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높이 뜬 시간이었다. 산 중턱을 깎아 지은 제국의 수도, 심장부라고도 불릴 수 있는 이곳 아델하이는 마침 구름 한 점 없이 쏘아내리는 햇빛을 받으며 약간의 긴장과 정적을 두르고 있었다. 오늘이 바로 1년에 한 번 치르는 신년 의례 날이다. 입지적 이유로 평민들은 거의 기거하지 않는 수도였기에 신년 의례라고 해도 대단한 의미를 갖추진 않았다. 늘상 보는 귀족들이 참석하여 식상한 인사를 나누었고 서로 눈치를 살피며 정보를 주고받는 거대한 정치판이 하나 더 생길 뿐. 최근에는 그 외에도 병약한 황제가 아직 건재한지 건재하지 않은지를 확인한다는 의미도 갖추었던가. 무엇이든 그녀, 에슬리 챠콜에게는 귀찮고 지루한 시간에 불과하였지만.
커다란 뿔을 든 기사가 신호를 기다린다. 황제의 행차에 맞춰 예장을 마친 제국군, 제국의 영광(Glory Of Empire)이라 불리는 붉은 단복의 청년들이 열을 맞춰 대기하고 있었다. 자기 세력이라는 걸 제대로 갖추지 못한 허수아비 황제에게 그나마 자기 세력이라 부를 수 있는 제국군은 이 의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여전히 우리가 황제의 수족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라는 선전이다. 이를 위해 황제의 손동작 하나하나에 맞춰 움직이는 퍼포먼스를 준비하면서 몇날며칠을 들볶였던지. 차라리 변이종의 상대가 나을 거라고 생각했지. 정말 기사 체질은 아니라니까. 투덜거리며 그녀를 두고 먼저 그만둬버린 동료들을 떠올리기도 했다.
하아, 제국군 빨리 때려 쳐야 하는데. 이젠 입버릇 같은 말을 속으로만 웅얼거리자 그녀의 옆에 나란히 서 있던 장신의 여성, 출신지인 겨울 산을 떠올리게 하는 흰 머리의 에르하르트에게서 눈총이 날아왔다. 소리 내어 말하진 않았지만 그 말은 필시 자세를 바르게. 정도. 이럴 때면 조금 차갑게 느껴지는─그녀의 검이 불꽃에 휩싸이는 것과는 다르게─푸른 눈에 에슬리는 뜨끔해져 다시 허리를 폈다.
그렇게 조금 더 햇빛을 받으며 서 있으니 선임 기사가 곧 폐하가 행차하실 거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그 때까지 제법 무거워 보이는 뿔 나팔을 들고 있던 기사가 양 손으로 나팔을 쥐고 힘차게 분다. 이 날을 위해 팔이 떨어져 나가도록 연습한 준기사 열은 망토처럼 펄럭거리는 국기를 신호에 맞추어 펄럭였다. 황제가 단상에 서면 그 다음 순서는……. 몇 번이고 반복한 과정을 곱씹으며 에슬리는 집중한 채 턱을 들었다.
다행히 황제는 말을 길게 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황제가 물러가고도 제국군은 귀족의 호위, 혹은 견제를 위해 장을 파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켜야 했다. 이 때에 제국군은 단순히 황제의 검이라는 상징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이용된다. 귀족들은 이 넓은 제국에서 겨우 50여명 정도밖에 인정받지 못하는 정식 기사들에게 접근하여 후원의 제안, 내지는 동맹이나 정보 교환 등 여러 의도를 내비쳤다.
이런 자리에 에르하르트 후작가의 인물이 주목을 받는 것은 당연했다. 에슬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제 옆자리에 접근하였다가 물러가는 일련의 과정을 내내 지켜보았다. 부드럽게 구슬리는 자도 있었고 비열한 미소를 띤 자도 있었다. 대부분은 예의를 잃지 않았지만 개중에는 일부러 현 가주인 장남을 언급하며 일부러 나디아를 뒤흔들려는 자도 있었다.
그 때에도 나디아는 표정이 흔들리지 않았지만 그녀의 손이 검자루를 움켜쥐는 걸 에슬리는 똑똑히 보았다. 대신 콱 달려들어 걷어차 주고 싶네, 정말. 에슬리는 그 자의 얼굴을 깊이 새겨두었다.
