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늘봄체육관 도전로그
처음 늘봄체육관의 문을 두드렸을 때는 15살이었다. 트레이너 스쿨을 갓 졸업하고 쌍둥이와 나란히 도전에 임했다. 그 순간의 심정은 떨림과 흥분, 기대감. 이제껏 스쿨에서 공부한 것을 뽐낼 수 있다는 설렘과 그간의 로드 트레이너와 겨루던 것과 다르게 ‘시험받는다’는 프레셔가 주는 부담을 동시에 안고 임했다.
결과는?
깔끔한 패배였다.
하지만 뭐, 질 수도 있지. 고작 한 번의 패배 갖고 기가 죽진 않았다. 그야 쌍둥이는 이기고 저만 져버린 것이 분하긴 했지만 분한 감정이야말로 다음에 더 잘하고 싶은 원동력이 아닌가. “바로 내일 또 도전할래.” 능란은 기충전을 사용했다. “내일은 응원하러 갈게.” 능수가 응원하기를 사용했다.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줄 알았다.
결과는 또 패배였다.
한 번이 두 번이 되고, 두 번이 세 번이 되어 쌓이기까지 금방이었다. 능란은 저 때문에 발이 묶인 형제의 등을 밀었다. “금방 쫓아갈 테니까 먼저 가 있어.” 능수가 는개에 도전했고, 승리했다. 누구에게는 간단한 한 문장이 어려워 능란은 또다시 패배했다.
패배한 횟수가 10번을 넘어가고부터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왜 안 되지? 저번에야말로 이길 것도 같았는데, 코앞에서 실패했다. 거기까지 갔는데도 안 되자 방법을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능란은 오빠에게 더 이상 기다리지 말라고 했다. 저 때문에 도시를 벗어나지 못하는 그에게 미안했다. 면목이 없었다. 한편으론 지기만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능수는 계속해 나아갔고 능란은 어디까지나 제자리걸음이었다. 능수능란의 한 쌍이 보기 좋게 갈라진 지점이다. 이 뒤로 노력해도 맞설 수 없는 벽 앞에 어디까지 엉망진창이 되었는지는 알속에서 전부 들은 위위에게 물어보면 좋다. 아무튼 마음이 갈기갈기 찢겨나갔었다는 이야기다.
더는 도전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이대로 끝낼 수 없는 마음이 양쪽에서 팽팽하게 저울질을 했다. 이대로 끝낼 수 없다는 마음이 강했을 때는 기세 좋게 트레이너 캠프에 신청서를 제출했고 더는 도전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강했을 때는 볼품없이 기권 선언을 했다. 어느 쪽이든 결과를 도출하지 못한 마음의 미로에 휘둘리기만 할 뿐이었다. 저만 휘둘렸는가?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까지 폐를 끼쳤다.
「자긴 이제 끝났다고 말하면서, 하는 행동 하나하나 말 하나하나 다른 녀석들의 배틀을 지켜보고 있는 눈빛 하나까지 다 미련이 넘치는 꼴을 보이질 말던가?」
한심하게 보이도록 저울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유는 달리 없었다. 미련이다. 결과, 상처받고 상처 입히고, 부딪혀 깨지고 꽁꽁 숨겨두었던 속내를 고백하고, 가장 말하고 싶지 않았던 부분마저 입에 담았다. 인심난측(人心難測), 사람의 마음은 헤아리기가 어렵다지만 유독 스스로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 도망치고 회피하고 외면하며 웃는 얼굴로 겉치레나 하던 여자의 포장지도 별 수 없이 동이 나고 만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마음이라는 건 참 오묘해서 그렇게 전부 놓아버린 것처럼 속을 텅 비워내자 빈자리에 다른 것들이 채워졌다.
「너무 혼자 고민하지 말라는 뜻이었어요. 무섭다면 같이 가서, 지켜봐주겠다고 했잖아요.」
「그럼 다음엔 여기 서지 않고선 못 배길 정도의 배틀을 보여줘야겠네.」
「다시 도전했을 때 져도 괜찮아요. 져서 내려와도 괜찮다고. 잘했다고. 꼬옥 안아줄게요.」
「적어도 나는 너에게 아무 기대도, 실망도 하지 않겠다고 하면 믿을 거야?」
사람들의 다정이 싫어서, 그것을 잃을 미래가 두려워서 일부러 미움을 사려고 한 주제에 결국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다정이노라 깨닫고 만다. 알고 난 뒤론 굳이 오기를 부리던 게 우스워지고 말았다. 솔직해졌다. 그래. 나는 너무너무 이기고 싶어. 이긴 다음에 무엇이 기다리든 상관없이 그 순간을 느끼고 싶어.
부득불 도망치지 못한 채 서성이던 것을 그만두었다. 출구를 찾을 수 없는 미로에서 나갈 방법이 있다면, 저울에서 내려올 방법이 있다면 하나뿐이었다.
──이기는 것. 보잘것없는 인간이라도 있는 그대로 살아주겠다.
몇 번째인지 모를 늘봄체육관의 문을 두드렸을 때는 방년 20세, 가을이었다. 지난번에 다시는 도전하지 말라는 사상초유의 금지령이 떨어졌던 것 같은데 입구에서부터 막히는 일은 없었다. 내심, 얼굴도 보지 못하고 쫓겨나면 어쩌나 떨리던 마음을 쓸어내린다.
“모모, 배배, 나나, 위위.”
속삭임에 볼 안의 포켓몬들이 까딱였다. 하나씩 눈을 맞추고 빙그레 웃는다. 오늘은 너희에게 제대로 설명하고 갈게. 우리는 지금부터 이기러 갈 거야. ─아, 지면 어쩌지? 아니, 이런 소리 말고. 이제까지 야생 포켓몬이나 프렌들리 매치로 하던 거랑 다르게 우리의 힘을 시험받게 될 거야.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온 힘을 다하고 오자.
[늘봄체육관 도전하고 올게.]
[… …]
[응원할게. 힘내고 와.]
배틀코트의 불이 켜지면서 북소리가 들렸다. 기분을 고양시키기에 제격이라고 하지만 가끔은 숨쉬기 어려울 만큼 프레셔가 빠듯하기도 했다. 호명을 따라 코트에 오른 능란은, 짐리더의 얼굴이 보이자마자 북소리에 뒤지지 않을 만큼 큰 소리로 이마를 박았다. 태어나서 딱 두 번째로 꿇은 무릎이다.
“지난번에는 무례한 태도를 보여 대단히 죄송했습니다!”
순간, 주변이 다시 한번 고요해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마가 아파왔다. 하지만 기분은 오히려 시원했다. 얼얼한 이마를 들자 제 5년 악몽 같은 얼굴이 눈에 보였다. 당랑거철(螳螂拒轍), 제 분수도 모르고 덤비는 무모함인가. 압도적인 상대 앞에서 굴하지 않는 용맹함인가.
“변명의 여지가 없는 행동이었지만 마음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반성한 마음가짐은…… 코트 위에서 보여드리겠습니다. 그으러니까……”
“다시 한번 도전하게 해주십쇼!”
이러고 멋지게 이겼으면 좋았을 텐데 또 졌어(ww 다음날 이기고 왔어요
그치만 여기서 또 져버리는 것도 결국 능란이란 인간이 마음가짐이 바뀌었다고 하루아침에 강해지지 않는단 뜻도 되는 것 같아서 그것대로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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