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주노
시간여행테마합작 참여글
윅스: wor1dr3cordn0.wixsite.com/time-attack
Mayday, Darling Time!
『Dear. 시간을 다루는 모든 직종의 여러분에게.
제발! 부디! 부탁컨대! 여러분의 일에 과한 자부심과 지나친 책임감을 가지고 신.중.하게 움직여주시기 바랍니다.
접촉 사고도 한두 번이지, 전우주차원관리위원회는 언제나 인력 부족이라고요~!』
그러나 이것도 어디까지나 상대가 말이 통할 때의 이야기다. 아직 어린 캐이시(※포켓몬스터 시리즈의 초능력포켓몬)에게 순간이동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위험하다는 말은 숙련된 브리더라 해도 가르치기 어려웠다. 하물며 겨우 수습 딱지를 뗀 1년차 브리더라면 더욱 어렵다. 그에게 비록 세상만사에 통달한 듯한 후딘이 파트너로 있다 해도 말이다.
덕분에 갓 알에서 깨어난 어린 캐이시를 돌보게 된 살비마을 브리더 주노는 최근 캐이시가 어디 위험한 곳으로 가지 않도록 눈을 떼지 못하며 동분서주 바빴다. 정작 포켓몬은 브리더의 애타는 마음을 까맣게 모르는 채 술래잡기를 하듯 즐거워 보였는데, 그래도 집의 개념은 있는지 아주 멀리 가버리지 않는 것 하나만은 다행이었다.
“헉, 헉. 자, 잡았다~……!”
오늘도 퇴근시간을 아슬아슬하게 남기고 캐이시 포획에 성공했다. 어깨로 숨을 몰아쉬며 청년은 간신히 땀을 닦았다. 이제 이 아이만 브리더 하우스에 돌려놓으면 오늘의 업무는 종료다.
장난꾸러기 포켓몬은 청년이 헉헉대는 게 즐거워서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의 걱정일랑 까맣게 몰랐다. 그래도 말해야지 어쩌겠어. 샐쭉 휜 여우 눈과 얼굴을 맞댄 청년은 이미 몇 번이나 거듭하였으나 또 한 번 순간이동의 위험성에 대해 입이 닳도록 설명했다.
우연이란 바로 이런 순간에 발생한다. 청년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한 번만 더 술래잡기하자고 캐이시가 순간이동을 사용한 타이밍에 전우주적 초침, 분침, 시침이 경이롭게도 일렬로 맞춰졌다든지 어딘가의 먼 곳에서 초신성 폭발이 발생했다든지 사건의 지평선에 지진이라도 났다든지. 사실은 그런 것 하나 없이도 발치에 채인 돌멩이를 찼을 뿐인데 나비효과처럼 시간의 폭풍에 휘말려버리기도 하는 그 모든 일들을 ‘우연히’라는 한 마디로 얼버무려 설명할 수 있다.
그러니까 즉 캐이시가 마지막으로 딱 한 번 더 장난을 치려고 할 때에 아주 우연히, 평소라면 불가능할 전우주적 규모의 순간이동이 펼쳐졌다는 뜻이다.
"어? 어어? 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엇~~~~!?!?"
여러분은 알고 있는가? ‘순간이동’이란 공간을 순식간에 오가는 것만이 아니다. 순간이란 다시 말해 찰나刹那. 그 자리에 선 채로 시간을 이동하는 것도 이론상으론 가능하단 뜻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사람 대회가 열린다면 나한테도 자격이 있지 않을까? 생각은 하되 정작 대회에 나가지는 못할 지극히 평범하고 소시민적인 청년은 그리하여 다른 사람은 평생에 1번도 겪지 않는다는 시간여행에 휘말리고 만다. 그의 퇴근만을 기다리고 있는 연인에게도 청천날벼락 같은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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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을 바꿔 19세기의 끝자락 중 어느 봄, 신분제라는 것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한 양옥집의 정원에는 오늘도 차향이 감돌고 있었다.
봄은 정원사가 가장 바쁜 계절이다. 한창 자라나기 시작한 싹을 골라내 남길 것은 남기고 자를 것은 잘라 꽃들에게 갈 영양분을 고르게 하였고 동시다발적으로 자라나는 꽃들이 집주인을 위해 순서를 지키도록 성장을 조절하기도 했다.