에슬리가 윈터가든의 성을 받은 일이 제국군 바깥으로 아직 퍼지지 않은 건 다행이었다. 평민 출신, 그것도 사일란의 기사에게 관심을 갖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래도 몇 명인가 후원이 필요하지 않느냐 말을 걸어오기도 했지만 그 때마다 에슬리는 디셈버 윈터가든의 교육을 떠올리며 우아함을 잃지 않고 응대해 돌려보냈다. 그래도 익숙지 않은 시간을 견디는 건 지치는 일이었다. 4명 째의 귀족을 돌려보낸 에슬리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나디아의 손바닥에 슥슥 글자를 적었다.
[나 방금 뭐 틀린 거 없었지?]
또 바른 자세로 서라는 말이 돌아오진 않을까. 생각을 하며 흘긋 에슬리의 시선이 위를 향한다. 그러다 나디아와 시선을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말았다. 어, 어때 나디아? 조금 긴장해서 입모양으로 중얼거리자 나디아에게선 놀랍게도, 아주 괜찮습니다. 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니 긴장 풀고 자연스럽게 행동하십시오.”
“하아…… 그럼 다행이고. 이런 자리 너무 어색해.”
“얼른 끝나길 빕시다.”
나디아가 이런 말을 해줄 줄은 몰랐는데. 격려해주는 걸까. 매서운 눈매 너머로 얼핏 비치는 그 눈빛을 제멋대로 해석하고 에슬리는 제 옆에 선 친구의 든든함을 느끼며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켜냈다.
“아, 잠깐만. 나디아.”
───장을 파하자마자 나디아는 한 번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돌아가는 발걸음을 하였다. 에슬리는 누구에게도 붙잡히지 않고 빠르게 사라지려는 나디아의 옆을 따라붙어 그녀를 불러세웠다. 잠깐만, 하고 손짓을 하자 조금 고개가 기우는 그녀를 보고 에슬리는 슬그머니 시선을 내렸다. 아 역시 이런 말 하는 거 좀 부끄러운데. 하지만 이럴 때가 아니면 말할 기회가 없을 것 같으니까. 챠콜? 하고 기다리는 눈을 받으며 에슬리는 결심을 굳히고 그 귓가에 속닥거리고 말았다.
“오늘 말야. 당신 곁에 나란히 선 내가 좀 자랑스러웠던 것 같아. 이것뿐이었어, 할 말.”
언제든 흔들리지 않는 길잡이 불꽃이 되어주겠다고 하였던가. 과거 아카데미 시절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친구가 지금도 여전히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호수처럼 평온한 시선 뒤를 채 다 읽어낼 수 없었지만 에슬리에게 나디아는 언제나 자랑스러우며 동시에 그래서 조금 멀게도 느껴지는 친구였다. 사는 세계가 다르다고 해야 할까. 마치 왕자와 거지라는 이야기처럼.
그녀는 나디아의 세계를 너무나 몰랐고 모르기 때문에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한 때는 그 이유로 제 무지를 생각하지 않고 나디아에게 괜한 심술을 부리기도 했지. 그러다 나디아가 선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수업을 듣고 교육을 받고, 그러면서 조금씩 알아나갔다. 저 어깨에 짊어진 것이 무엇인지, 나디아가 응시하고 있는 세계는 어떤 것인지.
아~… 역시 나에겐 너무 어려운데 말이지.
알아나가면서도 생각한 건 그것이었을까. 군복을 입고 허리를 똑바로 편 채 표정을 숨기지만 남의 옷을 걸친 것 같단 기분을 떨쳐내지 못했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아주 괜찮습니다.」
그 말 한 마디가 뭐라고 힘이 났는지. 지금의 나는 당신 옆에 서기에 부끄러운 존재가 아니구나. 생각하며 뿌듯해져버렸다. 이런 유치한 감상을 구구절절 전하기는 부끄러웠지만─그녀에게 나디아는 그 앞에서 폼을 잡고 싶은 친구이기도 했다─, 멋대로 할 말을 마친 에슬리는 내 말은 끝! 하고 씨익 웃어 보였다.
에슬리에게 나디아는 좀 폼도 잡고 싶고 잘난 척도 하고 싶은 그런 친구인 것 같아요. 약간 허세를 부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