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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 루 모겐스 타닥타닥 위에서 아래로,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빗소리는 어딘가 심장박동과 닮아 있었다. 자장가로 삼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리듬이었지만 그와 동시에 수마에 잠겨 몽롱하던 의식의 한 가운데로 차가운 빗방울이 톡 떨어져 잠을 깨웠다.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이자 곤히 잠든 연인의 얼굴부터 시야에 들어왔다. 온기가 와 닿는 귓가에는 규칙적인 그의 심장박동이, 바깥을 향하는 귓가로는 그 박동을 닮은 빗소리가 들렸다. 조금 몸을 비틀어 창 쪽으로 시선을 움직이자 물방울로 얼룩진 유리 너머가 여전히 먹구름으로 새까매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다만 아직 새벽이겠지, 하고 조금 서늘한 방의 공기로 추측을 해보았다.꿈을 보았던 것 같다. 어떤 꿈인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다만 깨어나기 직전까지도 가슴이, 누군가가..

with.루 2018.04.23

16세 에슬리

: 루 모겐스 대화하고 있던 상대가 갑자기 뒤바뀌는 경험은 쉽게 벌어지지 않는다. 이것도 뭔가 이상? 저번처럼 상자가 열리기라도 했나? 그렇게 의심하며 에슬리 챠콜은 눈앞의 변화에 눈을 깜빡였다. 커다랗고 까만 눈동자가 달라진 상대를 물끄러미 탐색한다. 낯선 것을 앞에 두고 경계하는 야생동물의 표정이었다.“루?”아마도.하지만 그녀가 아는 루는 아니다. 냄새가 달랐다. 그야 생긴 것도 달랐지만. 키는 더 자란 것 같았고 머리는 짧아졌다. 눈은,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색이 빠진 듯─마치 제 머리처럼─한 그의 오른쪽 눈에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그는 미래에서 왔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눈앞에 증거가 있으니 에슬리는 믿기로 했다. 대신 그 눈은 어쩌다 그런 거야? 물었지만 대답은 들..

with.루 2018.04.23

상실

: 루 모겐스 ※ 아래의 로그는 인세인 시나리오 낙원(楽園)의 플레이를 바탕으로 한 후기 연성입니다. 원 시나리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시나리오를 알지 못하는 분들은 열람하지 않기를 권장합니다.원문 시나리오 : https://staygold-trpg.stores.jp/items/582f2be7a458c07583005140글 쓸 때 같이 들은 노래 PC1 : 에슬리 챠콜 / PC2 : 루 모겐스 ───어디선가 빗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멍하니 고개를 들자 반사 작용처럼 눈물이 툭, 데구르르 떨어진다. 다시 한 방울, 또 한 방울. 어딘가 몸 안쪽이 고장나버리고 만 것만 같았다. 눈가에 맺힌 눈물 위로 새파란 하늘이 비친다. 덩달아 눈물도 파랗게 물들었다. 하늘은 빌어먹게도 맑았다. 그렇겠지. ..

with.루 2018.04.23

Trust

: 루 모겐스 ※ 아래 로그는 coc 시나리오 In the Cage의 플레이를 바탕으로 한 2차 연성으로 원 시나리오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미플레이자는 열람하지 않기를 권합니다.원문 시나리오 : https://www.pixiv.net/novel/show.php?id=7038884 NPC : 루 모겐스 / PC : 에슬리 챠콜 그릇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따뜻하게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손에 들었다. 한 모금 차를 마시면서 정말이지, 이상한 꿈이었어. 자연스럽게 그 말이 흘러나왔다. 아직도 손바닥에는 그 부드러운 털의 감촉이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잘 먹었어?”“응. 맛있었어, 엄청.”설거지를 마쳤는지 옆으로 같은 찻잔을 들고 그가 앉았다. 이쪽을 향해오는 온화한 시선에 찻잔을 들지 않은..

with.루 2018.04.23

그림의 소녀

: 루 모겐스 1.새벽바람이 스산하게 불어오는 시간이면 오래된 저택의 복도 한편에서 흰 발이 나타났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은 그늘을 벗어남에 따라 나풀거리는 하얀 원피스, 불이 켜진 촛대, 어깨에 닿지 않는 단발머리와 서늘한 무표정까지 찬찬히 형태를 갖추어나갔다. 저택에 사는 이들이라면 익숙한 낡은 그림 속 인물과 꼭 닮은 소녀다.그림 속 소녀는 저택에서 살았던 누군가의 초상화는 아니라고 했다. 어째서 이런 곳에 걸리게 되었는지, 누구를 그런 것인지도 모르는 채 그저 오래도록 복도 한편에 방치되어 왔다. 점차 그 자리에 그림이 걸려 있었다는 것조차 잊혀질 만큼.빈 방이 많은 서관의 복도는 사람들이 잘 오가지 않았다. 덕분에 바닥에 얕은 먼지가 깔려 있기도 빈번했다. 그 위로 맨발의 발자국이 찍히기 ..

with.루 2018.04.23

[호그와트AU] 기숙사 배정

챠콜, 에슬리.이름이 불림과 동시에 에슬리는 폴짝 뛰어오를 듯 일어나 모자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거의 달리기에 가까운 경보였지만 아슬아슬하게 달리진 않은 몸짓에 교수석에 앉아 있던 선생 중 누군가는 표정을 찡그린다. 예의가 없어. 슬리데린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서는 대놓고 질색인 표정을 내보였다. 저런 애가 우리 기숙사에 올 리는 없지. 어느 가문이야? 머글 출신이라고? 그새 슬리데린의 정보망으로 낡은 옷차림을 한 꼬마 계집에 대한 정보가 퍼진다. 한참 자기들끼리 수군대던 슬리데린은 곧 저 꼬마가 자기네 기숙사에 배정될 일이 없단 결론을 내리고 안심한 얼굴로 나란히 외쳤다. 저런 아이까지도 이곳 호그와트에 입학할 수 있다니, 멀린의 자비란!래번클로의 학생들은 대부분 관심 없단 표정이었다. 저 아이가 우리..

심연의 서막 2018.01.21

자랑스러움

: 나디아 에르하르트 해가 높이 뜬 시간이었다. 산 중턱을 깎아 지은 제국의 수도, 심장부라고도 불릴 수 있는 이곳 아델하이는 마침 구름 한 점 없이 쏘아내리는 햇빛을 받으며 약간의 긴장과 정적을 두르고 있었다. 오늘이 바로 1년에 한 번 치르는 신년 의례 날이다. 입지적 이유로 평민들은 거의 기거하지 않는 수도였기에 신년 의례라고 해도 대단한 의미를 갖추진 않았다. 늘상 보는 귀족들이 참석하여 식상한 인사를 나누었고 서로 눈치를 살피며 정보를 주고받는 거대한 정치판이 하나 더 생길 뿐. 최근에는 그 외에도 병약한 황제가 아직 건재한지 건재하지 않은지를 확인한다는 의미도 갖추었던가. 무엇이든 그녀, 에슬리 챠콜에게는 귀찮고 지루한 시간에 불과하였지만.커다란 뿔을 든 기사가 신호를 기다린다. 황제의 행차에..

심연의 서막 2018.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