정원사의 숨은 노고 덕분에 정원은 뿌리부터 가지까지 형형색색 다채로운 꽃들이 조화를 이루었다. 뿐만 아니라 정원 한가운데에는 머리 위로 널따란 차양막이, 아래로는 한땀 한땀 아름답게 수놓인 테이블보와 그 위로 화병과 트레이, 찻주전자 등이 이곳의 풍경감을 해치는 일 없이 완벽히 녹아들어 멀리서 조경하는 것만으로 카미유 피사로나 클로드 모네의 그림이 남부럽지 않았다.
물론 이런 것들이 계절마다 날씨마다 맞춰 나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뒤에서 바삐 움직이는지 찻잔을 들어 올리는 이가 알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티타임의 주인인 아가씨의 뒤로는 높다란 담이 길게 이어졌다. 이 근방에서 제일가는 대지주의 저택다웠다.
매년 남부 밀 생산량의 50%를 책임진다 해도 과언이 아닌 대지주 가문은 정작 그 부유함에 비해 거만하지 않아 마을의 신뢰를 톡톡히 사고 있었다. 한편에서는 여전히 자신들이 귀족인 줄 안다고 고고함을 비웃기도 하였으나 명목상의 신분제도가 철폐되고도 그들의 땅에서 농사지어야 하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도 가문의 고명딸에 대한 관심과 애정도 높았는데 그 집 아가씨가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예쁘다더라 소문은 무성한데반해 높다란 담을 넘어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어 마을 사람들에게는 때로 상상 속 인물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보통이라면 벌써 시집을 가 아이도 한둘쯤 있을 나이인데 여즉 혼처가 정해지지 않은 것도 그네들의 입을 오르내리는 화제 중 하나였다. 최근에도 바로 같은 이야기로 한창 입방아 중이었는데 경사스럽게도 드디어 아가씨의 혼처가 정해졌다는 이야기다.
상대는 막 전쟁터에서 돌아온 어느 상회의 차남이라고 했다. 듣자하니 조부모님 때부터 이어져오던 약속이라나. 이제 보니 아가씨가 혼인을 미루던 게 다 그 도련님을 기다리느라 그런 거였네! 혹여나 말 못 할 흠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쑥덕대던 마을 사람들은 아이고 잘 됐네, 잘 됐어. 걱정을 빙자한 참견을 쏙 삼키고 곧 있을 결혼식에서 어떤 콩고물이 떨어질지만을 기대하게 되었다.
정작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돌아다니던 그 소문이 사실인 줄은 꿈에도 모를 일이었다. 반대로 마을 사람들의 입방아도 저택 사람들은 귀가 없는 듯 듣지 않았다. 오늘의 차는 장미, 콘플라워, 마리골드 꽃잎이 어우러진 스위트 부케의 블렌딩 티. 한 모금 머금자 싱그럽고 향긋한 차향이 입안에 봄을 불렀다.
“오늘도 차향이 참 좋네요. 고마워요.”
“뭘요, 아가씨. 앞으로 이렇게 아가씨가 저택에서 차를 마실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어릴 적에 생긴 흠 하나로 쭈욱 시집도 못 갈 줄 알았던 아가씨가 백방으로 수소문을 한 끝에 좋은 혼처를 갖게 되었다. 결혼이 결정된 날에는 집안에 작은 파티가 열렸고 상견례를 하고 온 날에는 모친께서 눈물을 닦아내시며 잘 되었구나를 연발했다. 다 잘 된 일만 같았다. 이게 맞는 것일 테지. 그러니 아가씨는 단 한 번도 싫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싫을 수가 없었다.
이 마음의 석연치 않음은 겨우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결혼식으로 전부 잠겨 사라질 터였다. 그래야만 했다.
그랬는데──,
“으아아아악~~~!!”
정원사가 심혈을 기울여 남겨놓은 튼튼한 가지, 그 위로 아리땁고 튼튼한 차양막, 계절에 맞춰 라일락과 마가렛으로 자수를 놓은 하얀 테이블보와 올해 갓 딴 라즈베리를 졸여 만든 잼과 티포트, 그 모든 것을 무너트리며 허공에서 남자가 떨어졌다.
