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슬리의 체온은 한 번 올라간 이후로 쉽사리 내려오지 않았다. 아마 지금도 그릇의 깨진 틈으로 제 열기가 흘러나가고 있는 탓이겠지. 그러지 않더라도 전부터 추위는 잘 타지 않는 편이었고, 덕분에 한겨울의 레기르에 있더라도 도리어 눈을 녹일 정도로 따뜻한 몸을 자랑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에 와서 한기를 느낀다거나 허전하다거나 남의 체온이 그립다거나 하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가 있는 쪽을 힐끔 보고 다시 머리를 굴린다.
역시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괜히 얕은 수 내길 포기한 에슬리는 살금살금 그에게 다가갔다.
“있지, 루.”
“응?”
“아무 말 하지 말고 그냥 내가 해달라는 대로 해줘.”
우선 팔을 쭉 벌리는 거야. 양 옆으로. 그녀의 말에 그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양팔을 수평으로 펴준다. 새삼 길게 뻗는 팔에 키 차이를 실감하며 에슬리는 주먹을 한 번 꼭 쥐고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힌 뒤 그의 허리를 두 팔로 감아 꼭 끌어안았다.
그녀의 행동에 그가 잠깐 움찔하는 기색이 전해진다. 에슬리는 그 기색을 모른 척하며 최대한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이제 팔을 다시 내리면 돼.”
“내리기만 하면 돼?”
“……루, 루가 편한 대로.”
“흐응~……. 알았어, 내가 편한 대로.”
미묘한 어투와 함께 그의 팔이 얌전히 내려간다. 겨우 그것만으로 끝나버리자 여전히 조금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에 또 한 번 힐끔, 고개를 들다 그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후다닥 시선을 내리지만 이미 보이고 만 뒤. 어쩐지 다 안다는 듯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이마부터 다시 화끈 열이 올랐다. 민망해진 표정을 숨기기 위해 그의 가슴에 머리를 꾹 누르자 그가 옅게 키득인다.
“그냥 말하면 됐을 텐데.”
뒤이어 얌전히 늘어져 있던 그의 팔이 등을 휘감아왔다. 포옥하고 힘주어 안기자 그에게서부터 전달되는 온기에 저절로 입술이 툭 나와 버린다. 말하지 않아도 해주면 좋을 텐데. 하지만 이런 말 꺼냈다간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걸.’ 같은 답이 돌아와 버리겠지. 제가 밀릴 처지를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아 에슬리는 항변하는 대신 그의 체온을 한가득 껴안았다. 결과적으로 바라는 것을 이뤘으니 만족이었다.
으 추워라, 추위도 더위도 별로 타지 않는 몸이었지만 체감이 둔한 것과 별개로 한기에 몸이 어는 일은 피할 수 없다. 어쩔 수 없이 그녀도 익숙한 소리를 하며 발을 동동 굴린 에슬리는 짐을 풀기에 앞서 피까지 얼어붙은 것 같은 차가운 몸에 따뜻한 차를 넣어주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결심은 한 번 가로막히고 말았다.
“저기, 루?”
부엌으로 향하려는 그녀의 손을 루가 잡아버린 탓이다. 어정쩡한 자세가 되어 에슬리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그래? 라는 눈의 물음에 당혹스럽긴 자신 역시 마찬가지라는 듯 느릿하게 껌뻑이던 눈이 곧 머쓱한 기색으로 휜다. 쓸쓸했나봐. 그렇게 들려온 말은 조금 의외의 것이어서, 하지만 놀라움 다음으로 이어진 것은 두 말 할 것 없이 유쾌한 기쁨이었다.
“나를 보자마자 품에 안겼어야 했던 거 아니야?”
조금 전의 머쓱한 기색은 어디로 갔는지 뻔뻔하다 싶을 만큼 느긋해진 음성이다. 못마땅한 척 눈을 흘겨보던 에슬리는 루는 그런 말 간단히 한다니까, 하고 투덜거렸다. 불만보다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것으로, 끝내는 그를 따라 눈꼬리를 반달로 접어들며 맡아놓기라도 했지. 장난스럽게 말을 건네자 그야 당연한 거 아니니. 맡겨둔 걸 찾아야겠는데. 라는답과 함께 어서 오라는 듯 그의 양 팔이 수평을 그리며 펼쳐졌다. 고민하는 척 한 숨 뜸을 들였을까. 총총 다가가 그녀 역시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그의 허리를 감쌌다.
──따뜻해.
머리 위로 그의 숨이 닿는다. 꽁꽁 얼어있던 몸은 그의 품안에서 빠르게 녹았다. 귓가에는 바로 와 닿는 두근두근한 고동소리, 의식하지 못한 사이 그녀의 소리 또한 천천히 합쳐져 맞물려져갔다. 하나의 혈관을 공유하는 느낌일까. 같은 속도로 심장이 뛸 때마다 그에게서부터 느릿하게 온기가, 또 그의 마음이 전해졌다.
많이 기다렸던 것 같아. 평소보다 더 힘주어 안은 팔에 어렴풋이 알 것 같은 기분이 된다.
‘귀여워…….’
그녀의 생각을 알면 그는 또 영문 모를 소리를 한다고 부정하려나. 그의 품에서 키득거리는 소리를 내며 조금 더 그의 품에 파고들어 본다. 이렇게 껴안고 있을 때면 조각이 맞아들 듯 꼭 들어차 빈틈없는 거리감이 좋았다. 곁에 없는 동안에도 불쑥 생각나버리고 말 만큼.
그리웠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어. 문득 떠올린 생각에 이미 한참 녹아버린 몸에 온기보다 열기에 가까운 물이 든다. 불쑥 떠오른 생각을 지우듯 에슬리는 겨우 만족한 듯 표정이 느슨하게 풀린 그를 올려다보며 장난스럽게 웃고 말았다.
#자캐로_안아달라고_말해보자 해시태그 기반~ 위쪽은 에슬리가 말하는 거, 아래쪽은 루의 말을 들을 때의 에슬리 반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