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배배 진화
화랑지방의 1번을 부여받은 도로는 향수가 느껴지는 느긋한 밭길이 좌우로 펼쳐지는 평화로운 길이었다. 인접해 있는 늘봄마을까지 연결되는 길은 포장조차 되지 않아 흙이 고스란히 보였지만 덕택인지 인간만큼이나 수많은 포켓몬의 발자국이 남기도 하는 곳이었다.
흔히 볼 수 있는 건 역시 다양한 벌레타입과 풀타입 포켓몬, 간혹 꼬렛이나 탐리스처럼 작물을 탐내고 내려오는 녀석도 있었고 가끔 인접한 꽃가람 숲에서 튀어나왔는지 배루키나 이어롤도 보이곤 했다. 대부분이 인간친화적으로 크게 난폭한 녀석은 없었는데 그래도 가끔씩 또박산에서 내려온 링곰이라든지 차롱숲의 부란다가 힘자랑을 해서, 그럴 때면 사람들이 힘을 합쳐 포켓몬을 몰아내기도 했다.
그러면 그제야 조그마한 야생 포켓몬들은 마음을 놓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가져온 주먹밥이나 열매 따위를 배불리 먹고 삼삼오오 흩어졌다. 우르 무리도 마음을 놓는 포켓몬 중 하나였다. 가끔 사이에 메리프가 끼어 있기도 하지만 대개 커스터드크림색이 아니라 생크림색의 복슬복슬한 털로 모인 우르들은 서로의 털을 정리해주며 한가로이 밭길을 지나다니는 푸실마을의 볼거리 중 하나였는데, 가을이 되면 성긴 갈대밭에 걸린 우리의 털을 한아름 수거해가는 게 아이들의 소일거리기도 했다.
그러니까 즉, 푸실 출신으로서 우르는 말 그대로 길 가다 발에 채일 정도로─능란은 실제로 몇 번 넘어졌다─흔히 보이는 포켓몬이었다.
‘그런데 왜 란은 날 데려온 걸까.’
온순한 우르는 하는 일이라곤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거나 느긋하게 웅크려 빛을 쬐거나 그새 자란 털을 트레이너에게 정리시키거나 하는 게 다였다. 나몰빼미처럼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지도 않았고 빠모처럼 트레이너의 옆자리를 차지할 생각도 없었다. 갓 태어난 음뱃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우르로선 종종 자신의 품을 필요로 하는 트레이너에게 옆구리를 내주고 트레이너가 훌쩍훌쩍 울거나 꼭 끌어안은 채 무슨 말인지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거나 그러다 푹 잠들 때 보듬어 감싸주는 것으로 충분했다.
욕심 없고 느긋한 우르였다. 크게 투쟁심도 없었다. 하랑마을에 갈 즈음에는 저의 인간이 제 털을 몸에 두르고 따뜻하면 좋겠다. 욕심을 가진다면 그 정도. 그런데 어느 날의 밤이었다.
“나는 배배, 네가 좋았어.”
너라서 좋았던 거야. 트레이너가 속삭여왔다.
“우리 함께 푸실마을을 출발하는 처지잖아. 너를 데리고 많은 풍경이 보고 싶었어. 네 속도에 맞추다 보면 나도 자연스럽게 조급해하지 않고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서두를 것 없다고 마음을 달랠 것 같아서. 네가 있어줘서 다행이야.”
우리 이대로 우리의 속도로 가보자. 그렇게 말하며 트레이너가 웃었다. 배배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충분할 만큼의 애정이 포켓몬을 충만케 했다.
초반에 데려온 포켓몬들은 아무래도 애착이 크기 마련인데 배배도 생각지도 못했던 친구였는데 참 아꼈어요. 귀했고.
생각해보니
디모넵 ㅡ 테마리
에셸 ㅡ 저글링
능란 ㅡ 배배
각각 뭔가 중심을 잡아주는 포켓몬이 하나씩은 꼭 초반에 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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