아가씨가 따라야할 인생계획을 무너트리며 담벼락보다 높은 곳에서부터 남자가 떨어져 내렸다.
“여, 여기가 어디……, 에셸……?”
“어머나. 제 이름을 어떻게……?”
과연 눈앞의 아가씨는 당신이 부른 그 아가씨일까? 차원을 뛰어넘은 파란의 일주일, 그 시작이었다.
달링 저택이 뒤집어졌다. 난데없이 하늘에서 떨어진 남자는 집안의 평온을 뒤흔드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어떻게 잡은 혼처인데, 외간 남자를 만난다는 말이 퍼져서야 절대 안 될 일이다.
바깥에서 우연히 눈만 마주쳐도 기함을 토하는데 하물며 집안에 나타나다니. 그가 신의 사자든 천사든 딸애를 책임질 것이 아니라면 없느니만 못했다─물론 책임지게 해주지도 않는다. 그만한 자격이 있어야 말이지! 어디 시정잡배에게 넘겨줄까─.
그런 결론 끝에 하늘에서 떨어진 남자는 저택에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보았다. 당사자의 의사는 조금도 들어 있지 않은 합의였다. 또 다른 당사자인 아가씨의 동의도 물론 없었다.
“도대체가 알아들을 수 없는 허무맹랑한 소리만 늘어놓지 뭐예요. 듣도 보도 못한 라이지방에서 왔다는 둥, 포켓몬이 어쨌다는 둥, 아가씨를 만나게 해달라고 떼를 쓰는 통에 주인어른이 그대로 묻어버리자는 것을 겨우겨우 마님이 말리셨대요.”
“나를 만나고 싶다고 했다고요?”
“아가씨와 아는 사이라고, 말을 전해달라고 간절히 말하던데…… 우리 아가씨가 그런 얼뜨기 같은 남자를 알 리가 없잖아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분명 아가씨 소문을 들은 거겠죠!”
그나저나 그 고양이도 아니고 여우도 아닌 동물은 뭘까요. 미주알고주알 보고 들은 것을 떠들어주는 하녀를 곁에 둔 채 화제의 중심에 선 아가씨, 에셸 달링은 생각에 잠겼다.
지금도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저택 밖을 거의 나가본 적 없는, 그야말로 온실 속 화초의 표본인 그녀에게 오늘 일어난 일은 상상을 초월하는 자극이었다. 단번에 커피를 5잔쯤 마신 것처럼, 100m 달리기를 전력질주 하고 온 것처럼 쿵쾅거리는 이 기분을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어려웠다.
단순히 하늘에서 떨어진 남자가 낯설고 놀라워서만이 아니었다. 어떻게 그는 제 이름을 부른 것일까? 하녀는 그가 에셸의 소문을 들었을 거라 단정 지었지만 에셸은 그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으나 자신을 본 게 아니었다. 그래서 에셸은 그가 궁금했다. 당신이 보는 상대는 누구였을까? 어떻게 그런 시선으로……. 아가씨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결단코 이제껏 탈선이란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탈선脫線이란 즉 탈선脫善이기도 하다. 품행방정한 요조숙녀에게 요구되는 ‘선함’의 수칙들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단 뜻이다. 그런 그녀가 오밤중에 집안에서 아주 귀하게 모셔둔 손전등─얼마 전 갓 특허를 얻어낸 제품이다─을 아버지 서재에서 몰래 꺼내어 들고 저택 지하까지 살금살금 움직인 것에는 무척이나 복잡한 배경이 있었는데, 이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한 이후 약 200년이 지나 신대륙의 남과 북이 갈라져 전쟁을 일으키기까지의 미합중국의 역사를 설명하는 것만큼이나 긴 이야기가 필요하기 때문에 정중히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아가씨의 명예를 위해 단 두 가지만 해두자면 호기심과 충동만으로 움직이지는 않았단 것이다.
“저어, ……깨어 있나요?”
