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르나르 귀하
“으핫, 비법 소스라니.”
그의 맞은편에 아주 자리를 깔고 와 도시락통의 빈자리에 교자를 쏙쏙 더 넣어주었다. 반대로 자신의 교자 접시에는 잘 튀겨진 닭튀김을 쏙 올렸다. 그 달콤아 모양은 주먹밥은 뭘로 분홍색을 표현한 건지 궁금한걸. 가게에서는 색을 낼 때 주로 과일이나 풀을 썼다. 분홍색이면 차조기 잎이려나. 산딸기를 으깨도 좋겠지. 레시피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다 보면 음식이 비워지는 게 순식간이었다.
싹 비워진 접시를 옆으로 밀어둔 능란은 그 자리에서 찻물을 올렸다. 역시 불 타입이 있으면 좋겠어, 가벼운 푸념이 지나간다.
“식후에는 역시 따뜻한 차인데, 르나르 씨는 차 좋아해?”
정작 앞선 질문에 대한 답은 미뤄둔 채였다. 퍽 베테랑 트레이너인 척 군 주제에 바로 답이 나오지 않은 탓이다. ‘포켓몬이 엉망진창이 되어도 배틀을 이어나가는 법’이라. 그런 걸 어떻게 내가 말할 수 있겠어.
“이건 우롱차인데, 우리집에서는 밥이랑 같이 제일 잘 내가는 차 종류 중에 하나야. 흔히 볼 수 있는 차일 테지만 사실 이 녀석, 제대로 차를 발효시키고자 하면 굉장히 까다롭다고 해.”
홍차는 완전히 발효시킨 찻잎, 녹차는 갓 따서 파릇파릇한 그대로 건조시킨 찻잎. 하지만 우롱차는 어느 쪽도 아닌 중간의 잎으로 만든다. 테두리가 붉은 홍선을 두른 듯 살짝 말려들 때서야 우롱차 특유의 향이 나오면서 차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데 그 시기를 맞추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시중에 돌아다니는 저렴한 우롱차들은 그 점에서 하급품이 많아. 제대로 된 우롱차를 한 번 맛보고 나면 그것들의 냄새가 우습게 느껴질 거라더라. 즉 얼마나 중간을 잘 지키느냐가 그만큼 어렵다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 올라운더라고 추켜세워졌지만 능란 스스로는 역시 자신이 이도저도 아니라는 생각을 버리기가 어려웠다. 쌍둥이처럼 한쪽으로 특출나기라도 했다면 이 길이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매진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어중간한 채로는.
조금 새어나가려던 생각을 찻뚜껑을 덮으며 함께 눌렀다. 이건 상급의 차까진 아니지만 못해도 중간은 해, 그에게 찻잔을 밀어준다.
“그러니까, 엉망진창이 된 배틀을 보는 기분인 거지. ──음. 그냥 솔직히 괴로워하고, 속상해도 되지 않을까.”
이런 답을 기대한 게 맞나? 애매한 미소를 입에 걸고 따뜻한 찻잔을 손에 올렸다. 받침을 손바닥으로 감싸듯 쥐어 들고 뚜껑을 살짝 열어 향부터 맛본다. 뚜껑을 완전히 열면 조금 식히다가 한 모금 마셨다. 가을이 향긋하게 입안에 감돈다.
몸에 각인된 다도 예절은 굳이 사고라는 걸 하지 않아도 물 흐르듯 따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악몽 같던 풍경이 몇 번이고 되풀이되었다. 끊임없이 쓰러지고 쓰러지던 포켓몬, 몇 번을 도전해도 넘어설 수 없던 짐 리더의 벽. 쓰러진 포켓몬에게 미안하고, 제 지시가 무능했던 것만 같고 제 옆에 선 사람과 비교하면 할수록 모든 게 자신의 탓이어서…… 어째서 이런 도전을 계속 해나가야 하는지도 모르는 채 허우적거리던 나날이었다.
그 땐 그랬다. 속상함이나 괴로움을 티 내는 것조차 할 수 없어서 “다음에 더 잘해볼게!” 웃으며 애먼 의욕을 냈다. 결과는 어땠더라?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수렁에 빠진 것만 같아져 결국은 노력하는 것 자체를 포기하고 말았다. 계속 이어나가는 게 고통스러운 나머지 무엇 때문에 시작했는지조차 잊어버렸다.
남자보다 배틀 경험이 고작해야 조금 더 있었지만 별반 도움은 되지 않는 듯 싶었다. 찻잔으로 가려졌던 얼굴이 싱글벙글하게 드러난다.
“죄책감이나, 미안함이나…… 그런 건 마음이잖아. 마음이 어떻게 우리 맘대로 되겠어. 괴로운 건 어쩔 수 없어. 그냥, 그래도 있지. 만약에 지금의 내가 예전의 나에게 말해줄 수 있다면 이런 말을 해주고 싶겠더라. ‘포켓몬의 얼굴을 봐.’, ‘왜 배틀을 하는지 떠올려’. 딱, 이 두 개.”
반대로 말하면 스스로 배틀을 해나갈 이유를 찾지 못한다면 꼭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배틀에서 도망칠 구멍을 하나쯤 만들어두어야지. 내가 꼭 이걸 해야만 하는 게 아니다. 힘들면 그만둬도 된다, 고 스스로에게 말해줄 비장의 배틀탈출로프다. 당신에겐 이 캠프에 참여한 본래의 이유가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심전력을 다한 끝에 얻어낸 승리의 희열감을 한 번 맛보게 된다면── 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포켓몬에게 손을 뻗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 녀석, 보기보다 통통하고 묵직한걸? 농담이 나온다. 그래, 이처럼 달콤한 희열이다. 그를 맛보고 난 뒤에는 또 어찌 될지 모르는 미래였다.
“르나르 씨가 배틀을 하고자 하는 원동력이 무엇이 될진 모르겠지만, 스스로 이유를 찾아내면 그게 마음가짐이 될 거라고 생각해. 말처럼 아직 초보 트레이너잖아. 트레이너로서, 봉봉의 파트너로서 무얼 하고 싶은지 생각하다 보면 조금씩 알게 되지 않을까?”
과연 당신이라는 싹은 홍차가 될까, 녹차가 될까. 그도 아니면 완벽한 중도의 우롱차로 변할까. 결과는 3개월 뒤에나?
첫 마을에서 마지막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건 즐거운 로망인데 이번엔 떡밥 회수를 못해서 아쉬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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