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어야 하나? 굉장히 희망이 넘치는 발상이야. 만일 내일 세계가 멸망하지 않는다면 당신이 심은 사과나무는 싹이 날 테니까. 하지만 사과를 심지 않은 사람은? 아무것도 얻을 수 없겠지.
나는? 아하하, 나라면 펭귄을 보러 갈까. 서쪽으로, 또 서쪽으로. 해가 지지 않는 곳을 향해 끊임없이 걷는 거야. 그러다 운이 좋으면 내일이 오지 않을 수도 있고 반대로 가다가 펭귄을 만나기도 전에 지쳐서 쓰러져 죽을 수도 있겠네. 어쩌면 이 별이 네모났다는 증거를 눈으로 볼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걷고 또 걷고, 세계가 끝나든 내가 끝나든 결말을 볼 때까지 걸어야지.
정말 펭귄을 보러 가는 게 맞느냐고? 글쎄~, 어떨 것 같아?
* *
잠에서 깬다. 바깥은 어슴푸레하게 동이 트는 시각. 몸을 일으키자 몸 안에서 천천히, 쌓인 모래가 흘러내리는 감각을 느꼈다. 사르륵, 사르륵.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발치로 노란 모래알들이 쌓인다. 혹은 밤새 머리 위에 쌓인 눈이 녹아내리는 것 같기도 하다. 어깨를 적시는 눈을 툭툭 털어내고 나면 잠들기 전보다 몸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은 기분에 이러다 정말 날아버리는 건 아닐까 혼자 고개를 갸우뚱한다. 펭귄은 하늘을 날 수 있던가? 아, 물론 난 펭귄이 아니지만.
머리맡에 둔 손때 묻은 인형을 한 번 쓰다듬으며 일어난 에슬리는 느긋하게 나갈 채비를 하였다. 어깨 위로 올라오는 짧은 머리카락에 빗질을 하고 거울을 보며 입술을 칠한다. 제복을 목까지 채워 올리고 허리에는 벨트를 당겨 메고. 허벅지 위로 올라오는 짧은 바지, 다리 갑주까지 착용하고 나면 마지막은 기사단의 문장을 단 망토 뿐. 처음에는 이 거추장스러운 의복을 매일같이 입어야 하는 게 번거로웠지만 지금은 퍽 익숙해져, 더 이상 준기사도 아니고 눈치 봐야 할 아델하이가 아니게 되었음에도 격식을 갖추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았다간 그리운 곳에 왔다고 금세 긴장을 풀어버릴 테니.
그렇지. 그리운 곳으로 돌아왔다. 제 옆자리에는 마치 5년의 시간을 단숨에 메워버리듯 새근새근한 얼굴로 자는 룸메이트가 있었다. 5년 전에 비해 한껏 자란 얼굴이 아니었다면 시간이 되돌아간 줄 착각을 할 뻔했다. 그리고 또 그리운 얼굴들을 가득 만났지. 시간은 차곡차곡, 그녀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쌓인 시간의 더미 속에서 잃어버린 것은 무엇일까. 스러져 사라진 것은?
‘아리아…….’
어머니가 죽었다. 어머니가 죽었다. 어머니가 죽었다.
잃어버린 것일까.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것일까. 욕심내선 안 될 것이었을까.
정말 어머니였나? 무덤조차 없었다. 가져올 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로 존재했던 것인지 의문일 만큼.
「그 머리색, 네 어머니와 똑같아서……」
바로 알아봤어. ──그래서?
%*&#가 죽었다. 바스비쉬가 죽었다. 아리아가 죽었다.
어머니가 죽었어? 그녀가 죽었어? 그녀는 어머니였나?
에슬리 챠콜은 어머니가 없다. 지극히 그 뿐인 사실.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아버지가 죽었다. 아버지가 죽었다. 아버지가 죽었, ……아버지가 죽었나? 죽은 사람은 아버지였나? 그가 죽었나? 그는 죽지 않았어. 그녀도 아직 죽지 않았지.
이 또한 지극히 그 뿐인 사실.
나의 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버지와 어머니와 어머니와 어머니와 나의, 나, 의, 나──. ……켈룩. 금세 또 갑갑해져 목가를 느슨하게 한다. 나는 괜찮아.
시간은 그녀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변함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사르륵, 사르륵. 퇴적하거나 깎이거나, S자의 곡선으로 흘러가는 시간 위에서 이제껏 그녀는 떠밀리듯 혹은 제 발로 달리듯 앞으로, 앞으로 유영하였다. 그러다 맞이한 급류, 그리고 탁류. 모래와 자갈과 돌과 바위와 빠르게 몰아치는 물살에 휘말려 에슬리 챠콜은 더욱 빠르게, 앞으로, 다시 앞으로 멈출 줄 모르고 나아갔다.
어차피 그녀는 뿌리를 모르는 꽃, 뿌리내릴 줄 모르는 돌, 정체되는 것은 어울리지 않아. 계속 달려야지. 멈춰선 안 돼. 구르고 달려서 맞이하는 봄, 그 다음의 봄, 그 다음의 봄, 그 다음의 봄, 그 다음의…… 거듭되는 겨울을 넘어서고 또 넘어서……,
가벼운 한기를 느끼고 정신을 차린다. 어쩐지 목덜미가 서늘하여 짧아진 머리카락 아래로 깃을 세우고 인형을 껴안았다. 꾸욱 누르자 뱃속에 가득 찬 모래가 바스락 소리를 낸다. 네가 내 누름돌이야.
새하얀 눈, 노란 모래알, 천천히 흘러내리는 것, 녹아 쥘 수 없는 것, 깨진 그릇, 금이 간 틈, 뿌리가 잘린 꽃, 범람하는 물줄기, 가속하는 것은───
【계속 달려야지. 봄을 지나 여름을 거쳐,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맞이하여 마침내 당신이 ?】
이야기는 새로운 막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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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의 서막-2부의 재막.
1부와 달리 2부는 숨기고 있는 얘기가 많아지면서 상징적인 부분에 신경을 많이 썼다. 맨 마지막의 나열들 좋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