이제는 역사의 흔적으로만 남아 사용하지 않던 지하 감옥에 갇힌 불운한 시간여행자는 그렇게 시공간을 뛰어넘어 연인을 쏙 빼닮은 아가씨와 만나게 된다. 어두컴컴하고 눅눅한 지하 감옥 안에 손전등의 빛이 켜지자 사색에 질려 있던 청년의 얼굴에 다급함과 반가움이 떠올랐다. 누구라도 좋으니 자신의 무고를 증명할 준비를 마친 청년은 빛 너머를 상대에게 얼른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 이게, 그 설명하기 어려운데 여기 캐이시가 멋대로 순간이동을 해버리는 바람에. 앗, 네 탓이라는 말이 아니, ……아."
그런데 나타난 이는 무시무시하게 자신을 추궁하던 집사장이나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구경하러 오던 하녀들이 아니었다. 본래 세계의 연인과 몹시 닮은, 하지만 아마도 다른 사람일 저택의 아가씨다.
"안녕하세요. 이런 상황이지만 인사가 늦었네요. 저는 에셸이라고 해요. 에셸 달링."
"어, 어어…. 네에……. 주노, 입니다. 안녕하세요."
네, 알고 있어요. 간신히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선까지 숨기지는 못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이름까지 같은 눈앞의 아가씨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지만 차원이동이라거나 그런 걸까? 말도 안 돼. 그렇다면 원래 세계로는 어떻게 돌아가지? 캐이시~! 날 책임져줘! 당장에 그렇게 울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것은 첫째로 주노 또한 이제 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캐이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님을 아는 덕이고 둘째로는 당장에 돌아가기에 앞서 연인을 꼭 닮았으면서도 그늘진 낯을 한 상대가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이세계의 하늘에서 갑자기 붕 떨어졌을 때부터 주노는 쭉 그녀를 보고 있었다. 처음은 연인을 닮아서였으나 이후는 겉과 달리 웃지 않는 속 때문이다. 불쑥 앞뒤 없는 말을 꺼낸 건 그의 때때로 튀어나오는 충동이었다.
"저기, ……무슨 일 있으세요?"
"무슨 일은 제가 아니라 당신에게 생기지 않았나요?"
"앗, 그게 그렇긴 한데……."
남을 걱정하는 게 천성이구나. 어벙하게 구는 모습에 아가씨가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 손이 깨끗했다. 양손 모두 험한 일이라곤 해본 적 없이 곱고 하얀 손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주노는 덕분에 맥이 조금 풀렸다. 안도감이기도 했다. 눈앞의 사람이 연인과 다르다고 확인하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연인은 오른손에 화상 흉터가 있었다. 오랫동안 장갑으로 감추다가 이제야 손을 드러내고 다니게 된 참이다. 장갑 대신 오른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보는 일이 좋았다. 반지 낀 손끼리 맞잡으면 가볍게 부딪치는 소리, 차가운 금속이 손의 온기에 따뜻해지기까지의 과정, 그 모든 것이.
습관처럼 약지에 끼워진 반지를 문지르며 주노는 미간을 좁혔다. 지금쯤 연인은 어떻게 있을까. 걱정하고 있진 않을까? 손전등이 반지를 가리켜 비췄다.
"어머, 결혼을 하셨나요?"
"아, 아뇨! 아직… 안 했는데. 이건 그, 결혼반지가 아니라 커플링이라고……."
"커플링?"
그건 뭐죠? 돌아오는 질문에 주노는 또 한 번 실감하게 되었다. 이곳은 정말 내가 살던 곳과 아주 다른 곳이구나.
차라리 결혼했다고 거짓말이라도 하는 편이 나았을까. 기혼자 청년이라면 결혼적령기의 처녀와 마주치더라도 흠이 덜 잡힌다. 하지만 그런 기지를 발휘하기에는 요령이 없는 청년이었다. 척 보기에도 거짓말 하나 못할 것 같은 정직한 얼굴에 에셸은 작은 애도를 표했다.
정직한 청년은 장황하게 설명하는 동안 얼결에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말도 흘리고 말았다. 처음엔 분명 정신병자로 취급을 받진 않을지 걱정하며 숨기려 했던 것 같지만 살고 있는 문명의 차이라는 건 아주 사소한 곳에서부터 티가 나기 마련이었다.
