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툰 귀하
온통 버석버석하고 메마른 희나리 사막 인근으로 마치 사막 위에 떠오른 섬과 같은 땅이 있었다. 경쾌하고 화려한 축제의 도시, 몸체는 돌과 바위로 이루어졌으면서 머리 위로는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이 불을 떨어트리고 발아래는 푸른 물결이 곡선을 그리는 그야말로 자연의 축복을 한몸에 듬뿍 받은 땅. 화랑에서 2번째로 번화한 도시, 아토시티다.
그런 아름다운 도시가 한눈에 보이기엔── 조금 무리가 있지만 어쨌든 제법 고층의 라운지에서 여자는 따뜻한 생강차를 내려 소년에게 건넸다. 머그컵은 하루 종일 마셔도 배부를 만큼 커다란 사이즈였다. 감기는 좀 괜찮아? 단순한 감기가 아닌 걸 알면서도 적당히 감기로 뭉뚱그린다.
대답이 돌아오거든 히죽 웃으며 낮에 근처의 가게에서 사온 과자도 꺼냈다. 차에는 역시 과자가 곁들어야지. 실상은 매운 생강차를 잘 못 마실까 봐 꺼내둔 것이다. 사과잼이 들어간 버터쿠키야. 사과생강차에 사과잼버터쿠키, 통일성 있는 메뉴가 좋지 않냐니까. 능청스럽게 굴며 쿠키를 와작, 베어 문다. 오랜만에 나누는 대화 같았다. 한동안 시시콜콜한 잡담을 이었다.
그 사이 여자는 언젠가 그 어두컴컴했던 차롱숲의 기억을 떠올렸다. 빽빽한 대나무숲, 어둑어둑해진 밤, 달도 별도 끼어들지 못하는 암흑 속에서 노란 헬멧이 땅 위에 떠오른 달처럼 달려왔었지. 어느새 그때와 시야가 달랐다. 소년의 눈높이가 불쑥 올라와 있었다. 인간이 죽순도 아니고, 이렇게 금방 크는 건 치사하다고 생각해. 하지만 보기 좋았다. 소년에게서 생명력이 흘러넘치는 것 같았으니까.
봄이 되면 씨를 뿌리고 싹이 막 날 즈음엔 한 번씩 그 위를 보드랍게 밟아주는 과정을 거친다. 왜 막 크려고 하는 싹을 밟느냐고 하면 그렇게 해야 뿌리가 보다 깊이 박혀 줄기가 튼튼하게 자라기 때문이다. 식물이란 신기해서 꼭 빠르게 자란다고 좋은 게 아니었다. 느리게, 천천히 자랄수록 필요한 영양분을 듬뿍 흡수하여 배가 부른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떨까. 여자는 툰 마구스라는 소년의 뒤늦은 성장이 그저 당연한 것처럼 여겼다. 방안에 틀어박혀 제대로 먹지도, 움직이지도 않던 생활, 햇볕을 보지 못하면 비타민D 같은 것도 얻지 못한다니까? 그렇게 오랫동안 성장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소년이 이제야 남들과 같은 기회를 얻었다. 탐욕스럽게 흡수하고 거창하게 자란다. 그래, 다 네 것으로 삼아버려. 소년이 정말 제 키를 넘어버리거든 까짓 형님 소리가 어려울까. 제 일처럼 기뻐할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고작 한 달 2주, 죽순처럼 자라날 줄 알았던 소년의 기세가 꺾였다. 여름이 지나고 겨울이 오면 매미처럼 일생을 다하기라도 하려고? 그런 건 너무, 속상하잖아. 속상하지 않냐는 거야.
「넌 스스로 잘 견디고 있어. 그러니까, 더 찾아줘도 된단 거야.」
돕고 싶었다. 간섭을 하려는 건 아니었다. 다만 그가 필요로 할 때에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다시 한번 차롱숲을 떠올린다. 남의 일을 자기 일처럼 달려와서 찾아주었던 소년이 거기 있었지. 위로를 받았다. 감사를 전했다. 내가 받은 만큼 네게 돌려주겠노라 했다. 빚 청산 같은 게 아니다. 나눌수록 커지는 화랑인의 정이다.
