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스터 : 피치럼블

003) 09.21. 시기적절

천가유 2023. 12. 26. 23:18

ㅡ리치 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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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지방은 유독 애향심 강한 가문이 많았다. 나고 자란 마을에 다시금 뿌리를 박고 자식을 낳고, 다시 그 자녀가 자라서 기둥을 세우며 몇 대를 이어져 오는 사람들, 그들이 만들어낸 문화와 풍습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화랑지방을 이뤘다.

()가는 그 중 하나였다. 오랜 선조가 전에 없던 글자를 만들었고 거기에 능하다는 뜻을 부여하여, 그렇게 만들어진 표의가 누구나 알아들을 뜻으로 굳어져 가문이 이어지도록 그들은 푸실마을에서 긴 세월을 지켜왔다. 분명 몇 대인가 더 위는 봉술에 능한 가문이었지. 지금은 할머니의 어머니인지 할머니의 할머니인지 아니면 그보다 위인지, 사실은 위로 올라갈 것도 없이 할머니가 새 역사를 세운 것인지 요리에 능한 가문이 되었다. 다음에는 무엇이 자랑이 될지 아무도 모른다만 적어도 능란 세대에서 바뀌진 않을 것이다.

아무튼 란은 어릴 때부터 케케묵은 먼지 더미 너머의 족보를 보고 자랐고 네 선조가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말을 듣고 자랐는데, 거기에 존경심을 갖고 자긍심을 갖는 것도 다 옛적의 이야기지 지금에 와서는 훌륭한 조상님 덕에 내가 집도 있고 가게도 있구나.” 하고 불손한 존경만을 갖고 있었다.

그랬는데 집안을 향해 감읍할 일이 하나 생겼는데 언제였는지 알아?”

언제였는데요?”

시시콜콜한 옛날이야기를 나누는 것뿐인데도 리치는 금방이라도 수첩을 꺼내 적어내릴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열심히 들을 것도 없는데. 이러다 특종! 능가 이야기이런 걸로 기사가 나기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 나서 나쁠 건 없지만 집안 욕을 한 걸 알면 할머니가 싸리 빗자루로 쫓아올 게 틀림없으니 도망치기 위한 마음의 준비가 미리 필요했다.

언제냐면은……

──이 시간이라면 다들 가게에 있을 테니까 걱정말라구.

현관을 열고 마당을 가로질렀다. 마당보다는 장원에 가까울까. 돌을 눌러놓은 장독대가 미관을 해치지 않을 만큼 상당히 공들여 꾸며놓은 마당은 할아버지의 자랑이기도 했다. 담장 너머로 사람들이 힐끔댈 때마다 보란 듯이 자랑을 늘어놓는 게 일과 중 하나라나. 그런 바깥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6인 가족의 생활감이 꽉 들어차도록 느껴지는 아늑한 공간이었다.

쭈뼛거리는 친구의 손을 잡아 신발을 훌러덩 벗고 자신의 방도 아닌 커다란 옷방으로 이끌었다. 지금 계절에는 맞지 않는 옷들과 더불어 자주 꺼내지 않는 것들을 모아둔 곳에서 한켠 문을 밀어젖히자 그곳에는……

바로 이때였지.”

능란이 입은 것과 비슷하면서 좀 더 고풍스럽고 전통미가 묻어나는 형형색색의 비단옷이 기다리고 있었다. , 이 중에 고르라고요~?! 야생에 던져진 캐터피마냥 외치는 리치를 앞세우며 란은 개구진 미소를 지었다. 지금부터 옷갈아입히기 놀이 시작이다.

알고 있어, 리치 씨? 리치 씨의 이름과 같은 과일이 있는 거.”

3대 전의 성인식 옷인가, 4대 전의 결혼식 옷인가. 아아역시 이 옷도 잘 어울리는데 기장이 조오금 남네. 능가는 다 크냐고? 으핫, 키에도 능한 편이지. 한참 고민하다 고른 옷은 하얀색 바탕에 복숭아색의 꽃이 수놓아진 것이었다. 새 출발이라고 하면 흰색이 이미지에 맞으니까. 그의 머리색 중에서도 밝은 부분을 따온 듯한 무늬는 금방이라도 능소화의 향이 피어오를 듯했다.

능란이 입은 것과는 다르게 정석의 드레스가 리치의 몸에 꼭 맞게 떨어지다가 발등 위에서 멈춰 선다. 자칫 갑갑할 수 있는 디자인은 옆트임으로 상쇄시키고 물결치듯 아름다운 곡선이 성인식에 걸맞게 우아하면서 성숙한 매력을 돋보이게 해주었다.

옛날에는 황실에 진상할 정도로 귀한 것이었다네. 특별히 좋아하던 건 아니었는데.”

그야 나한텐 복숭아가 있고, 킬킬 웃으며 옷깃을 정리해주었다. 목가에서 머리카락을 빼내어 주자 문득 좋은 냄새가 풍긴 것 같았다.

리치 씨 볼 때마다 자꾸 생각나는 거 있지? 조만간 한 바구니 사와야겠단 말이야~”

이런 얘기 하면 또 부끄러워서 빨개지려나? 으응, 괜히 염문설이 나지 않게 조심하긴 해야겠어.

하지만 말이다. 반가울 수밖에 없는 상대였다. 같은 마을, 동갑내기, 친해질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텐데 돌고 돌아 20년만에 만나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이야말로 두 사람이 만나기에 적기였던지도 몰랐다과거의 그를 안다고 말해온다면 수치심에 꼬렛구멍을 찾았을 테니뜻깊은 새 출발에 뜻 좋은 추억을 안겨주고 싶었다. 그래, 능가가 이런 전통행사를 좋아하기도 했다.

벌써 기자로서 경력이 꽤 된다고 들었는데, 일찌감치 사회생활이나 하고 있던 번듯한 사람에게 새삼스러운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축하받은 기분이 굉장히 좋았거든. 지금부터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것만 같아서, 해도 된다는 것 같아서. 그러니까~ 당신도, 누군가 그렇게 당신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등을 밀어주는 기분 좋은 하루를 겪어보았으면 했다는 거야.

이유는 그럴 시기잖아, 한 마디로 충분한 것이다.

비녀를 꽂기엔 머리가 애매하니까. 대신 이렇게 빗을……

나뭇살이 촘촘한 빗은 마찬가지로 흰 칠이 되어 있었다. 그 끝으로 주황과 분홍의 구슬장식이 꼭 발처럼 내려와 머리카락에 자리했다.

, 아주 예쁜걸. 마지막으로 그 머리를 땋을까 말까인데~…… 리치 씨는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

, . 그렇게 얼어있지만 말고 거울을 보라니까. 잘 어울릴 거라 했지?

거울 너머에는 전통복이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웃고 있었다. 거울을 통해 마주한 얼굴에 능란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역시 해보니까 기분 좋지?

 


치근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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