서로에게 생소한 것을 설명하고 있자 보니 단순히 먼 시골에서 왔다는 것만으론 납득할 수 없는 점들이 늘어만 갔고 이런 일에 요령이라고는 없는 그의 변명은 곧 눈덩이처럼 불어나 가속도를 붙여 데굴데굴 굴러간 끝에는 진실에 폭삭 깔리는 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저는 정말 수상한 사람이 아니에요. 감옥에서 나가게 해주세요.’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법을 아시나요?’로 바뀌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단 말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에셸 달링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 죄 없는 이를 감옥에서 풀어주는 일조차 말이다.
“정말 죄송해요. 아버지가 워낙 신중하셔서요. 그래도 지내는 동안 불편하지 않도록 제가 잘 말해볼 테니까 일주일만 참아주세요. ……미안해요.”
결혼식이 치러지는 당일까지 그녀의 아버지는 갑자기 튀어나온 이 불한당을 감옥에 꽁꽁 숨겨둘 생각이었다. 이 세계에 아무런 연고가 없다면 더욱 좋았다. 에셸이 나서서 그는 아무런 잘못이 없으니 풀어달라고 해도 전혀 듣지 않겠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미안함과 속상함에 여자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저, 저기!”
그런데 사정을 설명하고 나자 낯선 청년에게서 돌아온 첫 마디는 생각도 못한 것이었다.
“그 결혼은, 달링 씨도 바라서 하는 것인가요?”
결혼을 준비하는 동안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다.
캄캄한 지하 감옥으로도 나비가 들어온다. 푸른 잔상을 남기며 가냘픈 날갯짓을 하자 주노의 품에 있던 어린 캐이시가 푸슝, 재채기를 했다. 고작해 그 정도 미풍이었음에도 물끄러미 향해오는 시선에 에셸의 눈동자에 큰 동요가 일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돌려봐야 해요?』
『음, 남은 녹화 테이프가…… 5일 17시간 20분쯤 남았군.』
『그걸 언제 다 보냐구요~!』
『자, 자. 집중해. 집중. 이것도 다 일이다.』
『‘그렇게 말하며 선배는 빨리감기 버튼을 눌렀다.’』
『이 녀석, 멋대로 내레이션 넣지 마라!』
▶▶▶ 달링의 결혼식 D-1
바라서 하는 결혼식이냐니 정말 이상한 질문이 따로 없지. 이것도 그가 다른 세계에서 온 탓이다. 결혼이란 집안 대 집안의 결합으로 행해지는 이해利害의 영역이지 이해理解의 영역이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에셸 또한 이 이해관계에 납득하고 있으니 가문의 복을 바란다면 바란다고 할 수 있을까?
어째서? 라거나 왜? 라거나, 다른 선택지가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던 아가씨에게 이방인의 작은 물음은 그러니까 알의 균열을 만들 듯 아주 사소하면서도 큰 반향을 남겼다.
당연한 일이 아니었던 건가.
그제야 내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던 석연찮음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결혼식을 준비하는 동안 에셸의 강력한 요청으로 감옥은 그나마 좀 방처럼 꾸며지게 되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일주일만 참아달라는 요청을 청년은 놀랍도록 온순하게 받아들여주었다.
낮에는 지하 방에서 캐이시에게 다시 한 번 순간이동을 해서 돌아가자고 훈련을 시키거나─번번이 실패하였으나 감옥 바깥을 자유롭게 다닐 수는 있었다─에셸이 가져다 준 책을 읽으며 보냈고 밤에는 귀를 쫑긋 기울이다가 아가씨의 발걸음 소리가 나면 미리 의자를 끌어다 두었다.
두 사람은 매일 같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서로의 살아온 이야기, 가족 이야기, 좋아하는 것이나 소중한 경험. 놀랍게도 이야기를 하는 쪽은 주로 주노였다. 그야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아가씨에게는 들려줄 만한 이야기가 많지도 않았다.
아가씨는 그가 들려주는 3개월의 여행담을 가장 좋아하였다. 낯선 대륙에서 펼쳐진 길고 긴 여행 이야기는 그녀가 책으로도 얻지 못하던 것이었다.
“세상에, 기차에서 테러가요? 어떻게 그런 무서운 일이.”
