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주차 리포트
목새마을에 도착한 날의 새벽, 그 날도 잠들지 않고 버티려던 에셸은 그만 몰려오는 잠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기차에 타야 한다는 부담을 넘어선 덕분일까. 그 날은 정말 오랜만에 깊이 잠이 들었던 것 같다.
포근한 이불에 감싸여 저보다 작은 아이와 한 온기를 나누며 에셸은 생각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가 좋아하는 책에서 나오는 구절이기도 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사랑으로 산다. 당장 내일에 들이닥칠 운명조차 모르면서 사람은 때론 어리석고 때론 탐욕스럽고 때론 비겁하고 때론 정의롭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언제나 늘 사랑이다. 사람을 내일로 데려가는 힘이었다.
에셸은 제가 받은 사랑만큼 이 품 안의 아이가 사랑으로써 살아가길 바랐다.
그리고 오늘의 제가 있게 한 많은 사랑에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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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러운 기억이 있다. 여전히 그를 괴롭히는 기억이었다. 사고를 말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극히 건조하게 사실을 전달할 뿐이니까. 하지만 그와 관련된 감정을 말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참 오랫동안 덮어두었던 일이다. 상처가 이 이상 덧나지 않게 마음 가장 깊숙한 곳에 상자에 넣어 봉인해두었다. 그 방법도 틀린 건 아니었다. 덕분에 지금의 그가 있는걸. 다만, 그렇지. 상황은 변하고 상황에 따라 사람도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실 속 화초였다. 충격과 자극을 최대한 멀리하고 사시사철 산들바람 봄바람에 휘감겨 안온하게 자랐다. 부족함 없이 큰 사랑을 받아 왔다. 그대로만 자란다면 아무런 문제 없었을 것이다. 10년이 넘게 진화하지 않고 곁을 지켜주는 작은 불켜미처럼. 하지만 에셸은 안온한 환경을 벗어나 스스로 배를 탔고 캠프에 지원했다. 그로 하여금 환경을 벗어나도록 만든 계기를 어머니가 제공했다는 걸 알면 어머니는 아마도 굉장히 슬프고 속상해하겠지만─어라, 혹시 이유를 알게 되면 어머니도 ‘그 말’을 철회해주실까?─한 번 쓰러지기 시작한 도미노는 걷잡을 수 없이 에셸을 낯설고 새로운 환경으로 이끌었다.
그렇다고 해서 살면서 테러를 2번이나 겪는 건 분명 흔한 경험이 아닐 테지만. 운명의 장난이란 걸까.
PTSD라고 흔히 부르는 것이었다. 극복하고 이겨내기보다 묻어두길 택해왔다. 그런데 묻어둘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리고 말았다. ‘그 사건’이 있은 날부터 에셸은 거의 온종일 잠들지 않고 깨어 있었다. 정말이지 견디지 못할 때가 되어서야 기절하듯 잠시 눈을 붙이고 일어났다. 그럴 땐 꿈도 없었지. 다행이었다. 잠이 드는 순간 찾아올지도 모르는 악몽이 두려웠다. 몽나가 에셸의 꿈을 먹으려 했다. 몇 번이나 눈동자를 응시하고 텔레파시로 의사를 전했다. 그 뜻을 트레이너는 반복해 거절했다. 그의 몽나는 분홍색 연기에 휘감겨 있을 때가 가장 사랑스럽다. 이런 일에 포켓몬을 이용하고 싶지 않았다. 이럴 때면 꽤나 고집스러운 사람이지.
원초적인 공포가 마음을 좀먹었다. 하루하루 수리되어가는 기차를 보면서 저 안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순간이 찾아오는 걸 두려워했다. 도망칠까?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시행하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하다. 캠프를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이유를 깨달음과 동시에 아주 당연한 사실 하나를 또 깨달았다.
더 이상 그는 여섯 살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영문 모를 일에 휘말려 무력할 수밖에 없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지금이라면 공포와 마주할 수 있었다. 이렇게 깨닫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말이 그를 이끌어주었을까.
태양을 닮은 레인저가 있었다. 그의 말은 지극히 그 자신을 닮아 있어서 언제나 해가 뜨는 곳을 향했다. 어디서든 선명히 들려오는 목소리가 맨 앞에서 당겨주는 것 같다가도, 그는 언제나 맨 뒤에서 누구 하나 빠지지 않도록 지켜봐주는 역할을 했다. 그가 포기하지 않아서 에셀도 포기할 수 없었다.
