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9주차 리포트
“랑랑, 오랜만이어요.”
“보고 싶었어요, 랑랑.”
꼭 인형처럼 생긴 조그마한 아이들이 능란의 양다리에 달라붙는다. 여자는 으헤헷, 체통 없이 웃으며 두 아이를 양팔에 번쩍 안아들었다. 그으래, 오랜만이야. 나도 보고 싶었어, 이 귀염둥이들.
하랑마을에 오면 조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이제는 몇 촌인지 따지기도 어렵지만 이모할머니의 손녀딸이자 능란의 팔촌인 언니의 쌍둥이 자식들이다. 능란이 막 가출했을 당시에는 걸음마나 겨우 하던 꼬마들이 지금은 아장아장 걸어 다닐 정도로 자라 있었는데, 조금만 눈을 떼도 터벅고래와 함께 눈밭을 구르거나 터벅고래에게 올라타 눈썰매를 타는 활발함을 보였다.
여아 쌍둥이는 처음 능수를 보았을 때 크게 놀랐다고 한다. 쌍둥이는 성별도 같은 줄 알았는데! 무서워! 와앙, 나는 남자애는 되기 싫어. 울음을 터트려서 형제가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즐길 수도 있었다. 그래놓고는 오늘은 혼자 왔더니 그새 고개를 기웃기웃하며 수를 찾는다.
“수우……”
“삼촌에게 영상통화 해볼까?”
“할래요!”
“해주세요!”
눈여아 같은 조카 쌍둥이는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조카들의 애교를 못 이겨 형제와 영상통화를 하고 그 김에 챔피언의 인터뷰 이야기도 하고, 가게 문을 닫고 오는 팔촌 언니에게 저기 아토시티에서 사온 과자세트를 나눠주고 하는 사이 어느새 저녁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 저녁은 여관에 돌아가서 호화로운 가이세키 요리를 먹어야지. 일어나려고 했더니 쌍둥이가 또다시 다리에 달라붙는다. 다리가 단숨에 묵직해졌다.
“율, 창. 이모 가야지.”
“가지 말아요, 랑랑.”
“우리랑 같이 있어요.”
말은 달콤한데 쌍둥이가 이러고 있으니 왜 이렇게 눈여아의 길동무 같을까. 오싹해져서 쳐다보고 있자니 언니가 마구 웃었다. 곧 진짜 눈여아가 가게에 두었던 악기를 가져왔다. 이호(二胡)다. 한 곡 켜주고 가. 네가 연주하면 애들이 얌전해지잖아. 그 참에 누님이 날 팔아먹으려는 건 아니고? 여자의 질문에 누이는 대답 대신 웃기만 한다. 침묵이 긍정이다. 여기서도 또 재롱잔치가 빠지지 않는군. 능란은 한숨을 쉬며 악기를 쥐었다.
화톳불이 꺼지지 않는 여관가의 길 한편, 타닥타닥 타들어 가는 장작 소리와 함께 간드러진 악기 음이 울리기 시작한다. 불꽃이 일렁이는 건너편에는 무엇이든 능란한 여자가 활을 쥐고 있었다.
“그럼… 오랜만에 옛날이야기를 하나 해줄까.”
활이 줄 위를 미끄러질 때마다 하얀 입김이 덮이는 허공으로 음률이 춤을 추었다. 악기 음을 배경음악 삼아 여자는 입술을 축였다. 다리에 달라붙어 있던 쌍둥이가 그새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얌전히 앉는다. 그 모습을 어여쁘게 바라보며 그렇지, 이건 지난번에 캠프에서 하다 만 이야기인데…… 운을 뗐다.
“어찌하여 인간은 불완전하기만 한가. 어찌하여 인간은 완벽할 수 없는가. 또 영원할 수 없는가. 그것은 신이 꽃을 사랑하였기에 생기고 만 일.”
「──수십 년을 바쳐 지금의 화랑지방을 일구어낸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이 여로입니다. 누구보다도 포켓몬 배틀과 트레이너들을. 화랑지방을 사랑한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화랑지방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차기 챔피언의 자리는 아무에게나 내어줄 수 없는 것이죠.」
“바위 공주를 사랑하였다면 천년만년 변하지 않는 바위처럼 ‘영원함’을 약속할 수 있었을 텐데, 꽃 공주를 사랑해버려 우리는 ‘순간’만을 가질 수 있게 되었지. 누군가 그를 어리석다 욕하였어. 어찌하여 현명한 영원을 택하지 않았느냐. 신이 답했지. 어리석기에 사랑이다. 꽃이 피는 순간, 지는 순간, 한 철, 한 때, 한 순간……. 하지만 그렇기에 인간은 무한하지 않은 이 순간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이호 소리가 바람을 타고 퍼진다. 애달픈 현의 음색을 따라 여자의 입술도 사랑을 담았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 모든 순간이 다 다른 순간이고 같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지. 너희도 그렇지, 아해야. 쌍둥이라고 해도 서로가 같지 않잖아. 그래서 우리는 더 남을 사랑하고, 지금을 사랑하게 되는 거야.
「그렇기에 저는 반드시 병을 딛고 돌아갈 겁니다. 화랑지방을 크게 일구어 낸 그때로! 화랑지방은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트레이너 모두가 배틀을 즐기고 사랑하는 땅으로 남을 테니까요!」
그리고 돌아오지 못할 어제를 추억하고 만나본 적 없는 내일을 기대하겠지. 그것이 바로 영원하지 않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법이 아닐까.
──다음날 다시 들은 여로의 인터뷰는 그 순간에 들었던 것과 조금 다른 감상을 주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듣기에는 오히려 챔피언을 응원하고 싶어질 만도 하다고 느꼈다. 포기를 모르는 챔피언, 화랑을 사랑하는 챔피언, 강하고 늠름하고 아름답고 눈부시다. 이 땅을 지키는 진정한 강자, 모두 찬양하여라!
동시에, 그가 경이로운 한편으로 여자는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당신은 정말 영원할 것인가? 만일 영원할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이로운 일인가? 흐르지 않으면 고인다. 고인 것은 썩는다. 영원함이란 곧 정지(停止)함. 끝을 알 수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다.
이야기는 끝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니 모두 사랑하시오. 지금을 소중히 하시오. 이야기를 맺으며 한동안은 말 없는 연주가 이어졌다. 고요한 설원으로 이호의 음률만이 널리널리 퍼진다. 뻗어나가며 여자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능가는 바뀔 거야. 5대째의 만파식적은 4대까지를 기억하는 사람들과 전혀 다른 것이 될 수 있지. 그래도 뭐든 능히 해낼 능가의 일원이야. 그렇게 우리는 이어지겠지. 영원함이란 무엇일까. 불변이란 또 무엇일까. 그저 치우치지만 않으면 그만이라면, 우리네 인생이란 늘 저울을 들고 다닐 수밖에 없는 것이구만.”
하나의 곡이 끝나지 않으면 새 곡을 시작할 수 없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쌍둥이, 다음 곡을 기다리며 모인 행인들, 화톳불이 안겨주는 온기로 잘 익은 볼을 하고 곡을 마친 여자가 일어나 인사한다.
다음 곡이 궁금하다면 또 새로운 장에서 만나도록 하자.
원래 주간 리포트는 다 For. 누구였는데(그러고 싶었고) 이 즈음부터 개인로그가 되었던 듯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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