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루
아델하이 데이트
: 루 모겐스
비공정이 구름을 뚫고 선착장에 도달한다. 귀족들이 타고 다니는 호화로운 것이 아닌 군용의 조금 투박하고 심플한 모델이다. 원정 갔던 이들이 돌아왔나 보군. 누군가의 혼잣말을 뒤따르듯 비공정에서 사다리가 내려오고 그 사다리를 한 번 밟고 이어 곧장 지상을 향해 흰 망토가 뛰어내렸다. 뛰어내린 이는 그 높이에서 떨어진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가볍게 바닥에 착지하여 그대로 선착장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그가 지나간 흔적으로 한 박자 늦게 불어오는 바람에 지켜보던 이들이 낮게 감탄한다.
“이번에도 별 일 없었던 모양이야.”
“그런 모양이군.”
“챠콜 경~!!! 그렇게 내려가면 위험하다니까요~!”
선착장에서 일하는 이들에겐 어느덧 익숙한 풍경이었다. 처음에는 비공정에서 뛰어내리는 사람을 보고 놀라기도 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오히려 그렇게 나타나지 않으면 부상을 입은 걸까 걱정할 정도가 되었다. 그만큼 그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있었다. 그녀, 에슬리 챠콜이.
어느새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게 된 씩씩한 기사를 배웅하며 선착장의 사람들은 느긋하게 자기 일로 돌아갔다. 그녀가 다음 출장을 갈 때면 다시 모여 배웅을 해주겠지.
선착장을 떠나서도 흰 망토는 여전히 멈출 기세가 없이 펄럭였다. 그러나 관내를 가로질러 달리는 흰 망토를 누구도 책망하지 않았다. 말리는 사람 없이 호기롭게 상관의 사무실 문을 연 에슬리는 입장과 동시에 외쳤다.
“에슬리 챠콜, 귀환 보고 올립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경.”
“감사합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오늘은 이걸로 끝인가요?”
“? 네.”
보고를 받은 선임 기사가 의아한 얼굴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원정의 보고를 마치면 수순처럼 내밀던 휴가 신청서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덧 제국군 안에서 꽤 신임 받게 된 에슬리에겐 유명한 패턴이 있었다. 첫째로 대형종과의 전투가 빈번한 변방 지역 장기 원정 임무를 주로 맡는다는 것과, 원정에서 돌아오면 곧장 휴가를 따내어 원정 다녀온 만큼 쉬는 것이다.
일한 만큼 쉰다. 쉰 만큼 일한다. 철저한 계산법을 두고 한 번은 다른 선임 기사가 영예로운 제국군을 뭐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한 소리 하기도 했지만 기피하는 이가 많은 변방 임무를 자발적으로 맡아 쌓은 공적을 무시할 수 없었다. 즉 실적이 있기 때문에 용인되어졌다.
아무튼 그런 그녀가 이번에는 돌아와서도 휴가 신청서를 내지 않았다. 이상하게 쳐다보는 상관의 시선을 모른 채 에슬리는 어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얼굴에 한가득 써내었다. 쉬어도 좋습니다. 결국 이유를 알아내지 못하고 상관이 물러나길 허락하자 에슬리의 발이 다시 지상에서 5cm쯤 떨어진 기세로 날아가듯 움직인다.
기숙사까지 돌아오자 때마침 찾으려던 상대가 바로 보였다. 제비꽃이 떠오르는 보라색의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그녀의 오랜 친우였다.
“챠콜. 돌아왔구나.”
“제니~!”
아직 있어서 다행이야. 덧붙이며 달려가자 친우는 옅은 미소로 반겨주며 다친 곳은 없는지부터 물어왔다. 그럼 물론이지. 하고 가슴을 펴자 그녀의 말을 선수 치듯 아이제니프가 입을 연다. 챠콜은 강하니까? 빼앗겨버린 제 대사에 에슬리는 키득거리고는 응, 맞아. 답하였다.
“제니, 지금 시간 괜찮아?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내게? 챠콜의 부탁이라면 물론 괜찮아.”