“아하하…. 저도, 그 때는 겁에 질려서 잘 대처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다음번엔 도망치지 말자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바다를 보러 가게 되었는데……”
당연한 수순처럼 시간여행자 청년의 이야기에는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언급도 몇 번이고 나왔다. 첫 만남부터 함께 호수를 걸었던 일, 기차역 앞에서 손을 잡았던 일화나 두 사람만의 비밀 약속을 했던 일. 연인을 이야기할 때 청년은 이 침침하고 눅눅한 지하 감옥이 마치 다른 공간이 된 것처럼 눈을 빛냈다. 상기된 뺨과 귀, 묘하게 들떠 빨라지는 말투. 낯선 곳에 떨어져 불안해하던 때와 전혀 다른 사람만 같았다.
“그래서 언젠가 에…, 그, 그 사람과 미래를 약속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사랑을 하는 사람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건 처음이었다. 마리도 소피도, 먼저 결혼한 또래 주변인들 모두 그런 이야기는 전혀 해주지 않았으니까. 사랑에 빠진 얼굴이 신기했다. 이런 곳에 갇혀 미래도 불분명한 그인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 보였다. 그래서 아가씨는,
“저, 그러니까… 겨, 결혼이란 건 그런 게 아닐까요? 정말 원하는 사람과 하는.”
그의 연인이 부러웠다. 질투도 했다. 탐이 났다.
“주제넘게 죄송해요. 그렇지만… 저, 저는 달링 씨가 그렇게 슬픈 얼굴 하고 결혼하는 건, 좀 속상할 것 같아서……”
사랑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당신이 저와 결혼해주세요.”
“네? ……네에에?!?”
“당신이 제게…… 사랑을 알려주세요.”
청년에게는 청천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경악하는 그를 무시하고 에셸은 또박또박 말했다.
“저와 닮았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 저를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 될까요?”
총명한 아가씨는 그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일찌감치 눈치 챈 지 오래였다. 그의 입으로 들은 것은 아니지만 그가 말하는 연인은 저와 닮았다. 어쩌면 이름까지도. 그렇다면… 자신이어도 되는 게 아닐까?
어느새 결혼은 하루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아침이 되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신랑이 찾아오고 아가씨는 웨딩드레스를 입게 된다. 일주일 전만 해도 순순히 따랐을 일이다. 그러나 눈앞의 사람으로 인해 더는 순순히 버진 로드를 걸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신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저를 책임져주세요.”
자신의 행복, 자신의 바람, 스스로 선택하는 삶, 자유, 이제껏 생각해본 적 없는 것들을 처음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혼란스럽고 위태롭고, 마음이 하루에도 10번씩 휘청거렸다. 아가씨에게는 의지할 사람이 필요했다. 원망할 사람이 필요했다. 비록 그게 당장에 사랑은 아닐 테지만 사람이 필요했다.
처음 보는 표정을 한 아가씨 앞에서 주노는 잠시 말을 잃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 순간,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에 공교롭게도 청년이 선 뒤편으로 새까맣게 일렁거리는 구멍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중력을 어그러트리고 공간을 마음대로 휘저으며 생겨난 웜홀 너머로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카리, 정말 이 너머에 주노가 있는 건가요? 좋아요. 그럼 우리 함께 불러 보기로 해요. 주노~! 들리나요~?」
연인의 목소리였다. 순간적으로 왈칵 눈물이 날 뻔했다. 연인이, 소중한 파트너와 함께 방법을 찾아낸 것이다.
"드, 들려요. 들려요, 에셸! 저 여기 있어요!"
「으응, 잘 연결된 걸까……? 저기, 이쪽으로 뛰어들어주세요. 겁먹지 말고. 카리와 다른 친구들이 함께 힘을 내고 있어요.」
저 새까만 구멍으로 뛰어들라고? ‘겁먹지 말고’ 그렇게 말해도 덜컥 겁이 나는 게 사람 마음이다. 그러나 주노는 마음을 다잡았다. 에셸을 믿는다. 그녀는 저를 위험에 빠트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막 뛰어들려던 순간이었다. 뒤늦게 등 뒤의 인물이 떠올랐다. 돌아보면 청찰 너머로 못이 박힌 듯 선 이 세계의 에셸이 있었다. 연인과 꼭 닮았지만 분명히 다른 인물이었다─갑자기 사랑을 알려달라고 할 때는 그 저돌적인 면이 연인과 똑같아서 잠깐 놀라기도 했었지만─. 그녀가 길을 잃은 아이처럼 그만을 쳐다봤다. 주노는 그냥 돌아갈 수 없었다.
