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이트바테르는 언제나 다는 붉은 등 대신 장난스러운 호박등을 주렁주렁 매단 채 달콤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과자를 굽고 초콜릿을 녹이고 젤리와 사탕은 가득 쌓여 금방이라도 데구르르 굴러 떨어질 것만 같은 즐거운 분위기, 그리고 따뜻한 냄새 사이사이로 여기저기서 과자를 내놓으라는 외침까지.
커다란 호박을 파내 직접 만든 바구니를 든 채 에슬리는 할로윈 분위기에 푹 빠져 들뜬 걸음을 했다. 그녀의 모습은 언제나 고수하던 간편한 차림과 달리 어딜 보나 사람을 꾀어낼 것 같은 마녀로, 돈을 투자하여 비싼 천을 갖고 만든 보람이 있는지 가볍고 얇아 움직이기에 불편함도 없었다. 다만 드레스 형식에 가까운 의상 위로 걸쳐진 검은 망토가 조금 언밸런스한 부분일까.
그녀 옆을 따라 걷고 있는 루는 창백한 피부를 한껏 살려 뱀파이어 분장을 하고 있었다. 정작 그는 주름 잡힌 흰 셔츠와 베스트 위로 허전하게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다만 허술해 보이는 옷차림 중 목가만 단정하게 잠가둔 상태였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 대해 사탕을 얻어내던 아이들 중 몇몇이 물어오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루가 얌전한 얼굴 위로 미소만 그린 채 답변을 해주었다.
“마녀님이 추워할까봐 빌려줬어.”
상냥한 오빠네! 라며 방울을 단 아이가 그의 손바닥에도 사탕을 올려준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에슬리는 바구니 안의 쿠키를 하나 깨물었다. 추워할까봐 말이지. 말은 잘 해요. 생각이 그대로 내비치는 눈동자로 흘겨주자 그녀의 시선을 알아챈 듯 사탕을 쥔 손을 머쓱해 하던 그가 금세 표정을 바꾸어 불만 있냐는 듯 맞받아쳐왔다. 가늘게 그려진 미소 사이로 보이는 송곳니에 문득 망토 아래로 목가를 더듬는다. 슬슬 자국이 사라졌을 것도 같은데.
───막 의상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의 일이다. 혼자 입긴 조금 불편했던 옷을 마지막까지 이리저리 살펴보다 방문을 열자 이미 옷을 갈아입은 그가 앞에 서 있었다. 마침 잘 됐다. 제대로 입었는지 봐달라고 해야지. 입을 열려는 에슬리보다 먼저 그가 송곳니를 보였다.
“Trick or Treat?”
“응?”
“사탕을 주지 않으면 장난을 칠 거야, 에슬리.”
방금 옷을 갈아입은 사람에게 뭘 요구하는 거야?? 어리둥절함이 묻어나는 표정을 앞에 두고 루는 보다 즐거워졌다는 양 미소를 짙게 하며 슬금슬금 그녀에게 다가왔다. 상대가 다가오니 물러날 수밖에 없어, 주춤거리고 물러나면 이번엔 그가 조금 더 다가오길 반복하다 어느새 그의 품안에 갇혔다는 걸 깨달았을 때 에슬리는 푹신한 카펫 위에 반쯤 눕혀진 채였다.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가 은색의 눈동자를 빛낸다. 양쪽의 색이 미묘하게 다른 한 쌍의 눈동자는 먹이를 눈앞에 둔 사자처럼 사뭇 여유로워 보였다. 가까워. 가까워가까워. 가까워.
“자, 잠깐만. 사탕이라면 지금 가져올 테니까……──읏!”
“지금은 없단 뜻이지? 그럼 늦었어.”
오늘따라 유난히 더 말을 안 들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은 목장식 사이를 파고드는 손가락에 1차로 움찔하며 날아갔다. 장식을 느슨하게 내리고 이어 목덜미에 달라붙는 숨결에, 가볍게 살갗을 누르다 떨어지는 이빨에 2차로 몸이 떨렸다. 아프진 않지만……, 정말 피를 빨려는 것도 아니면서 묘한 곳을 깨물고 있어.
평소와 달라진 것이라곤 옷차림과 머리모양 조금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익숙하던 상대는 간단히 낯설어져 두근거림도 더해졌다. 묘하게 올라가는 심박수에 여전히 제 코앞에서 웃고 있는 그를 곁눈질하며 잇자국의 흔적을 더듬자 오싹한 기분이 조금 더 짙어져 뺨에 열이 오른다.
