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스터 : 디 이노센트 제로

60) 02.22. 상담 시간

천가유 2022. 4. 30. 01:10

더보기

 

철도도시락 사용

 

한숨도 못 잘 것만 같았던 하룻밤이었으나 피곤한 탓이었는지 에셸은 그대로 방에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그럼에도 몸은 정직해 눈을 떴을 땐 아침이었다. 바나링은 밤새 무얼 하고 왔는지 꼬물꼬물 얌전하게 에셸의 옆에서 자고 있었다. 그제야 에셸은 진화한 다크펫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렴풋이 눈대중으로 보아도 도감보다 팔이 더 길어 보였다. 욕망의 발현이었을까.

위키링은 에셸의 곁에 있었다. 늘 그랬듯. 이제 발치에 있는 대신 멋진 샹들리에를 흔들며 둥둥 떠 있었지만 변함없이 그 자리였다.

위키링. 바나링이 옆에 있어도 괜찮아요?”

어제는 그렇게 쫓아내더니 용케 방에 들어오게 해주었다 싶었다. 위키링은 동그랗게 빛나는 노란 눈을 내려 에셸을 응시해왔다. 더 이상 밀랍 시절의 다양한 표정을 보이는 건 무리였지만 신기하게도 에셸은 위키링이 하고 싶은 말을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위키링이 하고 싶은 말은……

고깝긴 하지만 괜찮다?”

자색의 불꽃이 느릿하게 피어오른다. 정답이라는 표시에 에셸은 웃고 말았다. 어떤 심경의 변화가 있던 건지는 지금부터 찬찬히 들어야지. 다른 포켓몬들까지 챙긴 에셸은 모두와 함께 호숫가로 나섰다. 서로간에 앙금을 해소하기 위해 피크닉 타임이었다.

지난번에 란타 씨랑 솔라리스 씨랑 말라카이 씨가 멋진 도시락을 싸주셨잖아요.”

알록달록한 계란말이에 위키링이 귀엽게 들어 있던 도시락이라든지 균형 있는 영양소를 챙겨 정석의 김밥베이컨 야채말이는 정말 맛있었다기차 내내 손에서 놓지 않았던 딸기라떼와, 목새마을에 도착해 루미와 함께 나가 나눠 먹은 색색의 마카롱까지 말이다. 그 마카롱 당시만 해도 어둠대신과 불켜미였는데. 새삼스러운 감회와 함께 에셸은 몽나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그 중 아직 진화하지 않는 포켓몬은 이제 냐미링 뿐이다.

서머링은 그 당시에 없기도 했고 이렇게 풍경이 예쁜 곳에 왔으니 모두와 같이 식사하고 싶었어요.”

철도 도시락을 개봉하고 키우미집에서 얻어온 포핀이나 포켓몬 푸드도 늘어놓는다. 한쪽에는 카레 도시락도 있었다. 매운맛, 쓴맛, 단맛, 신맛, 각자의 좋아하는 맛을 파악해 나눠주고 제 몫의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문다. 호숫가 근처에는 야생 포켓몬들도 제법 보였지만 세 마리 고스트 타입의 흉흉함을 보고 모두들 질려서 돌아가는 것 같았다. 에셸로서는 어째서? 라는 마음이었으나. 후와링은 물론이고 바나링이나 위키링도 평범하게 음식을 먹을까? 지난번에 말라카이와 나누었던 이야기가 스쳐 세 포켓몬을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셋 다 어디로 들어가는지바나링은 지퍼를 열고 집어넣었다알 수 없었으나 먹긴 하는 것 같았다.

저글링에게 카레 한 그릇을 리필해주고 서머링의 주머니에 들어간 포핀 부스러기를 털어주고, 포핀만 해치우고 다시 하늘 높이 날아오르는 후와링의 그늘 아래에서 에셸은 냐미링을 대동한 채 삼자대면을 열었다. 어째서 냐미링이냐 하면 그의 텔레파시가 포켓몬의 마음을 읽어내는 데 무척이나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 그럼. ……미리 말하지만 또 싸우면 안 돼요.”

안 싸워어. 쟤가 나보다 약하잖아.

바나링이 억울해서 울려고 한다. 에셸은 얼른 바나링을 품에 안았다. 도닥도닥 달래주자 바나링이 음침하게 알 수 없는 말을 흘렸다. 저주?

애기 때는 귀여웠는데 왜 저렇게 비뚤어졌대. 세탁을 잘못했나?

냐미링이 위키링을 향해 말넘심이라는 듯 눈을 꿈뻑인다. 위키링은 아랑 곳 하지 않았다. 이 바닥의 강짜 양아치다.

, 나는…… 에셸이 좋은 것뿐인데.

