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주노
「이런 걸 가져왔다고 해서 앞으로 직접 물어보지 말라는 뜻은 아니에요? 꼭 알아둬야 해요.」
그냥 정리된 걸로 한 번 보고 싶을 뿐이니까요. 그리고 재밌어 보이지 않나요? 말하며 에셸이 꺼내어든 건 『터치&스킨십표』라는 것이었다. 이게 말이죠. 연인들 사이에서 한 번씩 해본다고 해요, 막 사귀기 시작할 때. 막 사귀기 시작할 때에 적용하기에 두 사람의 기간은 적지 않았으나─이런 말을 하면 제 팔불출 연인은 ‘저, 저는 아직도 오늘 막 사귀기 시작한 것 같은데…….’ 같은 말을 해오기 일쑤다─아직 해보지 않았다면 지금이라도 절대 늦지 않았으리라.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요즘 세대는 이런 걸 체크하면서~’ 같은 말이 오가던 종이를 우연히 얻은 에셸은 조금 신이 난 표정으로 연인의 집을 찾았다.
“에, 에셸은 아직 체크 안 한 거죠…?”
“네에. 막상 종이를 보니까 감이 조금 안 와서. 주노가 한 걸 보면 더 알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자! 주노가 먼저. 귀엽게 꾸며진 표를 내밀자 연인에게서 언뜻 그거 조금 치사해요. 같은 표정이 스친 것도 같았다. 슬그머니 모른 척 웃은 에셸은 펜을 쥐는 그를 두고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하는 동안 밀크티를 끓여올게요.”
찬장 안에서 밀크팬을 꺼내고 냉장고의 우유를 찾고 설탕은 위쪽 두 번째 칸, 일련의 행동이 자기 집처럼 익숙하다. 가스레인지에 불을 켜자 창으로 금세 하얀 김이 서렸다.
바깥은 꽤 추운 모양이었다. 수확을 마친 누림의 들판은 겨울을 나기 위해 텅 비어 있었다. 저 위로 이제 소복하게 눈이 쌓일까? 둔치는 첫 눈 소식이 바로 내일이라고 했다. 내일은 우산을 챙겨야지. 라이지방의 제일 북쪽인 겨루마을은 일찌감치 눈에 덮여가고 있었다. 살비까지 눈이 내리려면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까. 그러면 눈 깜짝할 새 여행을 시작한지 1주년이 된다.
벌써 1주년? 놀라울 뿐이다. 그와 만나고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1년이라니. 그 사이 두 사람은 수많은 익숙지 않은 것들이 익숙해졌고 서툰 것이 능숙해졌다. 꺼리던 걸 꺼리지 않게 되었고 좋아하던 게 더 좋아졌다. 그만큼 서로에 대해서도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뭐라고 적는지 궁금한 건 순전 연인을 향한 애정과 관심의 연장이었다.
“주노 것은 레이디 그레이에 아쌈, 정직한 베이직으로.”
제 몫은 진저 밀크티. 추워지는 계절에 딱이다. 추억을 되짚어 블렌딩한 티백을 끓인다. 보글보글 소리가 나기 시작하면 각설탕을 굴려 넣고 부드럽게 저었다. 고소하고 달콤한 향이 부엌 창문에 한 겹 더 김을 서리고 나면 머그컵 두 잔을 들고 돌아온다.
“다 했어요?”
“네, 넷. 어떻게든…….”
“그럼 이제 제 차례네요.”
팔을 걷어붙이고 그의 옆자리에 앉아 종이를 진지하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어쩐 일인지 옆자리의 그가 조금 더워진 것도 같았는데……. 이유는 종이를 읽다 보니 알게 되었다. 고지식하고 성실하게도 하나하나 상세하게 달린 코멘트다. 읽어나가던 손이 무심결에 그의 머리로 향한다. 막 밀크티를 마시던 연인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솔직하고 수줍게 배시시 웃어 왔다. 그제야 또 아차했다.
