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몬스터 : 피치럼블

052) 11.25. 행복의 돌전골

천가유 2023. 12. 27. 21:32

ㅡ나비란 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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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바로 이거란다.”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냄비를 끓이며 나비란은 퍽 흡족한 표정이었다. 옆에 펼쳐진 요리책에 색색으로 붙은 포스트잇 플래그가 이 한 그릇을 위한 그녀의 노력을 알려주었다. 채소는 녹색, 해산물은 파랑, 육류는 붉은색. 각각 넣는 순서나 넣기 전의 손질법 따위가 상세했는데 그야말로 평소의 성정을 보였다.

지금이야 실전에서도 그 강함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배지 4개의 트레이너지만 배지가 하나도 없을 시절부터, 이론에 통달해 있던 그녀다. 능란은 종종 10대의 나비란을 상상했다. TV를 통해, 잡지를 통해, 사람들의 말소리로 SNS의 재잘거림으로 여행과 모험, 트레이너라는 것을 간접체험하는 소녀의 모습이다.

그리하여 지금, 그리던 자리에 올라 여정을 이어가는 중인 나비란은 행복한가? 불과 얼마 전이라면 그 질문에 능란이 대신 행복해 보여.” 답하기에 거리낌 없었을 테지만 지금은 글쎄…… 당사자에게 묻지 않는 한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그래도, 씩씩해 보이니 다행이었다. 능란은 나비란의 강함을 믿었다. 우아하면서 끈질겨, 어디에서나 잘 자라는 강인한 화초처럼, 그 이름에 담긴 바람처럼.

최근의 캠프는 어딘지 침울한 분위기였다. 해가 짧고 그마저도 햇살이 비치는 날보다 구름이 흐릿하게 껴 눈이 내리는 날이 더 많은 하랑마을의 기후 탓도 물론 있겠지만 역시 지난 일요일의 충격이 크리라 싶었다. 능란 자신마저도, 그일이 있은 직후 여로의 악몽을 꾸지 않았던가. 제 악몽이란 원초적인 공포에 기인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모두에게 지독한 인상을 남겼다는 것은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면하거나 피하지 않고, 한 사람 한 사람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하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관장들의 협력도 순조롭게 얻어냈지. 오늘이 지나고 나면 수리 박사의 경과 보고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조만간 여로를 쫓아 움직이게 될 거란 예감이 선명했다.

그 선명한 예감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나비와 배터지는 전골 파티를 한 다음날이 되겠다.

 

, . 이리 오십쇼. 오세요. 이것으로 말할 것 같으면은~!”

화톳불이 타오르는 여관가의 야외에 불이 피어오르는 커다란 솥을 앞에 두고 여자가 호객을 한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모르는 사람 아는 사람 할 것 없이 한번쯤은 그 목소리에 돌아보면, 둥그렇게 잘 깎인 얼터스톤이 번쩍, 빛을 받았다. 묘하게 여로가 몸에 박아넣었던 것이 연상되는 것이다.

끔찍한 기억은 먹어서 없애버리자는 전법이야.

마법의 전골을 만들어주는 기적의 돌!”

제일 앞자리는 나비란이 차지했다. 일찌감치 숟가락과 그릇을 들고 쪼그린 작은 체구의 여자는 간간이 능란이 떠들 때마다 박수나 환호를 보내주었는데 그게 꼭 시키지도 않은 바람잡이만 같아서 점점 더 어딘가 약팔이의 쇼 같아진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그러면 뭐 어떤가. 약이든 뭐든 팔 생각이 만만인데.

아무것도 넣지 않은 팔팔 끓는 물에 이 돌 하나만 넣어주면…… 아니, 뭐라고? 세상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전골이 완성된다고?”

저 돌이 다른 의미로 기적의 돌처럼 쓰였다는 걸 생각하면 어딘지 찜찜할지도 모를 홍보문구였으나 그래도 능란은 꿋꿋하게 밀어붙였다.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치환하는, 말하자면 스킬스왑이다.

정말이니, 능란? 돌만 넣었는데 충분해?”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물과 장작만으로 가성비가……. 중얼거리는 바람잡이를 두고 능란은 모르는 척, 돌만 넣고 팔팔 끓는 물을 한 입, 맛보는 시늉을 했다. 그야 물맛이다. 하지만 마음을 달리 먹으면 해골물이 감미로운 것처럼 물맛도 물맛이 아니게 될 수 있었다.

이거이거, 벌써부터 이렇게 진한 맛이 우러나다니. 완성이 기대되는구만. ~ 그런데…… 지금도 완벽하지만 조금만 더 보충하면, 더 완벽해질 것 같은데…….”

야채를 넣는 건 어떠니?”

바로 그거지. 이게 바로 눈밭에서 숙성시켜 단맛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채소라는 거야. 넣어주라, 나비 씨.”

그래!”