지금은 1인 1실을 사용하고 있어 더 이상 룸메이트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은 과거와 마찬가지로 빈번이 서로의 방을 오갔다. 아이제니프를 방에 초대한 에슬리는 그녀에게 차를 내준 뒤 편하게 있어도 된다고 말하며 욕실로 향했다. 물소리 사이로도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그럼 모겐스 경이 이곳으로 오는 거야?”
“응. 그래서 이따 마중 나가기로 했어.”
“데이트구나.”
아이제니프의 가볍게 던진 말에 벽 너머가 당황한다. 욕실 벽을 통해 데, 데이트. 응, 맞지만……. 그으. 하고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울려퍼져 아이제니프는 쿡쿡 웃음소리를 냈다. 아직도 그렇게 부끄러워 해? 그야, 아직 좀… 어색한걸. 오래 걸리지 않아 물소리 대신 물이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닦으며 에슬리가 욕실을 나왔다. 그 뺨은 온수 때문인지 다른 이유 때문인지 붉은 물이 들어 있었다.
아이제니프는 그녀에게서 수건을 받아들어 친구의 머리카락을 대신 닦아주었다. 손길만큼이나 상냥한 목소리는 그러나, 친구를 놀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색할 게 무어람. 좀 더 자랑해도 괜찮은데. 장난스러운 말에 앓는 소리를 내던 에슬리는 이야기를 돌리기 위해 그녀에게 부탁하고 싶었던 용건을 꺼냈다.
“이, 있지. 제니. 머리 땋는 법 알려줘.”
이런 부분은 여전해. 하고 목까지 열이 올라 거북이처럼 움츠린 에슬리를 내려다보던 아이제니프는 입 꼬리를 말아 올린 채 좋아, 하고 답하며 머리카락의 물기를 꼼꼼히 말렸다.
언젠가 입으려고 사두었던 흰색의 원피스 위로 느슨하게 카디건을 걸친다. 조금 심플한 웃옷에는 전에 선물 받은 귀여운 브로치를 장식으로 달았다. 브로치 예쁘다. 아이제니프의 말에 에슬리의 얼굴은 또 한 번 쑥스러운 빛으로 물들었다. 괜찮아? 어색하지 않아?
“예쁘게 하고 가고 싶은 거잖아. 잘 어울려, 챠콜.”
“……히히.”
과거라면 머리를 땋기는커녕 빗어 내리는 것도 쉽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디셈버의 도움으로 몸에서 빠져나가는 마력만큼 타인의 마력을 보충하게 되면서 머리끝이 부서질 만큼 약해지는 현상도 조금이지만 완화되어, 최근엔 조금씩 머리를 길러보고 있었다.
다시 길어지려나. 하고 종종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던 그를 떠올리며 짧은 머리카락을 요령 좋게 묶는다. 그 끝에 꽃장식이 달린 리본으로 마무리를 하고 아이제니프의 도움을 받아 옅게 화장도 해보았다. 그래도 어색한지 자꾸만 치마 끝을 만지작거리고 있자 그녀의 친구가 또 한 번 괜찮아. 하고 말해주었다. 그 말에 에슬리는 민망한 듯 웃었다.
“도와줘서 고마워, 제니.”
“뭘 이런 일이라면 언제든 환영이야.”
마지막으로 끝을 반질반질하게 닦은 구두를 신고 폴짝폴짝 가벼운 걸음으로 문밖을 나간다.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한 친구를 아이제니프가 잠시 불러 세웠다. 그녀의 두 손을 살며시 움켜쥔 아이제니프는 짙은 보라색의 눈동자를 깜빡이며 에슬리를 바라보았다.
“행복해, 챠콜?”
친구의 시선을 가만히 받던 에슬리는 활짝 웃으며 끄덕였다.
“응.”
“……다행이다. 늘 행복해야 해, 내 친구.”
또 다시 옅은 미소를 그리는 제 친구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에슬리는 한 발짝 더 다가가 친구와 이마를 맞대었다. 물론이야. 그리고 제니도, 언제나 축복하고 있어 내 친구. 속살거림은 꼭 겨울바람이 날카롭던 곳, 같은 방을 쓸 때에 한 이불을 덮은 채 주고받던 말을 떠올리게 했다. 조금 전보다 온기가 서린 미소를 서로 나누고 에슬리와 아이제니프는 이내 떨어졌다.