‘……자꾸 손부터 먼저 뻗는 습관도, 고쳐야 할 것 같은데.’
그의 반응이 부추기는 건 아닐까? 남 몰래 책임을 전가하며 그가 성실하게 작성한 만큼 에셸도 하나하나 체크해나갔다. 그러나 앞부분이야 그럭저럭 체크할 수 있었지만 중반부에서 난관이 닥쳤다.
“으음~…….”
「저는, 가족들이 원체 덥석덥석 붙잡고 쓰다듬고 해서…… 익숙한 편인데.」
에셸은요? 물어온다면 〈거의 익숙하지 않음〉이라고 답할 수 있겠다. 애정의 방법이 다를 뿐, 경중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으나 아무래도 이 집은 스킨십이 많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아이에게 너무 어른 손이 타면 안 된다던 가풍이 굳어버린 것인데 덕분에 메이크업을 위해 얼굴 터치가 익숙한 걸 제외하고 다른 신체 부위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정말 익숙할 리 없었다.
익숙할 리 없었으나 그에게는 싫단 기분을 느낀 적도 없었다.
‘싫어라고 체크할 게 없는데.’
특별히 누가 건드린다고 해서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으나 이왕 연인의 손길이면 별 생각 없던 것도 좋아지고 만다. 제 귀는 아무 생각 없으면서 그의 귀를 만지는 걸 좋아하는 것도 그랬다. 난관은 앞서 말한 이야기의 연장이었다. 평범한 줄로만 알았던 표가 아래로 내려가자 조금 깜짝 놀랄만한 것이 되었다.
그러니까, 즉── 가슴이니 허리니 배이니, 심지어 골반이나 엉덩이, 허벅지까지? 자기 손도 잘 닿지 않는 건 물론이고 남의 손이 닿는다면 주노뿐인데, 그 주노가 이런 곳을 만진다는 건 그러니까, 그러니까아…….
“그러니까, 다시 말해…….”
짙은 스킨십? 누구 들으라는 것인지 모를 변명조의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이제 서야 알아차린다. 애당초, 연인끼리의 스킨십 한도선이라는 게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가슴을 터치하는 연인, 배를 터치하는 연인, 거기서 더 내려가면…… 어머나, 세상에! 하물며 보편의 기준을 세웠을 때 주노는 그보다 더 조심스럽고 세심하게 에셸을 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다시 말해 어떤 목적성 없이 부주의하게─이를 테면 에셸이 그러듯이─발끝부터 만져오지 않는단 뜻이다.
발목을 감싸 쥐고, 종아리에 입 맞추며 정염 가득한 시선을 우러러보듯 위로 향하던 연인의 표정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당연한 수순처럼 낯이 금세 화끈거렸다. 이런 상상을 하는 스스로가 파렴치한 것도 같았지만 정말이지 그게 아니고서야! 무슨 이유로 주노가 제 엉덩이를 건드린단 말이에요.
언제나 늦은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 대책 없는 에셸 달링, 깨닫고 난 뒤에야 대책이 필요했다. 뭐라고 적어야 할까. 무슨 답이 있을까. 톡톡톡톡, 체크하는 대신 펜 끝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어려워 죽겠단 표정을 지었다. 자승자박이다. 먼저 숙제를 마친 연인은 곁에서 기대 어린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주노가 써준 건 아주아주 설렜는데요. 셸링 포인트가 굉장히 상승했는데요. 그런데, 저는, 그으…….
다음은 가벼운 입맞춤이다. 입맞춤? 키스? 포옹? 그게요. 하나같이 당신에게라면 다 좋을 뿐인데. 에잇. 모르겠다. 눈을 질끈 감고 토토톳, 체크해버린 에셸은 그리고는 적반하장처럼 그에게서 등을 돌린 채 반쯤 식은 밀크티만 훌쩍 마셨다. 그 머릿속으로는 에셸 달링의 파렴치 포인트가 점수를 매기고 있었다.
아니 그치만 체크리스트 하다 보니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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