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여행의 발자취: 진달래
새벽이 밝자마자 눈이 떠졌다. 규칙적으로 자고 일어나는 습관이야 20년을 몸에서 떠나지 않는 법이었으나 오늘은 마음가짐부터가 유난히 달랐다. 전날 밤, 나나에게 부탁해 편지를 보내두었다. 수신인은 늘봄체육관 관장 진달래. ‘익일 찾아뵙겠습니다.’, 답장은 간결했다. ‘언제든 와라.’ 언제든 오라고 했으니 정말 언제든 갈 셈이었다. 그래서 잎사귀의 이슬이 마르기도 전에 나갈 채비를 했다.
다른 녀석들은 볼에 넣고 모모와 배배만 꺼냈다. 아직 졸린지 눈을 부비는 모모를 배배 위에 올린 채 능란은 공중날기 택시를 부르는 대신 도원림의 돌계단을 걸었다. 다각다각하게 배우르의 발굽이 돌계단을 밟는 소리만이 고요한 새벽의 도원림에 울렸다. 길을 벗어나는 순간 무시무시한 챔피언로드의 야생 포켓몬이 도사리고 있다지만 사람들이 왕래할 수 있도록 닦아둔 길 위는 안전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여기서 야생 포켓몬의 습격에 진다면 리그 도전 자격이 다 뭐겠냐만은.
오늘은 좀 걸어볼 생각이었다.
“이렇게 셋이서 나오니까 꼭 캠프 막 시작했을 때 같구만.”
그때는 작고 작은 빠모와 마이페이스의 느긋한 우르였지. 아직 둘 다 솜뭉치만 같던 시절이다. 캠프에 참여했다고 해도 확신 같은 건 갖지 못하던 능란은 그때만 해도 이 둘만 있어도 충분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다.
체육관 도전 같은 건 내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너희랑 느긋하게 여행이나 해볼게.
그랬던 사람이 지금은 볼 6개, 배지 6개를 다 모아 리그 도전을 앞두고 있다니. 사람 일은 참 모르는 법이다. 여전히 마이페이스에 무슨 생각 중인지 모를 배우르의 뿔 위를 느긋하게 쓰다듬다가 손에 걸리는 열매 하나를 따내 닦아냈다. 뚝 쪼개서 포켓몬들과 나눠 먹는다.
“기억나, 배배? 그런 말을 했었잖아. ‘너를 데리고 많은 풍경이 보고 싶어. 네 속도에 맞추다 보면 나도 조급해하지 않고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네가 있어줘서 다행이야.’ 그 말이 달라진 게 없어.”
나지막하게 목을 울리는 울음소리가 긍정을 표해 온다. 「우리 이대로 우리의 속도로 가보자.」 지금도 그대로 유효한 말이었다.
“약속대로 화랑을 한 바퀴 다 돌았어. 어느새 도원림까지 올랐지. 하지만 이걸로 목적을 달성했으니 끝이란 생각은 들지 않아. 우린 아직 더 볼 곳이 많잖아.”
그 방향이 위든, 아니면 옆이든간에. 그래서, 도원림의 위를 향하기 전에 그간 걸어온 발자취를 거꾸로 쫓아보기로 했다. 도원림에서 늘봄까지, 걸어서 화랑속으로다.
“캠프를 시작할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분명 그때는 순간의 기대와 설렘으로 차 있었을 텐데 3개월이나 지났더니 떠올리려고 해봐야 왜곡이 섞이는 것 같아.”
──노트 씨가 그러더라고. 사랑이란 감정도 호르몬이고, 인간의 기분이나 감정이라는 건 결국 휘발되고 마는 것이라고. 그 이야기를 듣고 궁금해서 더 찾아봤더니 인간의 뇌는 참 편리하고, 아귀가 맞게 작동하게 되어 있어서 그 당시의 감정에 나중에야 이유를 붙인대.
“그때 나는 아무런 계획도 없고 거창한 꿈도 없고, 그냥 새 출발을 한다는 것이 기대만 되었을 텐데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그때의 나는 어딘지 불안했던 것 같다고, 나중에야 스스로의 기분에 해석을 붙이고 설득력을 더하는 거야. 웃기지 않아? 그편이, 더 말이 되니까.”
인간은 왜 자기 삶에까지 이렇게 개연성을 붙이려는 걸까. 아차, 이야기가 샜다. 결론은 지금에 와서는 ‘사실 나 그때 별로 안 신났어.’, ‘여행을 가고 싶지 않았던 것도 같아.’ 괜히 부정적인 해석을 덧붙이려 하지만 그런 그럴듯한 해석을 굳이 붙이려고 노력하지 말자는 거다.