“내가 붙잡고 있으면 안 되지. 어서 가봐, 모겐스 경이 기다릴 거야.”
“응, 나중에 봐 제니!”
예쁜 차림새에 어울리지 않게 부스터를 단 듯 쏜살같이 사라지는 에슬리를 보고 주위의 기사 동료들이 호기심 어린 눈을 한다. 카일리피르 경, 챠콜 경 뭔가 좋은 일이라도 있나요? 누군가의 질문에 아이제니프는 데이트라고 해요. 답을 해주었다. 아, 혹시 그……? 하고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언젠가의 일이었다.
에슬리의 휴가 신청서에 기재되는 목적지는 대체로 두 곳 중 하나다. 한 곳은 엘버의 윈터가든 령, 다른 한곳은 글래디스 이트바테르. 그 중 이트바테르로 말하자면 몇 년 사이 급격히 입지를 넓히던 그레이브스 후작가의 원조를 받으며 제국군에 들어왔던 남자가 충격적인 사실을 고발한 뒤 스스로 갖고 있던 지위도 명예도 내려놓은 채 은거해버린 곳이었다.
그녀가 이트바테르를 빈번히 드나들며 그와 교류를 한다는 것이야 특별히 숨기던 일도 아니었다. 간간이 그녀를 통해 그가 죗값을 치르기 위해 애쓰고 있단 소식도 들려왔다. 그보다 제국군의 사람들이 놀란 것은 다른 일, 그러니까 바로 얼마 전 알게 된 사실 쪽이다.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장기 출장에서 돌아와, 이트바테르로 간다는 휴가 신청서를 내던 에슬리의 얼굴이 어울리지 않게 죽상인 날이었다. 마치 형장에 끌려가는 사형수 마냥, 혹은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해탈한 비사우의 성인 마냥 혼이 없는 얼굴을 하고 휴가를 떠나는 그녀를 제국군 사람들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었다. 심지어 선임 기사로부터 이번 휴가에서 돌아오면 장기 휴가─적어도 1년─를 신청할지도 모른단 언질을 들어두었기에 모두들 무슨 일인가 하였다.
차마 당사자에게 묻지는 못해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아이제니프에게 슬쩍 물어보아도 자기 입으로는 말할 수 없다는 대답만 돌아와 그저 걱정만 하길 며칠, 돌아온 에슬리의 얼굴은 나갈 때와 비교해 거의 팔라키르를 횡으로 가른 것만큼의 격차를 보였다. 그래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묻자 이번에야말로 절친은 드디어, 라는 글자를 얼굴에 써 붙인 표정을 하고 고백이 이루어졌다고 답해주었다.
「사귀던 사이가 아니었다고요?!」
「……이제는 맞아요.」
그 당시 모두가 같은 표정을 하고 경악하던 걸 당사자는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한동안 모두의 따뜻한 시선을 받은 이유도 당사자만 몰랐다. 그 때의 일을 떠올리며 짧게 고소(苦笑)를 지은 아이제니프는 어느새 보이지 않게 된 에슬리를 마저 배웅하고 돌아갔다.
* * *
기사단 건물을 나온 에슬리는 원피스 자락을 나풀거리며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쏜살같이 길을 내려갔다. 루가 아델하이까지 오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로서는 다시 방문할 만한 곳이 아니기도 했고 딱히 올 이유도 없었으니 당연했다. 그랬는데 순전히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라는 이유만으로 오기로 한 것이다.
굳이 루가 오지 않아도 내가 가면 되는데. 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가 만나러 와준다는 그 한 줄은 그녀를 몹시 설레게 했다. 덕분에 임무 중에 정신이 다른 곳에 있다고 선임기사에게는 한 소리 들어버렸지.
시내로 향하는 벽돌길 위에서 에슬리는 한 번 더 쇼윈도에 자신의 상태를 확인해보았다. 흐트러진 곳이 없는 건 물론이고 상처 자국 하나 없이 깔끔하다. 다친 곳은 이미 비공정을 타고 돌아오는 길에 힐러에게 전부 치료받은 뒤였다. 그녀가 임무를 마치는 날이면 늘 상처가 없는지부터 꼼꼼히 살피는 그이니 이 정도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좋아, 완벽해. 하고 서로 감긴 리본 끝을 손가락으로 풀어낸 에슬리는 다시 걸음을 이었다. 그러다 약속장소에 도착하기 전에 다시 발길을 멈춘 건 꽃집 앞이었다.