그런데 이 녀석으로 말하자면……,
「의지해서 뭘 하라고.」
「남에게 신세지기 싫단 말인 거야.」
「언젠가 깨지게 되더라도, 무너지게 되더라도…… 나아가고 싶어. 나의 힘으로 오롯이.」
이봐이봐, 이 몸의 열띤 강연은 듣기는 한 거냐니까. 우리 인간이란 본래 나약하게 태어났다니까, 혼자 설 수 없다니까. 너만 약한 게 아니야. 너만 의지하란 것도 아니야. 그런데 왜 너는 스스로 인간을 초월해서라도 남의 의지 같은 건 하지 않으려는 거야.
그렇다면 너와 나 사이에 ‘우리’라는 말은 대체 언제 쓰면 된다는 거냐고.
“네 심정을 전혀 모르겠다고는 하지 않는단 거야. 이해하지, 이해하고 말고. 전부를 아느냐 하면 그건 참 불가능한 소리지만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모를까.”
그래서 한참을 고민했어. 네 뜻을, 바람을, 네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착한 친구가 되어줘야 할지 그런 남의 마음은 알아주지 않는 서운한 소리나 하는 네게 내 감정을 알려줘야 할지. 여기 있는 나를 봐달라고, 투정이라도 부릴지 말이야.
널 믿고 널 응원하고 네 하고 싶은 걸 전부 하도록 지켜보고 지지해주는 그런 친구, 얼마나 좋아. 네게 필요한 건 그런 사람이겠지. 그런데 난 역시 모르겠어. 날 의지해주지 않는 친구란 걸 받아들이기엔 마냥 착하고 헌신적이지 못해.
“평생을 누군가에게 의지해왔다고 해서 그게 나는 아니잖아. 네 첫 홀로서기라는 게 네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지 않아. 네가 이루고 싶은 성취란 오롯한 너의 것이겠지. 그런데, 네가 걷고자 하는 길의 좌우에 누가 같이 있는지 모르겠단 거야.”
그게 내가 될 수 있는 건지도.
숭고한 영웅적 행보 같은 건 아니라고, 거창하지 않다고 손사래를 치지만 여자의 눈에 그것은 역시 번데기가 날개를 펴기까지의 고행이었다. 스스로를 갉아먹는 이 마이너스적 행태의 끝에 영웅소설의 결말처럼 영광이 기다려야만 하는.
“오랫동안 고민해봤어. 나는 네게 어떤 친구가 되어줄 수 있을지, 내가 네게 어떤 친구이고 싶은지 그리고, 너는 나를 어떤 친구로 바라는지.”
그래서 결론을 내렸냐 하면…… 그게 어떻게 나 혼자 나겠냐는 거야. 그래도 당사자를 앞에 두고 떠드니까 혼자 서운하기만 했던 기분은 좀 풀렸다. 어깨의 힘을 풀고 푹신한 소파에 깊게 파묻혔다.
“나는 여전히 네가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의지해주면 좋겠고 죽을 각오는 아니라지만 꼭 죽을 것 같으니 걱정도 되고, 안심이나 시켜주면 좋겠어. 그런데 널 말리진 못할 거야, 툰 군. 순수하게 널 응원해주고 격려해주지 못하는 제 옹졸함이나 곱씹으면서 어중간한 시선으로 보고 있겠지. 그래도 어쩌겠어. 이도 저도 아닌 것밖에 할 수 없는데.”
그러니까 이제 서운한 소리는 안 하려고. 흔들리지 않는 너를 흔드는 소리 같은 건, 필요 없잖아. 이게 툰 군에게 부리는 내 고집이고 자존심이 될 거야.
친구로서 구는 마지막 악담이야. 내일부턴 그냥 착한 친구나 되어볼게.
능란은 분명 달변가인데 묘하게 친구 사귀기는 어려웠던 기억. 말을 잘하는 것과 친구와 마음이 통하는 건 다른 문제인 걸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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