빨간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진다. 그 풍경에 에셸은 문득 언젠가의 꿈을 떠올렸다.

어둠대신 시절의 바나링이 에셸의 감정을 탐하다 기어코 약을 숨겨버려 잠을 설친 밤이었다. 꿈속은 무척이나 캄캄했다. 빛 한 점 없었다. 어둠을 두려워하진 않았으나 제법 낯선 풍경이었다. 그의 밤은 언제나 작은 불켜미가 곁에 있었으므로 칠흑 같은 어둠이 어색하기만 했다. 기차 사건 이후 종종 꾸던 미로 같은 악몽일까. 그러나 그렇다기에, 이 꿈은 그저 까맣기만 했다. 어둠이 끝나길 하염없이 걸었다. 그러다 드디어 어둠속에서 사물의 형체가 잡혔다. 반가움에 다가가자 피눈물을 흘리는 다크펫이 서있었다.

바나링일까? 아니면 수많은 다크펫 중 하나일까. , 뚝 눈물을 흘릴 때마다 발밑이 검붉게 번졌다. 고인 피눈물에서 보글보글 기포가 오르고 그 아래로 지옥문이 열린 것처럼 있는 양 저주와 원념이 웅덩이에서 새어 나왔다. 그 원념이 다시 그림자를 타고 포켓몬에게 스며들었다. 악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굴레였다. 꿈속에서 인형은 남이 뱉어낸 저주의 말을 양분삼아 몸을 부풀려갔다. 에셸이 달려가 포켓몬을 안아들자 포켓몬은──

감정의 발생이란 누구의 잘못일 수도 없다. 발생한 감정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것은 그렇게 만들어진 성질인지 몰랐다. 그렇다면 트레이너는 제 포켓몬을 감은 굴레를 어떻게 풀어주어야만 할까.

타이밍 좋게도 꿈을 꾼 다음날 다크펫나이트를 받았다. 그것은 아직 에셸의 가방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었다. 의문과 고민에 대한 답은 아직 유예를 바라고 있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건, 서럽다는 듯 퐁퐁 눈물을 흘리는 이 포켓몬이 꿈속의 다크펫과는 다르단 것이다.

위키링도 그걸 알아서 바나링이 오게 둔 거잖아요.”

글쎄에~

샹들리에가 한들한들 움직인다. 어째 모습이 자라고 나서도 철이 안 드는지. 시선에 위키링이 발끈했다. 내 모습이 어때서. 너어, 내가 이렇게 됐다고 날 소홀히 하면…… 냐미링이 위키링을 토닥토닥 달래는 동안 에셸은 바나링을 찬찬히 쓰다듬었다.

바나링. 아직도 제 약을 숨기고 제게서 나쁜 감정을 부추기고 싶어요?”

아니! 나 이제 그거 안 해. 그거 안 해도 좋아해!

정말요?”

뺨을 문질러주며 가만히 눈을 맞추자 바나링은 무구한 눈을 꿈뻑였다. 진화하면서 무엇인가 달라진 걸까? 어쩌면 진화에 필요한 에너지를 다 모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더는 그런 짓 하지 않는다고 하니 다행이었지만 에셸은 하나 더 짚고 넘어갔다.

저는 바나링이 행복하면 좋겠어요. 행복한 기분이 무엇인지 알죠?”

여기가 따뜻해지는 거예요. 볼록한 솜 부분을 콕 찌르며 설명하면 바나링은 얌전히 들었다. 바나링도 제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이어지는 질문에 바나링은 대답하기 어려워 보였다. 나는 에셸이 주는 감정이라면 뭐든 좋은데. 그게 나쁜 거여도, 아픈 거여도. 전부 다 담고 싶은데. 저주가 깃든 솜인형의 본능일까? 에셸은 말을 바꾸었다.

저는 바나링에게도 좋은 것만 주고 싶어요. 그러니까 절 위해서 좋은 것만 받아 가면 안 될까요?”

이 포켓몬은 굉장한 욕심꾸러기였다. 태어나면서부터 형제 많은 집의 막내와 같은 입장이라 그랬을까. 원하는 것도 바라는 것도 서러운 것도 많았다. 그걸 맏형이 못하게 하니 더욱 뿔이 날만도 했다. 하지만, 저를 만지는 따뜻한 손길에 바나링은 눈을 굴렸다.

알았어……. 에셸이 주는 거. 좋아해.

옳지, 착하다. 겨우 나온 대답에 에셸도 웃을 수 있었다. 이게 전부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앞으로도 바나링은 꾸준히 제 본성과 충돌하겠지. 그래도 지금 이 한 번의 경험이 그를 멈추게 하는 브레이크가 된다면 불안과 걱정을 안고도 나아가길 택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