잠깐만요. 잠깐만 더 기다려주세요, 에셸. 들리지 않을 말을 읊조리고 주노는 조심스럽게 상대에게 다가갔다.
아가씨는 모든 것을 체념한 사람처럼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뒤에 생겨난 새까만 구멍이 무엇인지 몰라도 그가 떠나려 한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가 가면 이제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긴. 모두의 축복 속에서 새 신부가 되면 그만이다. 처음부터 그럴 운명이었다. 그것으로 모두가 행복해진다. 그리고 자신은 의무를 다한다. 그것으로…… 그렇게.
“달링… 씨.”
조금 전까지 에셸의 이름을 부르던 청년이 서먹한 거리감을 둔다. 당연하지. 그가 부르는 호칭의 주인은 그녀가 아니다. 청년은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면서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아까… 제안해주신 것들은…… 죄송하지만 그러지 못할 것 같아요. 저에게 에셸은 누군가로 대체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그 사람과 제가 어디가 다르죠? 그 말이 목까지 치솟았다. 청년은 시선을 읽은 듯 대답해주었다.
“달라요. 제가… 알아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다르지만. 저는 그…… 달링 씨도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누군가의 대신으로 사랑해달라거나, 그런 말도… 하지 말고.”
자신감 없이 굴던 청년이었지만 이 부분에서만큼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흐읍, 하고 짧게 심호흡을 한 그는 최대한 또렷하게 말을 전했다.
“에셸이 누군가의 대체이지 않길 바라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그가 이름을 불러주었다. 무의식이었겠지. 에셸은 그가 가리키는 에셸이 자신임을 알아들었다. 동시에 그가 말하는 에셸은 자신과 닮았지만 다른, 그의 연인이기도 할 것이었다. 그는 누구라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바보 같을 만큼 착한 사람이다.
“정말 있을까요? 그런 사람…….”
목소리에 물기가 맺혔다. 에셸은 손전등을 꺼버렸다. 감옥 안을 밝히는 등불만이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림자도 같이 일렁였다. 캄캄해 표정이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주노는 어쩐지 상대의 표정을 알 것 같았다. 언젠가 연인이 억지로 울음을 참을 때 지어보였던 표정이다.
자신이 달래줄 수는 없었다. 애꿎은 주먹을 쥐락펴락하던 주노는 애써 밝은 목소리를 냈다. 덕분에 조금 삑사리가 난 건 비밀이다.
“이, 있을 거예요. 반드시!”
달링 씨 미인이고, 똑똑하고, 유능하고, …… 모두가 당신을 믿고 좋아하니까……. 장황하게 떠드는 말은 이제 정말 어느 쪽 달링을 말하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결국 푸슬푸슬 웃음을 흘린 에셸은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그러니까 이제 가세요. 허둥대던 청년의 움직임이 그것으로 멎었다. 청년은 우물쭈물거렸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그에겐 돌아갈 곳이 있었다. 캐이시를 품에 안고 천천히 뒤로 물러난다. 이제 한 발자국 남은 순간,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철창 너머는 캄캄해 잘 보이지 않았다.
주노는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참견하기로 했다.
“당신도…… 행복할 수 있을 거예요. 포기하지 말아주세요.”
새하얀 빛이 환하게 퍼진다. 빛과 함께 청년이 빨려들듯 웜홀로 사라졌다. 텅 비어버린 철창 안을 바라보다 아가씨는 그 자리에 주르륵 주저앉았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이제 이 일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리고 자신은, 당장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바다. ……보러 가고 싶다.”
그가 여행담을 들려줄 때 가장 귀 기울였던 부분이다. 새파랗게 펼쳐지는 물,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 짭짜름한 바람과 발가락을 간지럽히는 파도. 햇살에 달궈진 부들부들한 모래알, 그 위를 걸을 때마다 나는 사박사박한 소리.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것.
그곳에 가면 자신도 행복해질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이 집에서 벗어나서…….