“그런 반응 보이면…….”
“어?”
내가 뭘? 하고 이번엔 물을 새도 없었다. 등을 감싸 한 번 더 그녀의 몸을 당기고 그가 얼굴을 묻는다. 앞머리가 어깨를 간질이기도 잠시, 이번에는 그녀의 귀로도 확연히 들린 입을 벌리는 소리와, 콰득하고 조금 전과 다르게 옅게 퍼지는 통증에 파르르 놀라버렸다.
“정말 사탕을 달라고 하는 말일 리가 없잖아.”
놀라서 고개를 들자 당사자는 어찌나 뻔뻔히 말해오던지. 에슬리는 반응이 재밌어. 입버릇 같은 그의 말에 어디가 재밌는지 난 모르겠어. 투덜거리며 목가부터 귀까지 빨개진 피부를 힘들여 식힌 게 나오기 직전의 일이었다.
덤으로 그가 목가를 꼭 조여매고 있는 건 보답으로 그녀 또한 깨물어주었기 때문이다. 뱀파이어만 깨물 수 있을까. 무는 것 정도라면 나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서로 주고받은 말로다.
망토 아래를 더듬자 자국이 거의 사라진 것 같아 에슬리는 망토를 벗어 그에게 넘겨주었다. 아직 자국이 좀 남았는데. 넘겨받으며 쳐다보는 그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해주었다.
“뱀파이어를 대동하고 다니는데 잇자국쯤 있을 수도 있지.”
“꼭 자랑이라도 하는 것 같네.”
자랑이라. 가만 생각하던 에슬리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발짝 그보다 앞을 내딛고 그대로 반보 돌아 그를 마주본 채로 코를 세웠다. 특유의 자신감 서린 표정이다.
“자랑해도 좋은 상대잖아.”
귀가 조금 뜨거워지는 건 모자를 당기는 걸로 숨기고 호기롭게 말하자 이번에 시선을 돌리는 건 그였다. 이런 걸로 쑥스러워하는 거야? 그의 반응에 되레 놀라자 넌 가끔 이상한 곳에서 부끄러움이 없어. 라는 답이 돌아왔다.
“흐흥, 나라고 매번 부끄러워할까봐?”
“정말로?”
“으음~……, 그보다 루야말로 이럴 때 부끄러워하기도 하네.”
별로, 부끄러워한 건 아냐. 그렇게 돌아온 답은 조금 오랜만인 것 같은 솔직하지 않은 모습이다. 기회를 잡았다는 듯 흐응, 하고 의미심장한 반문을 하자 새로운 잇자국을 남겨주겠단 위협이 돌아와 에슬리는 얼른 사탕 수집으로 되돌아갔다.
너도나도 가장을 하고 단내를 풍기는 무리들 사이에서 바구니를 가득 채우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어딜 가나 사탕과 과자가 넘쳐 Trick or Treat을 외치기가 무섭게 바구니가 무거워졌다. 의외로 장난을 치게 해달라는 사람은 없네? 조금 아쉬운 듯 말하자 당하고 싶다면 해줄 수 있는데, 라는 답이 돌아오기도 했다. 준비할 때만 해도 심드렁해 보이더니 자기가 더 신난 것 같다니까.
사탕을 모으러 다니는 동안 의외의 인물들과 조우하기도 했다. 프랑켄슈타인 분장이라니─영상석에 남기지 못해 매우 애석한 일이다─. 그 옆에 악마 분장을 하고 낄낄거리던 남자도 지나치게 잘 어울려서 전직한 거냐고 물어볼 뻔했다. 이쪽도 악마 분장의 남자 쪽이 주도한 것이겠지. 사이가 좋군. 하고 비싼 입을 열어준 남자에게 에슬리는 그야 당연히 좋지. 라며 으스대주었다.
어느새 더 채울 곳이 없어진 바구니와 점점 더 열기를 더해가 낄 틈 없는 길을 보던 에슬리는 그만 돌아갈까? 하고 그를 보았다.
“아, 가기 전에 들를 곳이 있는데.”
* * *
챙이 넓은 모자를 잡아당겨 얼굴을 반쯤 가린다. 그 상태로 에슬리는 평소라면 일부러라도 찾지 않는 이트바테르의 뒷골목을 통과했다. 좁고 더러운 뒷골목을 빠져나오면 그곳은 골목 하나를 두고 축제가 벌어지는 곳이 있으리라 상상이 되지 않는 눅눅하고 허름한 빈민가였다.
