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말라카이
알아가는 시간을 갖자.
그렇게 마음을 굳힌 에셸은 독니를 세우고 꼭 캠프 초창기로 돌아간 듯 모든 것을 거부할 것만 같은 말라카이에게 진정하라는 손짓을 했다.
그 이상 다가가지 않을 테니까 거기서 들어주세요.
일종의 휴전신청이었다.
당장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지 않았을 뿐 그는 여전히 네 말이라면 듣기 싫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선명한 거부에 자연히 한숨이 터지려 했으나 에셸은 이를 참았다. 그저 제 마음이 답답할 뿐이지만 여기서 한숨을 쉬어봤자 역효과일 것이 뻔했다. 대신 태연을 가장하여 차를 우렸다. 언젠가 그와 첫 대화를 나눌 적의 홍차였다.
“어느새 제법 익숙해진 것 같더라고요.”
홍차 마시는 일을 가리켰다. 아침에 일어나 스트레이트의 차를 찾는 네가 놀랍게도 자연스러워 새삼 우리가 함께한 시간이 어언 두 달임을 느꼈다. 그 사이 서로 전혀 다른 지역에서 나고 자라 서로 전혀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두 사람은 서로를 제법 알게 되었지. 기실, 그가 저에 대해 얼마나 알게 되었을지는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없으니 알지 못했으나 적어도 에셸은 생각보다 더 여러 가지 그를 알게 되었다.
이를 테면 그의 요리 실력은 바쁜 아버지를 대신해 터득한 것이라든지, 그 본인은 낳아준 모친을 더욱 닮았다든지, 후에 생긴 형제와도 사이가 나쁜 것 같지는 않다든지, 그럼에도 스킨십은 대단히 낯설어 한다든지. 집중을 하면 주변이 보이지 않는 외골수적인 면이나 주목을 받으면 도망가고 싶어 하는 숫기 없는 모습, 호의를 어색하게 받으며 목소리가 크게 날수록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강렬한 벽을 세운다는 지점이라든지, 종종 무언가에 스위치를 눌리곤 하는 부분이다.
또래에 비해 벌써 자신만의 철학이라도 터득한 듯 어른스럽게 구는 아이였으나 종종 사람이 돌변해버리는 스위치가 몇 개인가 있었다. 이를 테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한없이 입이 무거워지는 소중한 소꿉친구에 대한 것. 그 아이에게 직접 연락을 시도하지 않는 건 무엇이 두렵기 때문일까. 또 하나는 그를 걱정하고 보호하려 할 때다.
「나는 내 스스로를 잘 돌보고 있거든?」
뾰족하게 튀어나온 말에 에셸은 고개를 젓고만 싶었다. 그러나 주변에서 아무리 말한다 한들 그 스스로가 받아들이지 않는 한 소용없는 것이었다. 그에게 느릿느릿 잔을 밀어 건네고 자신의 잔을 들며 에셸은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10살이면 여행을 떠날 나이죠. 하지만…… 저는 그게, 더는 보호받아야 할 아이가 아니게 되었다는 뜻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건 고작해야 10살 아이가 혼자 여행해도 괜찮을 정도로, 당신을 둘러싼 사회가 안전하다는 의미예요.”
하지만 완벽하게 안전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꾸준히 배운다. 도움을 청하는 법을. 타인에게 기대고 손 내미는 법을. 그러나 눈앞의 아이는 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바로 전날에도 베이스캠프를 벗어나 위험할 뻔했다. 비단 사람만을 가리켜 하는 말이 아니다. 마을에서 마을 사이, 심지어는 사람의 손도 타지 않은 습지에 덩그러니 홀로 남는 건 정말이지 위험한 일이었다.
진짜 문제는 그 다음에 있었다. 말라카이는 자신이 위험에 처했을 때 걱정 받는다는 사실을 마치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굴었다. 네가 왜 걱정해? 혹은 내가 뭔데 걱정해. 남의 걱정이라곤 받아본 적 없는 것만 같은 태도는 다른 무엇보다도 에셸을 속상하게 했다. 반대로 왜 걱정하면 안 되는 걸까?
“아버지가 사과하는 게 싫었어요? 챙겨주지 않아도 혼자서 괜찮다고 보여주고 싶었나요?”
어쩌면 그는 또 다시 말할지도 몰랐다. 네가 뭘 안다고. 하지만 아는 척 넘겨짚고 싶었다. 그의 태도에서 읽었다.
“힘들 땐 도망쳐도 된다고, 상처가 낫는 데는 저마다 시간이 필요하다고. 사람에게도 상성이 있다는 것까지 잘 알면서 왜 그걸 스스로에겐 적용하지 않아요? 솔직하게 아파하고 지금 겪는 내 기분이 무엇인지, 내 감정이 어떤 건지 마주하려 하지 않나요.”
그게 당신이 힘든 상황에서 도망치는 방법인가요? 그렇다면…… 그건 스스로를 잘 돌보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데. 또 화를 낼까? 잠시 숨을 들이마시며 반응을 살폈다. 그에게서 나올 답을 두려워하면서도 에셸은 그럼에도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은 이미 타고난 상성을 노력으로 한 번 극복해내는 경험을 해봤잖아요. 그만큼 당신이 강하기에 하는 말이에요. 때론 도망가도 괜찮지만 언제까지 도망칠 순 없어요. 도망치는 건 우리에게 유예를 벌어줄 수 있지만 그것이 상처를 낫게 하진 않아요. 그렇다면 저는요.”
북새를 앞에 두고 상성차 앞에서 떨던 그를 기억한다. 그 떨림을 악으로 근성으로 이겨내고 치밀하게 기점을 세워 역전해내던 순간 또한 뚜렷이 기억했다. 그렇지, 그가 지켜주어야만 할 어린아이가 아님을 알았다. 동시에 그렇기에, 그에겐 걱정 받을 권리 또한 있었다.
“저는 사람이 상처를 마주해야만 하는 순간에, 내 기분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순간에, ……아프다고 털어놓는 순간에 혼자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그게 저라도, 당신이라도. 마땅히 당연한 일이었으면 바랐다.
기껏 잔을 채워 놓고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마실 틈이 없었다고 해야 할까. 사실을 말하자면 에셸은 이 말을 하기까지 꽤 많이 떨었다. 이런 말을 하는 저를 그가 미워하지 않았으면 했다. 그러나 이 말만은 꼭 하고 넘어가고 싶었다.
“걱정하는 건 당신이 약해서가 아니에요. 당신이 소중할 뿐이죠.”
아마 당신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당신이 지켜주어야만 하는 어린아이여서만 아니라, 단지 당신을 사랑해서 또 소중해서 지켜주고 싶었을 거예요. ──그 마음을 정말 받아주지 않을 건가요?
말랑이도 우리애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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