“한 다발 사시겠어요?”
잘게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색색의 꽃들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꽃들이 부르는 대로 좌판에 늘어선 미니 다발 앞에 쪼그려 앉은 에슬리는 그대로 고민에 잠겼다. 살지 말지의 고민이 아니었다. 전부 예뻤기 때문에 어느 것을 살지 고민한 것이다. 저기, 이건 무슨 꽃이야? 이건? 직원에게 귀찮을 정도로 질문을 하며 고심하던 에슬리는 마침내 파스텔 색으로 알록달록하게 핀 미니 장미 다발을 골랐다.
작은 다발을 손에 쥐고 얼굴을 가까이 해 냄새를 맡는다. 부드럽게 풍기는 꽃의 향기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그려졌다. 루도 보면 예쁘다고 해주려나? 기대를 안으며 에슬리는 다시 가던 길을 재촉하였다.
날씨는 여전히 맑았다. 꼭 그녀의 기분을 알아준 것처럼. 탁 트인 파란 하늘과 간간이 지나가는 몽실몽실한 구름, 적당하게 내리쬐는 햇빛, 구름을 옮겨주는 느슨한 바람은 그녀의 주위도 한 바퀴 스쳤다. 간질거림에 웃음이 흐른다. 혼자 실없이 웃다가 생소한 모습에 뺨을 손등으로 눌렀다.
신기해. 그저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꽃을 사는 것도, 누군가에게 보이기 위해 치장을 하는 것도, 스쳐 지나는 바람 한 줄기에 웃어버리는 것도.
삶이란 언제나 간절히 열망하는 것이었다. 과거에는 열망하는 이유도 모른 채 바랐고 조금 더 지나서는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행복을 어떻게든 움켜쥐고 싶어 바랐다. 그리고 지금은, ───하루하루가 늘 신기하고 또 새로워서, 살아가는 것에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더 많은 기쁨을 바라게 되었다.
신기해.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으면 만족할 줄 알았는데 웬걸. 그러면 그 다음 것을, 다시 그 다음 것을 욕심내었다. 갖지 못하는 것을 향한 안타까운 갈증과는 조금 달랐다. 새로운 것을 배우고 알아가는 설렘과 기대에 더 가까울까.
바로 지금만 해도,
‘루는 어디쯤 왔을까.’
기다림이 설렌다는 감각은 아주 예전에 그가 알려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기다릴 때마다 설렐 줄은 몰랐다. 그를 생각하며 있는 시간은 그가 곁에 없음에도 그를 채워줘, 생경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다.
어떤 옷을 입고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며 오고 있을까. 그도 기대하고 있을까. 만나면 어떤 말부터 건네지? 상상하는 것만으로 들뜬다. 잠시 눈을 감고 혼자 키득거리던 에슬리는 문득 익숙한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아…….’
그의 뒤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한 발 먼저 그를 보내준다. 아델하이에서 맡는 그의 냄새에 숨을 한 번 들이쉰 에슬리는 풍선을 터트리듯 부푼 마음을 담아 외쳤다.
“루-!”
목소리가 닿자 그가 이쪽을 향했다. 시선이 맞물리면서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미소가 햇살 아래에 온화함을 더해주었다. 꽃을 들지 않은 쪽의 손을 들어 여기, 하고 흔들던 에슬리는 그보다 몇 걸음 남지 않은 간격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 달려갔다.
달려오는 연인의 모습에 그가 옅은 미소와 함께 팔을 벌려준다. 그 품에 뛰어들며 에슬리는 생각했던 여러 말들보다도 지금 가장 떠오르는 말을 그에게 들려주었다.
“보고 싶었어!”
데이트 복장 커미션은 윱님~>< 웃는 얼굴 받자마자 이건 꼭 로그랑 같이 보여드리고 싶다, 했는데 덕분에 그림 받고 한 달만에 공개한다.
우정출연 해준 제니 고마워~! 허락해준 레시님께도 감사합니다(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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