감춘다. 열이 오른다면 필시 이 때문이리라. 그 다음으로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고 장소야 어디든 좋았으나, 아마도 짧지 않은 이야기가 될 것이니.

여기서 말하긴 조금 그러니까 우리 자리를 옮길까요?”

캠프가 머무르는 호텔에는 라운지가 두 곳 있었다. 하나는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1층 로비 라운지. 햇빛이 잘 들고 화사한 분위기로 아이들의 손을 잡고 방문하거나 연배 있는 손님들이 잠시 쉬어가기 위해 이용한다. 또 하나는 호텔 상층으로, 투숙객에게만 오픈되는 라운지는 특히 해질녘이나 밤에 방문하기 좋다고 했다.

전면창 너머로는 조명을 반사시켜 반짝이는 새하얀 눈꽃호수가 한눈에 담겨 있었다. 반짝거리는 밤의 풍경은 새벽이 밝도록 질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한참 풍경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에셸은 이윽고 느긋하게 시선을 건너편 자리로 옮겼다. 남자는 주문한 음료를 손에 쥔 채 말을 아끼고 있었다. 한 마디 허투루 하는 법이 없는 면모는 직업적 특성에 더해 타고난 듯 했다. 신중하고 배려심 깊은 사람이었다.

그래요. 솔직히 말하자면 궁금합니다. 당신 트라우마를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만.

그래서 남자가 질문을 남긴 것이 조금 의외였던 것 같다. 궁금하지 않다고, 관여하지 않고 지나쳐도 될 것을 굳이 짚고 넘어가는 건── 남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연민인가. 비슷한 흉터를 가진 이를 향한. 오늘 그는 상대에게 받은 장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섬세한 레이스 장식의, 제 머리색을 꼭 닮은 봄의 색. 리본 끝을 만지작거리다 천천히 벗겨내면 바깥쪽에서부터 안으로 번지듯 희미한 화상 자국이 보였다.

사실, 이야기하는 건 정말 어렵지 않거든요. 한참 어릴 적 일이고 이미 쉼 없이 말해온 것이어서 아마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말을 반복하기도 어렵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트라우마라든지 상처라든지,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덧붙이며 차로 입술을 적신다. 이야기는 1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달링 상회는 16년 전에도 작지 않은 회사였다. 할머니 대에 시작해 어머니가 태어날 즈음 이미 3층 건물을 올렸고 어머니가 아버지와 결혼하였을 즈음엔 둔치에서 모르는 이가 없을 상회가 되어 있었다. 그러고도 달링 일가는 부지런히 배를 타고 지방과 지방을 오가며 자신의 눈으로 직접 좋은 상품을 골라내곤 했다. 새색시였던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신혼여행으로 방문한 타 지방의 도시를 보고 반드시 이곳만큼 둔치를 번성시키겠다고 선언한 이야기는 에셸이 어릴 적부터 매 결혼기념일마다 들었던 것이다.

일가의 부지런함과 배 여행을 좋아하는 성질은 아이가 태어나고도 한결같았다. 에셸은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부터 매번 어머니 손을 잡고, 또 아버지 손을 잡고 거대한 무역선에 올라타 여러 지방을 여행했다. 그러니까, 16년 전의 6살 아이도 말이다. 하필 그 날 일이 벌어져 불행한 게 아니다. 아마 언제라도 있었을 것이다.

아직도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고 해요.”

흉터가 남은 자리를 문지르며 여자는 흘리듯 말했다. 지금이라면 모르겠지만 그 때는 방도가 없었다. 증거들은 이미 거진 타버렸고 배에 타고 있던 모두가 용의자로서 조사를 받았지만 결국 누군가를 특정해내진 못했다. 왜 그런 짓을 벌였는지, 목적조차 오리무중으로 공소시효가 지났다.

공소시효가 끝나던 날, 부모님은 속상함에 얼굴을 들지 못했다.

기억하는 건 무언가가 크게 폭발하는 소리, 그리고 빛. 굉장히 뜨거웠다고 생각했는데요. 뜨겁고 무서워서 어머니를 찾는데 마침 뚝 떨어져 있었어요. 그래서 어머니를 불렀더니, 사색이 된 얼굴을 하고선.”

시끄럽고 혼란스럽고, 뿌연 연기 탓에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여러 가지가 불명확한 가운데 그 표정만이 유독 기억에 남았다. 그래서 더 어머니에게 약한 것일지도 몰랐다. 다신 보고 싶지 않은 표정이다. 그러다 2차 폭발에 휘말렸고,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강렬한 섬광에 정신을 잃었다 깨어났을 땐 병원이었다.

아이의 상태는 많이 안 좋았다. 몸의 상태는 물론이고 마음의 상태도. 화상이 다 나을 때까지 병원 바깥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는데, 다 낫고도 사건 이후 한 해 동안은 배만 봐도 겁에 질려 움직이지 못했다.

