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지막한 목소리가 당신의 말을 따라서 목 안쪽을 울린다. 수치, 부끄러움, 자존심, 당신이 언제나 중요시 여겨오던 것. 그럼에도 당신이 다 망한 집에 나를 초대해주었기에 아직 괜찮은 줄로만 알았다. 아니었던 걸까. 혹은 그 뒤로 무언가 더 안 좋아졌던 걸까. 어쨌든 좋다. 모른 척 하려는 이유는 알았어. 하지만,
손가락으로 천천히 짧은 머리카락을 꼬다가 내린다. 머리카락의 감촉이 남은 검지, 그 다음으로 중지를 차례로 펴며 숫자를 헤아린다.
“이제 마지막 질문인가.”
질문일까. 질문이 아닐지도 모르지. 그래도 괜찮지? 난 언제나 당신의 말을 듣지 않는 사고뭉치였잖아. 5년 사이 퍽 달라진 표정으로 눈웃음을 치며 세 번째를 꺼낸다.
“나를 뭐라고 부를 거야?”
아주 중요한 거야. 잘 생각해야 해. 남에게 줘버린 이름 따위 이제 관심 없고, 나리 소리는 듣기 싫어.
전과 똑같은 관계로 돌아가자는 말은 안 해. 졸업이라고 했는걸. 당신도 나도 그 사이 많이 달라져버렸지. 5년 전과 같은 공간을 밟고 있다고 5년 전과 같은 행동을 하진 않는 것처럼, 당신이 나를 알고 내가 당신을 안다고 해서 그 때의 그 관계는 더 이상 부를 수 없다는 거지. 거기까진 이해했어.
그런데,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건 딱 거기까지야.
초승달처럼 휜 눈 꼬리 위로 눈썹을 치켜뜬다.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여실히 드러내는 눈을 하고 여전히 낯은 웃고 있다.
“앞으로도 모르는 척 하면서 나리, 나리 부를 거야? 이미 만나버렸고, 당신을 봐버렸는데. 모르는 척이 아니란 소리는 이제 와서 안 먹혀.”
질문일까. 역시 질문이 아닌 것 같아. 그보다는 협박일까. 나는 지금 화가 나 있어. 입술을 한껏 더 당긴다. 허세를 부리고 싶었다거나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거나 좋아, 다 좋아. 하지만 언제까지? 먼저 말을 꺼낸 건 당신이야. 들어달라고 한 것도 당신이고. 그렇다면 도망치는 건 그만해.
“난 당신을 보고 있어.”
눈을 들어 당신을 마주한다. 당신이 남겨둔 여지, 그 일말의 선 위에 발을 올렸다. 경계의 이쪽과 저쪽에 당신에게 소중한 것을 올리고 무게를 잰다. 과연 기울어지는 건 어느 쪽일까? 어쩌면 아까의 의문에 대한 답이 여기 있을지도 모르겠네. 가볍게 떨리는 손으로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저라고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지 알 턱이 없다. 다만 제 나름대로의 도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