한 가지 확신하는 게 있다면, 이 사람, 자기가 바람잡이 역할을 하는 중인 걸 전혀 몰라! 어쨌든 나비란이 사람 하나쯤 잡아먹을 커다란 솥에 아주 잘 익은 알배추와 양파, 대파에 당근까지 와르르 쏟아 넣으면 능란은 거기에 다시 한 국자 휘저었다. 허어, 이거 아직도 조금 부족한데. 거기 지나가던 누님!

, . 거들어달라구. 이 먹기 좋은 크기로 잘린 두부와 청경채, 표고버섯도 있어.”

그거 알아, 노트 씨? 전골에 넣는 두부는 말이지. 젓가락 같은 걸로 건지면 부서지니까 두부 전용의 국자로 건져 먹는다는 거. , 노트 씨도 두부 국자에 그릇 들고 거기 앉으라니까.

허어, 이거이거. 둘이 먹다 셋이 죽어도 모를 맛이 되어가는구만.”

전골을 먹다가 죽으면 어쩌니? 바람잡이의 질문을 또 모른 척 넘긴다. 곤란한 질문은 안 돼~ 어느덧 야채와 버섯에 파묻혀 돌은 보이지도 않았다. 야채가 흐물흐물 익어갈 즈음 질 좋은 켄타로스 고기를 꺼냈다. 얇게 잘린 등심의 붉은 빛깔이 그야말로 아름다웠다.

, 거기 가는 얼굴 험상궂은 형님. 고기 한점 먹고 얼굴 피는 게 어때.”

하아?”

얼굴 피고 이리 오라니까. 전골용의 고기는 안에 푹 익히는 게 아닌 거 알지? 억지로 불러세워 기다란 젓가락을 건네준다. 전골의 고기는 딱 3번까지만 휘젓고 꺼내는 거야. 그 이상은 맛이 없어. 그의 손엔 전골용 소스 그릇이 들려졌다.

, 이 이상 없을 정도로 완벽한 것 같지만…… 언제나 최고에는 최고가 있는 법.”

그런 의미에서 거기 가는 젊은이. 계란은 잘 깨나? 이미 주위에 잔뜩 모인 사람들을 헤치고 능란은 청년 다음으로 미간을 좁히고 있는, 나란히 두니 어째 닮은 것도 같은 연소자를 불러세웠다.

누가 그러더라고. 전골에는 생란이라고 말이지. 하나는 자아, 전골 고기를 찍어 먹을 소스로 하나는 여기 수란을 만들어 볼까.”

이미 팔팔 끓고 있는 전골이야. 달걀 하나가 끓는 물에 포근하게 감겨 익어가는 과정을 즐겨보자고. 전골이란 건 말이지. 정을 나누는 요리라고 하거든. 군도 어디 한 번 솥 하나로 나누는 정이든, 화톳불이 주는 온기든 느껴보고 가는 건 어때?

지나가는 사람들을 마음대로 불러세우고 재료를 하나씩 쥐여주고 거들게 한다. 조금 멋대로였지만 그래도 말이지, 뭐라도 하나 내 손을 탔다는 생각이 들면 그것만으로 사랑스러워지는 게 사람 마음이지 않아?

군이 아는 돌수프 이야기랑 조금 다르다고? 으핫, 이야기란 건 원래 살아 있는 거라서, 입에서 입으로 전할 때마다 멋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겠어. 이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잖아.

신선하고 단 채소가 듬뿍, 거기에 소고기도 듬뿍 넣어 맛이 진하게 우러났다. 간이 밴 두부는 탱글탱글 촉촉하니 최고의 맛을 선보이고 나비란의 요청으로 준비한 신선한 크랩의 다리들도 퐁퐁 넣었다 건지니 육해공의 세계가 전골 냄비 하나에 통째로 담긴 것 같아졌다. 그야말로 다신 없을 천상의 맛이다.

대체 몇 인분을 끓인 거냐. 온 마을 사람들 다 먹이겠군.”

그야 온 마을 모두와 나눠 먹어야지 진정한 행복의 돌전골이지.”

천연덕스럽게 바람잡이로 고생해준 사람들에게 그릇을 덜어주고 사리를 추가했다. 아직 동이 나기엔 이른 것이다. 나나의 날갯짓을 따라 전골 냄새가 온 마을에 진동해 퍼지고, 냄새를 따라 구름처럼 모여든 사람들에게 다 퍼줄 때까지 동날 리가 있을까.

어때, 맛있지? 이게 바로 행복을 만드는 돌의 힘이야. 이 검은돌이 이렇게 맛있는 걸 만들어내더라니까. 한 국자 풀 때마다 목청을 올리며 웃었다. 누구에게랄 것 없이 들려주는 그 말이야말로 주술이다. 애달픔과 두려움을 나누는 만큼 줄이고 든든해지는 배만큼 행복과 온기를 채웠다.

마지막 한 그릇을 마치고 솥의 가장 밑바닥에 덜렁 남은 검은 돌은 행복이 만들어낸 앙금, 반들반들한 돌을 솥 깊숙이 구부려 꺼내든 여자는 그것을 잘 닦아내 주머니에 넣었다. 이것으로 행복의 수납 완료, 이제 무서울 것 없음이다.

 


나비 오너님이 그려주신 한 상이 귀여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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