지금은 이렇게 라운지의 조명이나 야경을 응시하고 있지만 어릴 적에는 백열등이 켜지는 일에도 깜짝깜짝 놀라 집안의 모든 등을 바꾸었다. 천둥번개는 쥐약이나 다름없었고 불시에 플래시가 터져서 선 채로 기절한 적도 있었다. 거의 열 해가 지나도록 섬광과 소음을 피해 다녔다. 달링의 공주님이란 다른 데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졸업사진에 선글라스를 쓰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랬는데, 친구들이 저를 따라 다 같이 선글라스를 껴주어서, ……나쁜 기억이 그렇게 좋은 추억으로 뒤바뀌기도 하는구나, 그 때 배웠어요.”

그러나 모든 일 앞에서 시간은 좋은 약이다. 눈앞의 남자도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에셸에게 시간이란 오래된 나쁜 기억을 덮고 그 위를 좋은 기억으로 차곡차곡 쌓아 나쁜 기억이 다시 불쑥 고개를 드는 일이 없도록 해주는 고마운 것이었다.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고. 언제부턴가 TV에서 배가 나와도 아무렇지 않게 화면을 보게 되었고 천둥번개가 치는 날에는 알아서 커튼을 치고 귀마개를 찾았다. 카메라 플래시 앞에서 기절하지 않는 법을 익혔고 여차할 때를 대비해 선글라스도 소지하였다. ‘보통보다 조금 번거로운 일상이었으나 이것을 저의 당연한 일상 삼았다. 지금은 괜찮다고 웃으며 말하기에 부끄럽지 않은 성과였다.

흉터는 말이죠. 아마…… 저보다 할머니랑 어머니가 더 속상해하셔서, 그래서 숨기게 된 것 같아요.”

손등보다 더 희미하지만 몸의 오른쪽 곳곳에 여전히 옅은 화상자국이 남았다. 아마도 폭발이 제 오른쪽에서 났던 걸 테지. 범인은 비겁하게도 포켓몬을 시켜 일을 저질렀다. 배 바닥에서부터 돛 아래까지 곳곳에 몬스터볼을 두고 때가 되자 자폭을 시켰다고 한다. 그 일이 있고부터 어머니는 포켓몬을 싫어하게 되었다. 포켓몬의 힘을 두려워하게 됐다고도 할 수 있다.

어른보다 연약한 아이의 피부는 필연적으로 흉이 졌다. 화상 자국이 눈에 보일 때마다 한숨을 쉬고 안쓰러워하고, 자기 잘못인 양 죄스러워하고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어른들의 태도가 아이를 움츠러들게 했다. 이게 보이면 어른들이 속상해 해. 그래서 감추었더니, 감추면 감추는 대로 아이도 화상 자국을 싫어한다는 오해와 슬픔을 샀다. 하지만 한 번 장갑을 끼게 되자 이후로는 벗을 수 없었다. 그렇게 길을 들인 것처럼.

지금도 할머니는 그 흉이 네 흠이 될까 두렵다고 에셸의 뺨을 어루만지며 한숨을 늘어놓곤 했다. 그럴 때마다 에셸은 이것이 흠임을 의식했다.

아참, 제리 씨 앞에서 또 이런 얘기를.”

흉이네 흠이네, 숨겨지지도 않는 것을 얼굴에 단 남자 앞에서 할 말이 아니지. 제 입을 찰싹 두드리고 어색한 헛기침을 흘린다. 겸연쩍음에 목을 움츠리고는 찻잔을 들어 올리는 척 살짝 그의 안색을 살폈다. 남자는 또 별 것 아니라는 양 익숙하게 치부할까.

아무튼…… 이런 얘기랍니다. 별 일 아니라고 할 건 아니지만, 제겐 정말 지나간 일이에요. 작년에는 무사히 배도 타고 온걸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장갑이 없으면 허전함을 견디지 못하듯 다시 착용하는 건 제 말의 반증과도 같았으나, 이는 아직 무의식의 영역이다.

말해놓고 보니 너무 제 이야기만 한 것 같은데요. 저도 제리 씨 이야기를 물어봐도 되나요?”

화제를 돌리듯 짐짓 가벼운 투로 여자는 대화의 주체를 상대에게로 돌렸다. 물론 말하기 어렵다면 괜찮아요. 듣고 싶은 이야기는 그것만이 아니니까. 그래도 만일 괜찮다면── 당신이 말한 것처럼, 트라우마를 자극하지 않는 선까지만. 궁금한걸요.

이를테면 당신에게 시간이란 당신이 지닌 증오를 덮어버릴 만한 좋은 약이 되었는지, 혹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며 끊임없이 그 증오를 불태웠는지. 그리하여 끝내는 원하던 종착지에 도달해 감정을 해소하였는지, 그 빈 자리에 들어갈 새로운 감정은 찾았는지.

이를테면 그런 이야기였다. 당신이 살아온 족적에 관한.


이렇게 과록 풀어놓고 바로 다음날 PTSD 눌리는 사건 터진 게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