야반도주다. 부모님은 알면 뒤로 넘어가실지도 모르지. 감옥 안 남자와 도망갔다고 오해하실지도 모른다. 그러면 화를 낼까? 실망할까. 이런 구제불능의 딸, 없는 셈 쳐버릴지도 모르는데.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탈선에 심장이 술렁거렸다. 그래도, 자포자기라도 좋으니 도망치고 싶었다. 닥쳐올 내일의 운명에 도저히 순응할 수 없었다.
그 때, 당장 가방을 싸는 것부터 난관인 아가씨의 앞에 고양인지 여우인지 모를 생물이 다가왔다.
“어머. 너는… 그 분을 따라간 게 아니니?”
“시이─….”
샐쭉 접힌 눈을 한 생물이 물기를 닦아낸 손등 위에 작은 손을 톡 올렸다. 감촉이 조금 독특했지만 작고 따뜻한 손이었다. 나를 위로해주려 그러니? 아가씨가 질문하며 몸을 조금 기울였다.
그 순간, 전조도 없이 아가씨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아가씨만 사라졌다.
『잘 들어, 캐이시. 순간이동은 정말로 꼭! 필요한 순간에만 쓰는 거야. 예를 들면 네가 위험한 순간이나 배틀에서 도망칠 때나…….』
지금 이건 꼭 필요한 순간이 맞겠지? 캐이시는 만족스럽게 눈을 휘고 웜홀이 닫히기 직전 그 안으로 쏙 들어갔다. 돌아가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캐이시를 찾던 수습 브리더에게 와락 안긴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시간여행자들은 모두 무사히… 돌아감. 좋아. 문제없음.』
『시간여행자가 다녀간 흔적은 지워야 하지 않아요? 기억이라든가, 저기 결혼식도 파토나버렸는데.』
『뭐, 이 정도 나비효과는 괜찮겠지. 인마. 우리는 전 차원을 대상으로 일하는 중이야. 거시적으로 보면 그렇게 큰 오점도 아니라고. 이를 테면…… 태양의 흑점 정도?』
『그거 비유가 좀 망한 것 같은데요…….』
바다는커녕 아직 밭을 갈기 전인 허허벌판에 빈손으로 떨어진 아가씨가 막 오두막 문을 열고 나오던 무기력한 청년과 만나는 이야기는 전차원관리자들이 더 이상 주목할 필요는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또 하나의 우주가 평화롭게 흘러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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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언컨대, 에셸 달링의 E는 앨리스의 A와 전혀 다른 스펠링이고 7세도 15세도 아닌 새해를 맞아 갓 23세가 토끼굴에 떨어지기 적합한지에는 많은 의문이 제기된다. 하물며 ‘바쁘다, 바빠.’ 외치는 이어롤을 발견하지도, 부주의하게 따라가지도 않았다.
그녀가 건드린 건 정말 그저 거다이맥스 팬텀의 입구와 비슷하던…… 아니, 거기서부터 문제잖아?
허공이 태클을 걸든 말든 치마가 바람을 못 이기고 자꾸만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에셸 스스로는 부정하나 커다랗게 부푼 치마를 붙잡은 모양새는 앨리스나 메리 포핀스와 퍽 흡사하기도 했다. 다만 안타깝게도 그녀가 떨어지는 검은 통로는 저승의 입구도, 동화 속 토끼굴도 아닌 시공간의 균열에서 비롯된 웜홀이라는 게 문제다.
누가 상상이나 할까. 대체 어느 커플이 이렇게 천만분의 일보다 더 희귀하다는 차원이동에 두 번이나 휘말리겠어.
누구는 눈 깜짝할 새 도착했다는데 이쪽은 길고 긴 미끄럼틀을 타듯 하염없이 검은 통로를 지났다. 체감 상 2-3분이었지만 그조차도 지겨워진 에셸은 구멍의 끝에 다다르자마자 꺼낼 첫 인사말을 고민했다.
마침내 과사삭벌레가 내놓은 것 같은 구멍의 끝에서 퐁, 벗어나자 비치는 풍경은 메르헨 아가씨가 생전 본 적 없는 사이버펑크의 세계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만나게 되는 미래세계의 연인과 맺어지는 관계는……
이것은 하지만 또 후일의 이야기. 지금 당장은 난데없이 과거 여행에서 돌아온 연인의 손을 소중히 붙잡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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