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주노
때로는 사진으로 남기지 않아도 망막에 새겨지는 풍경이 있었다. 아름다운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 위로가 된다. 누림마을에서 시작해 혜성을 지나고 다라를 거쳐 살비에 이를 때까지 얼마나 많은 풍경을 눈에 담고 기억했을까. 그때마다 두 사람분의 발자국이 이어졌다. 꼭 지금처럼. 그래서일까. 없으면 서운할 것만 같아 약속을 한 것도 아니면서 그를 찾아갔다. 나름의 어리광이라는 걸까.
「에스코트는, 항상…… 해드릴 테니까.」
저한테 연습하라던 말이 파도를 따라 밀려들었다. 차박차박 물길을 밟으며 그 때 하지 못한 답을 고민했다. 그러나 생각나는 거라곤── 집사복 잘 어울렸지. 예쁘게 넘긴 머리에 모노클까지. 제법 태가 났었는데. 홍차도 허브티만큼 맛있었어. 마담들에게 인기가 많아 보이던데. 결국 마지막에는 무어라 답하기 전에 슬금슬금 사라져버리던 뒷모습에서 생각이 멈춘다. 어쩌면 다행이었다. 그가 대답을 기다렸다면 도통 무슨 답이 나왔을지 지금도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아마, 보인다면 행동으로. 여전히 어렵기만 했지만 그와 이런 시간을 만들 수 있다면 부려도 좋을까.
발가락 사이를 간질이다 빠져나가는 파도의 감촉이 장난스러운 아이의 손을 떠올리게 했다. 발등을 스치고 잡을 듯 말 듯 건드리고는 재빨리 빠져나간다. 지나간 자리로 하얀 기포가 뽀글뽀글 터지다 모두 걷힐 즈음 다시 파도가 밀려왔다. 웃음소리가 파도소리 사이로 섞였다. 해 진 바닷가의 파도는 조금 차가운 것도 같았지만 잡은 손이 따뜻한 덕일까 그저 좋기만 했다. 처음에는 손잡는 걸 어색하게 여겼던 것 같은데 쭈뼛거리고 힘줄 줄 몰라 그저 올려놓기만 하던 손이 지금은 부쩍 자연스럽게 구부리고 감싸온다. 변화는 느리지만 분명했고 사소한 하나하나가 애틋하기도 했다.
한숨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자 그가 웃고 있었다. 들려오는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편안했다.
“……나중에도, 에셸 씨랑 같이… 올, 수…… 있을까요?”
달빛이 그의 머리 위로 산산이 내리는 덕일까. 유난히 희게 비쳤다. 그가 먼저 건넨 제안이 기쁘다, 고 생각함과 동시에 문득 스치고 지나간 발상에 손을 당겨 그에게 바다를 등지고 서게 했다. 뒤로 펼쳐지는 새까만 바다와 새까만 하늘,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하얀 달빛의 문 로드. 머쓱하던 표정이 그대로 놀란 채 굳어지는 걸 보면서도 가만히 두 손을 나란히 잡고 그만을 보았다. 이 풍경 또한 망막에 새겨져 깊이 남겠지.
“달빛이 주노 씨만 조명하는 것 같아서 조금, 보고 싶었어요.”
정작 그는 볼 수 없는 그림을 저만이 눈에 담고는 얄궂게 웃는다.
“로맨틱하다고 느끼는 순간에 늘 주노 씨가 함께 있어 주네요.”
답은 조금 늦게 나왔으나 간극이 그를 불안하게 하진 않았을 거라 내심으로 생각했다. 혹은 믿었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혹시나 소리가 파도에 묻힐까 반달로 접힌 눈이 먼저 답을 전했다.
“저도 주노 씨와 또 오고 싶어요.”
아직은 미래를 모르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알았더라면 그저 한 번 더 전할 뿐이었겠지. 평온한 바다를 지나 가파른 산맥을 넘어, 달조차 보이지 않던 것 같은 캄캄한 새벽을 거치고 난 그 뒤에 맞이할 아침을 희망하기 위해서.
『다음에 또 살비에 갈까요, 같이. 오늘의 나쁜 추억을 이곳 바다의 색으로 덧칠하기 위해서라도.』
앤오님 그림도 좋아서 은근슬쩍 같이 올려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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