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주차 리포트::용서
너무 많은 일이 지나갔다. 피곤함에 눈을 꾹꾹 누르면서도 하루 동안 벌어진 일을 정리하기 위해 에셸은 늦은 밤, 태블릿PC를 열었다. 서두는 부모님에게 보내는 안부였다.
「우선, 저는 무사하니까 모쪼록 걱정하지 마시라는 말씀부터 전할게요. 둔치시티까지 가깝기도 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드릴 테니까요. 이쪽은 상황이 어수선해서 찾아오시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쪽에선 경찰청의 움직임은 없던가요?」
문장을 가다듬어 둔치시티의 상황을 살피는 연락을 마치고 겨우 한숨을 돌린다. 그동안 포켓몬들도 깨어서 그를 기다려주고 있었다. 붕대가 감긴 손을 뻗자 바나링이 제일 먼저 매달려 왔다. 볼에 가만히 있던 시간이 어지간히 답답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다행이었다. 여정이 힘들 것을 생각해 위키링을 제외하고 모두 볼에 넣어두었던 덕에 폐발전소에서의 일을 바나링은 까마득하게 모르는 채였다.
만약 그 자리에 이 아이가 있었더라면, 그 광경을 모두 보았더라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애교스럽게 뺨을 부벼오는 다크펫의 이마에 가볍게 입 맞추며 에셸은 나쁜 생각을 지우기 위해 애썼다. 바나링은 제 감정에 유난히 예민하니 지금은 그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게 옳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생각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도리어 의식하자 자꾸만 풍경이 파노라마쳤다. 코가 마비될 정도로 지독하던 약품 냄새,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허름하고 낡은 건물 안에서 도리어 독기라도 머금은 듯 생기 넘치던 연구실 풍경, 어떠한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고 학구열이라고 말하던 박사와 그의 아버지.
어린 나이에 대단한 성취를 이루었다고 존경심까지도 갖던 박사는 막상 한 꺼풀 벗겨내자 잘못 자란 가지만 같았다. 속이 곪아서 물컹거리는 줄기를 닮아 있었다. 자신이 어디가 휘어졌고 어디가 멍들었는지조차 모르는 박사와 그런 딸을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보던 아버지. ……떠올리자 재차 속이 안 좋아졌다.
「여러분도 강한 포켓몬 좋아하시잖아요? 포켓몬 체육관에 도전해 어떤 상대라도 때려눕힐 수 있는 강하고 완전한 포켓몬! 그런 거, 원치 않으세요?」
「이해할 수 없네요. 그렇게 포켓몬들로 과거에 상처를 입고, 도전의 벽 앞에서 고민하거나 좌절하면서…… 왜 이런 기회를 쥐지 않으시는 거죠?」
배지 케이스 표면을 쓰다듬는다. 윙빗 배지가 반짝였다. 이 날의 도전이 에셸에게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박사는 앞으로도 알지 못할 테지. 어쩐지 박사가 살비마을까지 따라오지 않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의 목적지가 샛별마을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로서는 견딜 수 없던 게 아닐까. 올바른 애정과 관심 속에서 태어나는 생명을 보는 일이. 한 번이라도 살비에서 사는 포켓몬들을 보았더라면 이런 끔찍한 짓을 벌이진 못했을 텐데.
검은 몬스터볼에서 튀어나왔던 몬스터의 모습을 다시 떠올린다. 지느러미를 닮은 꼬리, 포유류의 뒷발과 곤충을 닮은 앞발. 투구에 가려진 얼굴 안쪽은 어떤 빛이었을까. 그리고 박사는 태연히 말했지. 『시제품』이라고. 곱씹을수록 끔찍한 생각만 덮쳤다. 그 아이의 탄생은 마땅히 주어져야할 애정과 관심 대신 인간의 그릇된 욕망으로 얼룩져 있었다. 미안하고 속상하고, 또 죄스럽기까지 하다. 어째서 그들은 이토록 끔찍하고 부끄러운 짓을 저지른 걸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상념을 일깨운 건 품에서 버둥거리는 바나링이었다. 흠칫 놀라 놓아주자 바나링의 눈이 또 붉어져 있었다. 지퍼의 틈으로 이시싯, 시꺼먼 웃음이 샌다. 제 감정을 먹어치워도 되는 것인지 허락이라도 구하듯 유순히 굴어오는 아이에게 에셸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저는 당신의 안을 저주 같은 것으로 채우고 싶지 않아요. 바나링. 한 번만 더 참아주세요.
커다랗게 눈을 끔뻑이던 포켓몬은 알았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착한 아이예요. 바나링을 쓰다듬는 손끝이 아직도 미세하게 떨렸다. 정말로 용서받지 못할 짓이다. 그 포켓몬의 안에는 얼마나 깊은 원념과 저주가 담겨 있을까. 우리는 그 아이를 어떻게 책임져야만 하는 걸까.
“그럼에도 태어나고 만 생명을 축복해야 하진 않을까요.”
피곤한 눈가를 꾹꾹 누른다. 지금은 시간이 너무 늦었지만, 다음날이 되면 다른 이들과도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어볼까. 미래를 향한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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