알로라의 따스함을 닮은 소년은 에셸에게 열차여행이 기다려지는 마법을 보여주었다. 기차를 타기 위해 걸어가는 동안 상자가 구겨지지 않도록 집중하는 건 대단히 유익했다. 제대로 먹지 않는다는 오해를 산 건 억울하기도 했으나─허나 그 또한 사실이다─그가 준 치킨스프는 새벽의 한기를 이겨내게 해주었다.
먼저 나서는 법이 없던 내향적인 아이가 옆자리에 앉아 곁을 지켜주었다. 힘들 때 곁에 있어준다는 그 작은 행동이 얼마나 큰 응원과 용기가 되는지 아이는 무척이나 잘 알았다. 북부의 바다를 헤쳐 온 지혜로운 소녀는 마음이 지치고 아플 때 이겨내는 법을 알려주었다. 힘들 땐 힘들다고 말하라고 했지. 그가 덮어준 담요가 마을을 벗어날 때까지도 온기를 지켜주었다.
상냥함, 관심어린 애정, 배려. 동화에서 볼 법한 선하고 다정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모이고 모여 걸음을 이끌었다.
──다라역으로 향하는 길, 먼저 잡아오고 내밀어오던 두 손은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괴로운 기억은 좋은 기억으로 덮을 수 있다. 바로 이 순간처럼.
“에셸이 마주 할 땐 늘 제가 옆에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 기억이 좋은 기억으로 덮어질 때까지, 함께할 테니까.”
“만약에, ……다시 이렇게 쉬게 되어도… 모, 두… 기다려 줄 거예요. 저도, …같이… 그. …있을 거고요.”
이유를 묻지 않고 옆에 있어준 이가 있었다. 궁금할 법도 한데 알고 위로해주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먼저 묻지 않겠다고 했다. 그와 맞잡던 손의 감촉이 지금도 선연했다. 길을 잃을 것만 같은 순간에도 그 잡힌 손을 떠올려 눈 감고 걸어가고 싶었다. 그가 웃는 게 좋다고 해주었으니까.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깼을 때 가장 먼저 보인 얼굴이 있었다. 한심하고 꼴사나운 모습까지도 보듬어 안아주는 이였다. 어떤 선택을 하든 지지해준다고 말해주었다. 반짝이는 눈동자를 응시하고 있노라면, 그 눈에 비치는 가능성을 저까지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믿는 저를 믿었다.
드라마나 소설을 보면 드라마틱한 극복을 하곤 했다. 누군가를 통해 구원받아 앞으로 나아간다. 그를 향해 비추는 찬란한 스포트라이트. 금세 아무렇지 않아졌지. 현실은 그처럼 극적인 변화는 없었다. 다라역으로 향하는 길은 여전히 괴로웠다. 이성으로는 무서워할 것 없다고 하는데도 뇌리에 새겨진 공포가 그의 발을 잡아끌었다. 경적음이 울리고 기차가 움직일 땐 반사적으로 몸이 뻣뻣해져 생각을 멈춰버릴 것만 같았다. 그래도 도망가지 않았다. 피하지 않았다. 무리를 해서라도 남았다. 겨우 한 번, 하지만 틀림없는 한 걸음. 나아갔다.
공포는 전염성을 갖는다. 기억은 연속적이다. 연쇄의 고리처럼 6살의 악몽이 16년을 지나 다시금 그를 덮쳤다. 덮어둔 줄 알았던 상자의 뚜껑이 열리고 악몽으로 이끌었다. 마주해야 할 고통일까?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일까? 일주일을 꼬박 생각하고도 답은 명확히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저하고 머뭇거리고 혼란한 가운데 이대로 슬퍼하고 있기만은 싫어서 바라는 내일을 위해 걷길 택했다. 웃는 얼굴이 잘 어울린다 하지 않던가.
「결국은 당신도 마주해야 할 겁니다.」
무뚝뚝한 투가 퍽 상냥하게도 들렸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사랑으로 살고, 또 사람으로 산다. 고된 기억 위에 아름다운 추억을 덧씌워 그것이 언젠가 진정 아무렇지 않아지는 날이 올 때까지 느리더라도 조금씩, 조금씩 덜어내 보기로 했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언제나와 같은 이른 아침이었다. 무슨 꿈을 꾸었지? 오랜만에 몽나가 분홍색 연기에 감싸여 기분 좋은 파동을 보냈다. 어딘지 모르게 개운해 샤워를 하고 아침 산책을 다녀왔다. 다녀와서는 어제 다 먹지 못한 도시락을 먹었다. 오늘도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내일을 기대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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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그렇게 살아간다. 나도, 당신도.
일주일만에 극복하기까지 많은 일이 있었고
추천하는 노래는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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