“분명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그 앞에 무엇이 기다릴지도 모르는 채.”
지루한 삶에 자극이 필요했고, 지지부진하게 정체된 두 다리를 움직이고 싶었다. 수렁에 빠진 듯 이도 저도 아닌 현재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떠난 여행이었다. 다만 돌이켜보아도 실책은 ‘성급함’이다. 준비되지 않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지 않고 분위기에 떠밀렸다. 조급하게 끼운 첫 단추는 성대하게 어긋나 튕겼다.
“그때 일은 너희에게 제일 미안해.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데리고 올라와서는, 지켜보는 너희의 시선도 모른 채 멋대로 기권해버리기나 하고.”
그 뒤부터다. 체육관에 오르기 전에는 반드시 포켓몬들을 모두 모아놓고 설명을 했다.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떻게 할 것인지. 능란의 사과에 모모는 느긋하게 고개를 저었다. 네 마음 다 알아. 작은 동작에 또 실실 웃음이 난다. 너희는 내게 너무 너그러워.
많은 사람들의 위로와 응원, 때론 쓴소리도 받아가며 다시 한번 코트에 섰다. 보통은 그러면 멋지게 만회하던데, 어렵게 다시 서 놓고도 실수투성이에 성급하게 굴다가 또 진 건 정말 ‘답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마침내 삼세번, 사실은 그보다 무수히 많은 도전 끝에 얻어낸 승리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것이었다.
습관처럼 허리춤에 매달린 배지케이스를 만진다. 6개 모두 채워진 노리개는 제법 묵직한 감이 있었다. 뿌듯하고 기쁜 낯을 숨기지 않은 채 능란은 밝아오는 햇살을 맞으며 다님길로 접어들었다.
길고 지루하고 암담하기만 했던 정체에서 벗어난 이후로는 필름을 빨리감기라도 하듯 쭉쭉 뻗어나가는 여행담이다. 는개체육관, 모아체육관, 아토체육관, 우금체육관, 나린체육관까지 5개의 체육관과 화랑의 세 땅을 모두 돌았다.
한번 흐름에 올라타고부터는 그저 무아지경으로 앞만 보고 달렸다. 배틀이 즐거웠고 승리가 기꺼웠다. 여전히 코트에 올라가기 직전까지 떨리고 긴장돼 태연할 줄 몰랐지만 그럴 때일수록 담대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실수하고 져도 괜찮아. 이제는 만회하는 법을 알고 있으니까. 이겼을 때의 충족감, 단순하게도 그것을 쫓았다.
누군가는 거창한 꿈이 있고 목표가 있어 리그를 보고 달린다는데 그런 계획이란 없었다. 그저 달릴 수 있는 곳까지 달려보겠다는 단순한 이유였다. 그랬더니 어느새 도원림이다.
아니, 지금은 늘봄이다.
늘봄 입구에 들어서고부터는 인사도 많이 받았다. 오, 만파식적 딸래미. 배지 다 모았다며, 축하한다. 리그 올라가는 거냐? 그래, 응원하마. 가게에는 언제 돌아올 거냐. 요즘 배달시키기가 쉽지 않아. 열렬한 구애에 아이고, 찾아주셔서 감삼닷. 꾸벅꾸벅 하다 보니 체육관 앞에 도착했다.
“진달래 씨~ 나 왔어!”
나린의 특제 복숭아만두도 사왔으니까 들여보내 줘~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쉽다고. 여로 씨 일로 입구에서 문전박대를 뚫고 들어간 경험 덕분에 이번엔 손쉽게 들여보내졌다. 그래, 무슨 일로 또 온 거냐. 어디 한 번 들어보기나 하자는 태도에 능란은 능청스레 웃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데 뭣부터 해야 하나. 오늘 한가해?”
캠프의 시작, 바로 그날처럼 두 마리 포켓몬만을 데리고 계단을 오른다. 그 순간,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그래, 바로 이 감각이다. 저절로 머리를 숙이고 스스로를 낮추게 되는 무게감. 존경과 동경의 무게를 실어 넙죽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든다. 시선이 위를 향했다.
“리그에 오르기 전에, 달래 씨에게 보고하고 싶어서 왔어. 이왕이면 리그에 오르기 위한 마음가짐에 대한 조언도. 부탁해, 내 인생 스승님!”
좀 더 일찍 했었어야 했는데 연말 바빠서 아르바이트로 인정은 못 받았지만 진달래와 이 건으로 대화하고 최고가 되어 와라! 응원 받아서 좋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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