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 꽃을 꺾었나 52

38 알라딘과 자스민

: 아케치 요아케 그 분은 꼭 마법처럼, 기적처럼, 신비롭게 제 눈앞에 나타나셨어요.성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본 적 없는 공주님은 두 손을 모은 채 여전히 꿈속에 잠긴 듯 눈을 감았어요.그리고 이제까지 제가 지낸 세계가 얼마나 상자 속이었는지를 가르쳐주셨죠.지금 눈앞에 있는 건 공주님을 마법처럼, 기적처럼, 환상의 세계로 데려가준 도둑 친구가 아니라 갑자기 사라진 공주님을 찾느라 혼비백산해 화가 났던 궁전 사람들인데 말이죠.뒤늦게 감았던 눈을 뜨고 화난 사람들을 본 공주님은 몇 번이고 빼꼼빼곰 고개를 숙여가며 다시는 말도 없이 나가지 않겠다고 사과를 해야 했어요.그녀의 멋진 도둑 친구가 그 광경을 보았다면 “세이라, 또 별 거 아닌 일로 사과하고 있지 않아?” 하고 고개를 들게 해주었겠죠.방으로 돌아온..

37 Happy birthday

: 세탄 세이라 “발성기관이 완전히 망가졌습니다.”입을 뻐끔거렸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숨만이 목을 오갔다. 완전한 침묵이다. 그리고 고요다. 나오지 않는 소리만큼 세이라는 마음 또한 편해졌다.딱 스물여덟 살의 일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여러 스카우트 제의 중 심사숙고하여 해양연구소를 골랐다. 도쿄에서 동북 방향으로 올라가 태평양 연안과 맞닿는 어느 외진 땅이었다. 사시사철 따스한 남쪽 섬에서 살던 그녀에게는 살이 에일 것 같은 추운 땅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곳이 좋았다. 수많은 스카우트 제의 중 가장 바다에 대한 열의를 가진 사람이 있던 곳이다.바닷속은 여전히 우주와 마찬가지로 미지의 영역이었다. 특히나 심해로 갈수록 인간으로는 닿을 수 없는 영역이 되었지만, 세이라의 앨리스를 이용하면 그 미..

36 My Dearest, A.

: 시나요리 아리사 * * * 「함께 관람차를 타주시겠어요?」그는 또 다시 그녀의 어리광을 들어주었다. * 삐걱, 또 한 번 삐걱.바람에 흔들리며 율동하는 작고 둥근 공간.아마도 부드럽게 올라가고 있을 관람차였지만 눈을 감은 탓일까. 선명해진 다른 감각들을 통해 톱니바퀴가 한 칸, 다시 다음 한 칸을 향해 꺾어지듯 미약한 흔들림이 느껴졌다.지금쯤 얼마나 올라왔을까. 풍경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높은 곳에 올라가 보는 하늘은 얼마나 예쁘고 또 가깝게 느껴질까. 살짝 호기심이 들어 눈가를 덮은 커다란 손 위에 제 손을 겹쳐 장난치듯 긴 손가락 끝을 부드럽게 문지르자 웃음소리가 나직하게 들려왔다.손, 뗄까?물음에 대한 고민은 짧았고 답은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신하였다. 지금을 바꾸지 않는다.세이라는 조심성이 많..

35 신화

: 시나요리 아리사 옛날, 어느 한 옛날, 낮과 밤이 결코 뒤섞이지 않던 땅이 있었다.태양은 한 곳에 머물러 움직이는 일이 없었고 그로 인해 반대편의 땅은 어둠이 걷히는 일이 없던, 세상이 둘로 쪼개어져 있던 시대가 있었다.처음 인간들은 해가 지지 않는 땅을 두고 축복이라 여겼고 어둠이 걷히지 않는 땅을 저주라 손가락질하였다. 밤을 두려워하고 낮을 숭배하려 했다. 그러다 곧 깨닫고 말았다. 어느 쪽이 축복이거나 저주인 것이 아니란 것을, 그저 이 모든 것이 비극이란 것을.밤이 없는 땅에서 인간들은 쉴 수 없다. 낮이 없는 땅에서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다. 어떻게든 땅에 정착해보려고 무수히 노력을 하던 때도 있었지만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이 땅에 지쳐 점차 하나, 둘 떠나가게 되었다.그리하여 낮과 밤이 ..

34 가라앉지 않은 그 아침

※ 이하의 로그는 coc 시나리오 vivi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시나리오를 플레이 할 예정이 있는 분은 열람하지 말아주세요. : 시나요리 아리사 전구의 불빛이 깜빡인다. 혹시 밤이 찾아와도 전부가 어둠에 가라앉지 않도록 켜둔 옅은 조명에 세이라는 손등으로 눈을 문지르며 깨어났다. 동그란 전구의 은은한 빛 덕분에 어렴풋 방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바깥은 아직 해 뜨기 전의 새벽인 것 같았다. 해 뜨기 전, 검은 장막에 가려진 공기는 여름이 물러갔다는 실감이 들도록 서늘하고 조금 축축했다.드러난 맨 어깨가 싸늘했다. 목을 움츠리며 이불 안으로 다시 파고들면 따뜻한 공기가 그녀를 감싸주었다. 이불 아래, 체온과 체온이 맞닿을 듯 조심스러운 거리, 온기는 그 틈에서부터 피어오르고 있었다. 밤을 지새..