자기 발로 여길 또 오는 일이 생길 줄이야. 목가를 문지르던 에슬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빈민가의 가운데에 사탕과 과자로 가득 찬 호박 바구니를 두었다. 특별히 무슨 생각이 있어서 한 행동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렇게 한가득 갖고 있어봤자 다 먹지도 못할 테고 그럴 바에야─ 정도의 의식.
그래도, 기뻐했으면 좋겠네. 떠나기 전 딱 한 번만 더 뒤를 돌아본 에슬리는 할 일을 마쳤다는 듯 그대로 훌쩍 돌아섰다.
“다녀왔어.”
“금방 돌아왔네?”
오래 걸리는 일 아니라고 했는걸. 문을 열자 타오르는 벽난로의 온기와 함께 그가 반겨준다. 어깨를 으쓱하며 들어서자 바구니는? 하고 날아온 질문에,
“아~, 뿌리고 왔어. 할로윈 기념 마녀의 선물인 셈치고.”
대수롭지 않게 답하자 그의 시선이 지그시 닿았다. 왜애? 좀 멋쩍은 기분이 들어 뺨을 긁적이자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며 그가 손짓으로 그녀를 불렀다. 부르는 대로 옆에 앉자 이어지는 행동은 긴 손가락이 턱을 들어 올리는 것이었다. 움찔하고 굳어버리는 그녀를 앞에 두고 루는 눈을 얇게 접어 웃었다. 말하지 않는다면 그걸로 좋지만──,
“Trick or Treat. 난 아직 과자를 받지 못했는데.”
하아~? 이미 과자 대신 장난을 받아갔잖아? 이제 와서 그런 말 하기야? 당연한 반론을 하자 이번엔 의도적일 게 뻔하게 표정이 시무룩해진다. 일부러인 걸 알면서도 바로 앞에서 눈썹을 아래로 내리며 쳐다봐오는 시선에 에슬리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짠하고 손바닥을 펼쳤다.
“그럴 줄 알고 하나 남겨놨지.”
“에.”
“뭐야, 그 반응은?”
설마 또 장난을 걸어올 거라고 예상하고 남겨둔 것은 아니었다. 그가 말한 것처럼 오늘 하루 종일 함께 돌아다니는 동안 정작 그에겐 과자를 주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쓰일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남겨놓길 잘했다. 허를 찔렸다는 듯 얼빠진 표정을 하는 루에게 에슬리는 조금 뿌듯해져 자, 하고 과자를 내밀었다. 하지만 정작 그는 내밀어진 과자를 손가락으로 살짝 밀곤 어딘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엉뚱한 답을 내놓았다.
“Trick yet Treat. 과자는 됐고 장난칠래.”
쪽,
불시의 뽀뽀였다. 가볍게 붙었다 떨어지는 입맞춤에 이어 그가 입맛을 다신다. 제 엄지손가락으로 입술을 슥 훑으며 그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에게 남아 있었다. 어쩐지 손에 든 과자와 자신이 뒤바뀐 듯한 기분에 잠겨 과, 과자 있는데. 어버버하고 말을 더듬자 그의 손이 과자를 뺏어들어 입에 쏙 넣어준다. 반사적으로 입에 들어온 것을 깨물자 아몬드의 고소함이 퍼졌다. 이게 아니었는데. 반쯤 부서진 과자를 입에 문 채 루, 과자 좋아하잖아. 하고 투덜거리자 그는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듯 태연히 답해주었다.
“과자보다 네게 장난치는 쪽이 더 맛있으니까.”
“저기…, 난 먹는 게 아니야.”
“오늘의 모겐스 씨는 뱀파이어란 걸 잊지 않았지?”
보란 듯이 송곳니를 보이며 당겨 올린 미소에 반사적으로 목을 가리자 글쎄, 물 곳이 목만 있을까? 라는 마냥 놀리는 시선이 닿았다. 겨우 과자 하나에 목이 멜 것 같아 우물거리고 있자 빨리 먹지 않으면 그대로 키스할 건데? 재촉하는 짓궂은 말에 얼른 꿀꺽 삼킨다. 낮은 웃음소리와 함께 이번에 입술이 닿은 곳은 뺨이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껴안아오며 그가 속삭였다.
“다음엔 나도 같이 가.”
알아차린 걸까. ……딱히 큰 이유가 있어서 그를 두고 다녀온 건 아니었지만.
“알았어.”
다음을 약속하는 것은 언제나 기쁜 일이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만족한 듯 껴안던 손이 올라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뒤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