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 꽃을 꺾었나 52

29 안녕

: 아타고 유이 주먹 쥔 손 위로 다시 손이 겹쳐진다. 포개지고, 단단히 잡힌다. 어깨를 데우는 체온에 이번엔 안심이 되어 눈물이 비집고 나왔다. 불안을 이야기해서 더 불안해졌을까? 아니. 도리어 조금 시원해졌다. 겨우 혼자 담아두었던 이야기를 토로할 수 있었다.그리고 한 번 더 선을 긋는다. 얘기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사라질까봐 불안한 마음이 든다면 확인시켜주겠다고 해주었다. 하루하루의 내일을 증명해주겠다고 했다. 세이라가 유이에게 들려준 말, 그리고 메아리처럼 되돌아온 말.그 다정에 세이라는 울며 웃었다. 기쁘다. 알고 있다. 전부 알고 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반복된 절망과 좌절이 있다. 뿌리 깊게 박힌 학습이 있다. 세이라의 발은 아직도 땅에 닿지 못한 채 공중을 더듬고 있었다. ..

28 뜨개질

: 개인 로그 최근 세이라는 방에서 두문불출하는 일이 잦았다. 첫째 이유는 자꾸 기침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는 것이었고 둘째 이유는 그 김에 느린 손을 다독여 뜨개질을 하느라였다. 덕분에 제 곁에 메카를 두고 재울 수 있는 게 어느새 세 번째 이유까지 되었을까.콧노래를 부르며 실과 실을 엮는다. 대바늘을 이리 꿰고 저리 꿰면 느리지만 한 줄, 한 줄 길이가 늘어났다. 행복을 안겨주는 노랑, 사랑이 연상되는 진홍, 아침햇살 같은 주황, 바다가 떠오르는 짙은 파랑, 다정함이 담긴 갈색, 순결한 백색, 파란 실 사이에 갈색 실을 같이 꿰어 두 색의 실로 조합을 하기도 하고 흰색 실 사이사이로 푸르른 색의 실을 이어서 눈의 결정을 넣어보기도 한다.스스로 생각해도 부쩍 기술이 늘어난 게 제법 뿌듯하다. 어쩌다..

27 바늘 천 개針千本

: 아타고 유이 *거짓말 하면 바늘 천 개 삼키기───, 어린아이들이 손가락을 걸고 하는 약속.그 말이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건 몇 살까지일까.바늘 천 개쯤이야. 아무렇지 않은 아이로 자라고 말았는데.두려워하는 게 있다면 그녀를 상처 입히는 것. 그럼에도 상처 입힐 걸 알면서도…… 그만두지 않는 자신.* 「전부터 자꾸 앨리스는 왜 쓰는 건데?」[……미안해요.]이상하게도 그 날은 유독 평소처럼 얼버무리질 못했다.「미안하다는 말은 이제 정말 그만. …듣기 싫어」어쩌면 정곡을 찔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멀리 두고 온 줄로만 알았던 마음이 콕콕 쑤시는 걸 느꼈다. 고개를 떨구고 마는 그녀를 곁에 두고 세이라는 한참을 입술만 달싹거렸다. 유이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아요. 속상하게 만들고 싶은 것도 아니에요. 하지..

26 삼색실

: 아오노미야 미조레 얼굴을 가린 가방에서 빼꼼 나와서 살짝 눈웃음을 보인다. 사과할 것까진 아니었는데.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며 가방에서 꺼낸 건 나무로 만든 빗이었다. 고향에서 가져온 것 중 하나로 잘 깎아 기름을 먹이고 다듬어 머리카락에 닿는 느낌이 좋은 빗이다. 세이라 자신은 곱슬기가 심해서 이런 빗으로는 쉽게 빗어지지 않았지만 저와 다르게 실타래를 늘어놓은 듯한 그의 머리카락이라면 괜찮겠지.“자아, 잠시만 돌아 앉아 주세요.”미용실이 되어주겠다고 자신하였지만 막상 길고 고운 머리카락을 보니 고민이 되었다. 스스로도 단순하게 땋는 것 외에 크게 관심이 없던 분야이고 화려한 건 그가 훨씬 더 잘 하지 않을까. 머리로는 계속 고민을 하면서 리본을 풀어 내린 그 머리카락을 빗으로 길게 길게 빗어내려 주었..

25 뭍의 소리

: 시나요리 아리사 자장가는 자주 부르던 노래였다. 특별히 좋아하던 곡이었는지를 물으면 스스로도 그런가요? 하고 애매한 답밖에 줄 수 없으나 듣기에 좋은 곡보다 부르기에 좋은 곡이라는 표현이 알맞을 것이었다. 자주 부르던 노래가 다른 사람을 통해 다른 음색으로 들리는 게 신선했다. 이렇게도 부를 수 있구나, 하며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하였다.고요한 밤이었다. 공기가 조금 차고 시린 것도 같았지만 그래서 더 맑고 깨끗하던 밤이었다. 새까맣고 차가운 밤 위로 그의 목소리가 퍼졌다. 차가운 색 위로 그의 목소리가 따스한 색을 덧칠하는 듯 했다. 잔잔하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원을 그리며 세이라에게도 분명히, 또 선명히 닿았다.목소리는 꼭 그녀를 불러들이는 것 같았다. 조금 더 가까이, 한 발 더 그에게, 소리..