33 손, 뺨, 높낮이

: 시나요리 아리사 어린 시절에는 그렇게 차이가 나는 줄 모르는 채였다. 말라서 더 길게 보이는 팔다리 덕에 한참 큰 것 같았지만 막상 가까이 다가가면 눈높이는 엇비슷하였고 손을 내밀어 맞잡으면 아이답게 따뜻한 체온이 제 손에 알맞게 들어왔던 기억이 난다. 찻잔을 쥐던 섬세한 손가락, 이마를 덮는 덥수룩한 머리카락과 그 틈새로 보이던 순하고 다정한 빛. 동갑내기의 잘 웃던 그 아이. 그렇게 나란할 줄로만 알았다.쭉 어린 아이인 채로는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꼬박꼬박 정중한 존대를 구사하고 수줍은 빛으로 뺨을 물들이고 조용한 목소리를 내던 아이는 어느새 훌쩍 자라 눈이 따라갈 수 없는 높이에 우뚝 서버렸다. 제 손을 모두 덮고도 남을 만큼 자란 손발, 더욱 길쭉해진 팔다리. 단정하게 다듬어진 머..

32 ___에게

: 엔딩 로그 ___에게.오늘은 날씨가 무척 좋아요.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은 포근하고. 불어오는 바람이 조금 따뜻한 것도 같던데 이제 곧 여름이 다가오려는 걸까요. 벚꽃이 다 져버린 건 아쉽지만 꽃잎이 진 자리로 푸르른 새 잎사귀가 돋아나는 풍경 또한 무척 곱네요. 나무가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계절이 달라지고 있다는 실감이 들어요. 집 앞에 커다란 감나무도 있는데 말이죠. 가을에 감이 열리면 무척 맛있단 이야기도 들었답니다. 벌써부터 가을이 기대되겠어요.새 집에 대한 감상을 말하자면 이제야 겨우 저희 집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 같아요. 막 이사 왔을 당시엔 새 집 냄새도 적응이 안 되고 물건들의 위치도 정신이 없고…… 남의 집이란 느낌이라 발소리 하나까지 조심하며 지냈는데, 지금은 집에 돌아오면 다녀왔습니..

31 나카노 미야코

: 나카노 미야코 ……의식 너머로 물이 졸졸 흘렀다.종종 생각한다. 애정을 주는 것은 꽃을 키우는 것과 같다고.흙을 고르고 씨앗을 심고, 위를 잘 덮은 뒤 흠뻑 물을 준다. 그 뒤로도 끊임없이 애정과 관심, 주의를 기울여주어야 한다. 물이 부족하진 않은지. 햇빛을 충분히 받고 있는지. 성장을 방해하는 잡초는 없는지.그렇다면 싹이 튼 다음에는? 꽃이 피어난 뒤에는?자신 있는 건 계속 좋아하는 것. 먼저 떠나지 않는 것. 곁에 머무는 것. 느림보인 그녀도 할 수 있는 꾸준한 일. 그렇게 애정을 쏟는 것은 세이라가 자신 있는 일이었다. 그 다음은 그러나, 알지 못했다.언젠가의 대화가 재생된다. 내가 나쁜 사람이어도? 악당이어도? 도덕적이지 못해도? 그래도 넌 괜찮을까. 그 때에 세이라는 무어라 답했더라.괜찮아..

30 언젠가의 미래에

: 칸나즈키 마요이 봄이 오고 있었다. 어느새 눈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졌고 대신 땅이 부드러워지며 그 위로 새순이 올랐다. 곧 목도리도 필요 없는 계절이 되겠지. 또 한 발 늦고 만다. 느린 손을 탓하며 세이라는 부지런히 목도리를 짰다. 진도가 느린 이유는 달리 더 있을지도 몰랐다. 쫓아가지 못하는 건 손만이 아니라 마음도 마찬가지였다.언제나 그랬다. 초등부 시절부터 늘 앞서 나가는 선명한 붉은 머리, 그에 비해 한참 느린 자신. 완벽해질 거야. 최고의 자리에 올라야지. 빠른 발보다도 더 높은 곳을 향하는 눈. 그 눈이 닿는 곳을 따라 응시해보기도 했지만 제겐 너무나 눈부시기만 했다. 바로 보지 못할 만큼.저는 너무 높아서 무서울 것 같아요. 혼자서 외로울 것 같아요. 마요이는 그렇지 않은가요?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