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하하, 그래서 갑자기 불러낸 거예요? 깜짝 놀랐잖아요. 「오늘 수업 몇 시에 끝나? 스케줄 있어?」 하고 연락 와서. 재스퍼 아저씨하고 싸우기라도 한 줄 알았네.”
“싸우지 않았어. 그보다 싸워도 너한테는 안 가지.”
“에에, 뭐예요. 어린애한텐 말 못한다는 거? 의지해줘도 되는데~”
“누가 누구에게 의지를 하라고.”
남자가 한숨을 푹 내쉬자 맞은편에 앉은 교복 차림의 여자 아이가 또 까르르 웃으며 숟가락을 든다. 입에 넣는 건 이번 달의 신제품이라고 하는 초코칩 아이스크림. 캐러멜과 초코칩이 가득 박힌 걸 크게 한 숟갈 물며 여자 아이는 아저씨 방금 그거 ‘카누트’가 할 것 같은 대사였어요. 하고 덧붙였다.
“그럼 저는, 음~ ‘나라고 당신에게 의지할 것 같아?’ 하고 답해주면 되나.”
숟가락을 입에서 쏙 빼내자마자 온순한 표정이 금세 날카롭게 변한다. 순간 평화로운 카페가 눈발 날리던 촬영장 배경으로 변한 것만 같아져 아이의 말에 남자는 반사적으로 덜그럭거렸다. 아, 이런. 촬영 끝난 지 벌써 얼마나 지났는데 아직도. 남자의 반응에 아이는 또 즐거운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휴, 한숨과 함께 아이의 머리를 휘적거리며 쓰다듬어주자 두 사람의 대화를 한편에서 숨죽이고 듣던 여학생들이 꺄아~ 하는 소리와 함께 휴대폰을 맹렬히 두드리는 게 얼핏 보였다. 어디 sns에라도 올리려는 걸까. 집에 돌아가면 검색해봐야겠군. 그래도 한 동안 꼬리표처럼 쫓아다니던 『카누트-에슬리 불화설』이 루머라는 걸 겨우 다들 알아준 건 다행이다. 불화설이 아니란 걸 증명하기 위해서 두 사람은 일부러라도 자주 만나고 사이좋은 모습을 보여야 했다. 덕분에 뭐, 두 사람이서 온갖 맛집이란 맛집은 다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오늘도 그랬다. 수제 아이스크림으로 유명하다는 카페를 방문해 각자 좋아하는 맛을 시켜놓고 있었다. 아이를 따라서 저 역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한 입 먹다 자기 앞에 놓인 그릇에서 초콜릿을 덜어내 주자 아이가 반색을 하며 받아먹는다. 또 다이어트 중이에요? 그 물음에 남자는 씁쓸한 표정으로 몸매 관리는 쉬는 날이 없지. 하고 답했다.
“그렇게 열심히 관리했는데 촬영 중에 한 번 벗어줬어야지~”
“어이구 아서라.”
잘 먹는 모습을 보니 마침 선물 받아 가져온 과자를 떠올렸다. 그렇지. 원래는 이걸 주려고 불러낼 생각이었다. 색색의 머랭 쿠키를 아이 앞으로 밀어주자 제가 받아도 돼요? 놀라는 아이에게 다 먹어도 돼. 답을 한다. 어느새 빈 아이스크림 그릇을 옆으로 밀어내고 아이는 신이 난 얼굴로 쿠키를 입에 넣었다.
“그치만 아저씨 꿈, 정말 ‘에슬리’가 할 것 같은 대사였어요. 촬영은 두 사람의 관계가 애매한 채로 끝났지만 음……, 만약 ‘카누트’와 ‘에슬리’만의 엔딩을 맞는다면 어땠으려나.”
“으음~…… 하아, 아무리 생각해도 좋게 끝났을 것 같지가 않아.”
속속 떠오르는 마음 아픈 추억담에 남자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처음엔 독특한 캐릭터라고 좋아하며 배역을 받았지만 촬영이 과열되면서부터 본래의 성격과는 맞지 않는 말들을 내뱉느라 고통의 연속이었다. 1부 때엔 어린애를 울리질 않나, 2부에 와서는 특히나 눈앞의 아이를 상대로 폭언─당사자는 괜찮았다고 하지만─을 퍼붓느라 촬영이 끝날 때마다 아이에게 달려가 사과하는 연속이었다.
「연기잖아요. 전 괜찮은데 정말……」
남자라고 연기임을 모르진 않았지만 자신의 말에 상처입고 표정을 일그러트리는 아이는 당시의 씬이 끝나고도 뇌리에 박혀 사라지지 않아, 꽤 오랫동안 괜한 죄책감에 시달렸었다.
당시 촬영장에서 마주치기만 하면 조건반사적으로 사과부터 해오던 그를 아이 역시 떠올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미소를 그렸다.
“아저씨도 맡았던 배역이 쉽게 안 사라지나 봐요. 둘이 같이 시트콤이라도 섭외돼야 하나. 분위기 전환용으로.”
“시트콤? ……그거 좋을지도. 아니, 좋아! 요즘 오디션 뭐가 있지?”
“어, 어어? 지, 진심이에요?”
“물론이지!”
그 자리에서 휴대폰을 꺼내 검색하기 시작한 남자를 보며 아이는 에효, 한숨을 쉬곤 쿠키를 마저 씹어 먹었다고 한다. 그 뒤로 정말 새로 올라온 시트콤 오디션 자리를 찾아내 같이 오디션을 보러 간 건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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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쯤 당신 눈에 ‘인간’이 될까.”
제 말에 눈앞의 남자는 아주 잠깐 눈썹을 꿈틀거릴 뿐, 대꾸도 해오지 않았다. 그야 그렇겠지. 남자가 대답을 해주리란 기대는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아니, 비아냥거리는 답이 돌아오지 않은 걸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의미 없는 반복이었다. 그는 태생부터 그렇게 태어난 자고 저 또한 태생부터 이렇게 태어났다. 저라고 변하지 않는데 남의 가치관을 꺾어버리기란 쉬운 것이 아니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그에게 자신을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은,
“그야 지금도 나는 인간이지만.”
당신의 눈에도 인간으로 보였으면 하는 것은,
어째서──, 아아 그렇지.
다시 한 번 남자의 눈이 미세하게 떨림을 보였다. 찌푸려지는 얼굴은 저와 대화하는 것조차 싫다는 뜻일까 다른 상념이 떠오른 것일까. 저로선 남자의 생각을 읽어낼 길이 없다. 찡그린 상대의 얼굴과 대비하듯 씩 입 꼬리를 말아 올린다. 망토를 당기는 것이 신호였다. 이 이상의 대화는 필요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