24 未来

: 개인 로그 - 고등부 기말과제 흰 종이를 앞에 두고 펜을 톡톡 두드려 고민하다가, 곧 천천히 제목과 이름을, 그 아래로 문장을 적어 넣기 시작한다. 未来世潭 惺空 저의 미래는 새하얘요. 백지와 같이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고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어요. 혹은 아직 넘기지 않은 책의 뒷페이지와 같아요. 굳이 그 페이지를 서둘러 넘기고 싶지 않아요. 어차피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넘어갈 페이지이니까요. 또 제게 미래란 흘러가는 물줄기와 같아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당연하게 멈추지 않고 흐르는 것. 그 흐름에 순응하며 따르는 것으로 이제까지가 그랬듯이 앞으로도 다름없는 나날이 될 것이에요. 덤덤하게 가장 여과된 것으로 내용을 채운다. 길게 이어지는 문장은 허울만 좋을 뿐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23 소리가 먹히는 곳

: 개인 로그 똑,토옥, 톡.뚝.아득한 의식 너머로 물소리가 들린다. 고이면 떨어지고, 떨어지면 다시 고이는 순환.떨어지는 물방울은 검은 굴속을 채워나간다. 울퉁불퉁하고 차가운, 그러면서도 습한 굴의 안을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수위가 높아질수록 세이라는 오싹해진다.───아.그렇구나. 이것은 꿈이다. 나쁜 꿈이다.깨달음과 동시에 빠지지 않기 위해 허우적거렸다. 신기하게도 꿈속의 세이라는 팔다리가 아주 무겁다. 물속은 그녀의 고향과 같은 곳인데 마치 누군가 잡아당기듯, 밑으로… 또 밑으로……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검은 손들이 팔을, 또 다리를 옭아매는 것 같았다. 언젠가 본 동화 속의 바다마녀를 떠올렸을까. 이리 오렴. 착하지. 마녀는 차갑고 축축한 목소리로 세이라의 몸을 휘감았다. 허리를, 발을, 다음..

22 안도와 확신

: 아타고 유이 학원을 나가고 싶었다. 당장에, 탈출하고 싶었다. 벗어나서 돌아가고 싶었다. 고향으로, 그리운 바다로, 사랑하는 할머니의 곁으로.하지만, 만일 학원을 나가게 된다면 하나의 선택이 되겠지. 무의식중에 그 생각을 피했다. 소중한 한쪽과 소중한 다른 한쪽. 양쪽을 다 고를 수는 없다. 그래서 저도 아직 하지 못했던 선택을, 우습게도 그녀에게 내민 적이 있었다.「학원 문이 활짝 열렸을 때, 저는 나가고 싶다고 하면요? 유이 씨에게 같이 나가자고 하면, …그래도 유이 씨는 학원에 남아버릴 건가요.」그 때 실은 충동적으로 말해놓고 각오, ──라기보단 겁을 집어먹었다. 선택받지 못하면 어쩌지. 그리고 그녀가 자신에게 질려서, 놓아버리면 어쩌지. 이상한 소리나 해버린 자신에게 화를 내도 어쩔 수 없다고..

21 선물

: 나카지마 마미 “이따 한… 저녁 시간 넘어서 7시쯤… 교무실로 와줄 수 있나요?”그 말에 네에, 하고 답을 하면서도 의아한 기분이었다. ‘혹시 뭔가 잘못해서 꾸중을 들을까?’ 다행히 이런 걱정을 할 만한 학생은 스스로 생각해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교무실이란 공간이 주는 필연적인 긴장을 안은 채 시간에 맞춰 조심스럽게 찾아가면 익숙한 책상과 나카지마 선생님이 보였다.토끼 인형들은 여전할까. 눈만 힐끔거리면서 꾸벅 인사를 하자 잠시만요. 그 말과 함께 무언가 찾듯 부스럭부스럭하는 모습에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면 다. 그러다 짠, 하고 시야에 나타난 것은 눈이 내리는 하늘이 연상되는 하늘색의 코트와 장갑이었다.“겨울 코트 하나 선물해주고 싶어서요! 이… 이건 제가 만든 장갑…….”리본이 묶인 귀여운 디자인..

20 3년

여기서부터 고등부→ : 개인로그 ▶고등부 1학년, 봄 “조, 좋아해요. 선배!”이제 같은 건물에서 못 본다고 생각하니까 그게 싫었어요.1살 아래의, 기술반의 아이였다. 귀가 빨갛게 되어 고백을 해왔다. 서로 오며가며 얼굴을 알고 지낸 게 2년, 그러다 방에 둘 진열장을 놓고 기술반에 의뢰를 고민하던 세이라에게 먼저 살갑게 도와주겠다고 말을 꺼낸 것을 계기로 가깝게 지낸 게 지난 반 년.학원에서 머문 기간이 긴 편이기도 하고 타고난 성정이 온화한 세이라는 후배들에게 제법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어디까지나 의지가 되거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선배로서.이런 고백은 처음이라 당황해버렸다. 곤란한 듯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리자 아이는 죄송해요. 너무 갑작스러웠죠. 하고 슬그머니 한 발 물러섰다. 그 모습에 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