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의 서막
800년 후의 당신에게
: 아니카 와일리
무거운 공기가 감도는 공간이었다. 무겁고 정결한, 지나치게 깨끗한 나머지 부담스러울 만큼 신성한 공기로 채워진 공간은 숨을 쉰다는 당연한 행위조차 불편하게 만들었다. 목 끝까지 채워두었던 제복을 느슨하게 풀며 에슬리는 어깨를 휘휘 움직였다. 찌뿌듯해. 이럴 거면 변이종 상대가 백배는 쉽지.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번에 그녀가 의뢰 받은 일은 고대 유적의 탐사였다. 비공식적으로는 트레저 헌터니 모험가니 멋대로 돌아다니지만 공식적으로는 국가의 허락 없이 출입이 제한되어버린 거대한 신성의 장(場) 테힐라. 그 중에서도 천 년도 전에 세워졌다는 유적지를 목적지로 했다. 최근 그 주변에 이상한 기운이 감돈다고 했던가. 그 심상치 않은 기운을 파헤치는 게 이번 탐사의 목적이고 그를 위한 파티를 꾸리는 일이 에슬리가 받은 명령이다.
다행히 황제는 에슬리가 고른 구성원에 참견할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에슬리는 직위에 관계없이 자유롭게─이를 테면 이제 제국군도 아니게 된 연인을 포섭한다거나─멤버를 고를 수 있었고 덕분에 탐사는 마치 유람이라도 되듯 즐거울 줄로만 알았다.
일이 생각처럼 쉽게 풀리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곳에서 카누트를 만나고 만 것은 에슬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첫 번째 일이다. 그리고 마지못해 동행하게 된 두 사람이 탐사 중 발견한 아티팩트로 인해 눈부신 빛에 휘감기며 일행과 떨어진 게 예상하지 못한 두 번째 일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예상하지 못한 일은 빛이 사라지고 난 뒤 눈앞에 나타난 낯선 제국군복의 남자였다. 청년? 아니, 소년일까. 에슬리보다도 작은 키에 앳되고 선하게 생긴 얼굴. 정기사와 수습 기사를 합쳐도 100명이 되지 않는 소규모 집단인 제국군에서 에슬리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의 기사였다.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였는지 제국군복을 입은 에슬리를 기묘하게 바라보며 누구시죠? 같은 말을 해왔다. 그래서 에슬리는 되돌려주었다. 그쪽이야말로 누구?
서로 통성명을 하고 상황을 이해하고 이해한 끝에 상대가 800년 전(후)에서 왔다는 걸 알고 놀라기까지는 차 한 잔 이상의 시간이 흘렀다. 그마저도 중간에서 중개를 해주는 카누트가 없었다면 더 오래 걸렸겠지. 800년 후의 세계라는 걸 알게 된 남자-아니카라고 스스로를 소개해주었다-는 직전까지 보여주던 평온하던 표정이 어디 갔나 싶을 만큼 당황하고 초조한,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여 도리어 에슬리 쪽에서 괜찮을 거라고 달래주어야 했다.
표정에 생각이 드러나는 편이라고 느꼈다. 침착해 보이는 인상과 다르게 성격이 급한 것 같다고도.
어떻게든 되겠지, 하고 제대로 된 안심은 시켜주지 못하던 에슬리와 달리 카누트는 시공간에 이상을 불러온 아티팩트를 조사하여 돌아갈 길을 강구해보겠다거나, 유적 안으로 더 들어가면 이러한 일을 발생시킨 근원되는 힘에 닿을지도 모른다는 등 좀 더 실질적인 안심을 시켜주었다.
“저 분은 꼭 선생님 같군요.”
“아, 당신에게도 느껴지는구나. 교관님이었어. 예전에.”
낯선 상대가 나타나서인지 카누트는 대놓고 보이던 에슬리를 불편해하는 티를 제 안으로 갈무리 한 것 같았다. 내숭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에슬리는 구태여 그런 카누트를 긁지 않았다. 다만 두 사람이 생각했던 것보다 아니카의 눈치가 빠르다는 게 문제였다. 함께 유적의 아래층으로 향하는 사이 아니카는 몇 번이나 에슬리를 상대로 송곳 같은 말을, 태도를 보이는 카누트를 의아하게 여겼고 기어코 그 문제를 언급하였다.
카누트의 내숭은 어디까지나 누군가 들추기 전에 일부러 내보이지 않는 것이다. 결국 들추어지고 만 그것을 숨기려들 정도로 철저하지 않았다.
“그 애는 사일란이야.”
툭 하고 내뱉은 목소리에는 그 단어를 입에 담는 것조차 꺼린다는 기색이 역력했지. 이걸로 너도 이해하겠지? 내가 저 애를 왜 꺼리는지. 그런 의미가 축약된 낮은 목소리에 에슬리는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천천히 문질렀다. 곱게 자란 도련님은 이제 무슨 반응을 보이려나. 영예로운 제국군에 사일란이? 혐오하려나. 혹은 귀족의 관용을 보이려나.
아니카의 반응은 예상을 빗나가 그 무엇도 아니었다.
“사일란…… 누의 일종인가요? 아, 죄송합니다. 실례되는 질문이었다면.”
───아, 그렇지.
800년 전엔 사일란이 없었지. 아, 그래.
사일란이 이 세계에 나타난 건 그리 오래 된 일이 아니니까. 간과했던 건 카누트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새까만 눈동자가 꿈틀거리며 불편한 심정을 더욱 내보였다. 무엇을 더 설명해야 할까. 그걸 고민하는 것 같았다.
설명하고 싶지 않다면 설명하지 않으면 그만일 텐데. 에슬리에게 카누트는 저런 점에서 여전히 어려웠다. 이해할 수 없었다. 사일란을 싫어하고, 싫어하는 스스로를 혼란스러워하고, 그렇다면 잠시 멈춰도 될 텐데 타성에 젖은 듯 싫어하는 걸 멈출 줄 모르는 이상한 사람.
카누트의 말이 이어질수록 아니카는 고운 얼굴을 무시무시하게 일그러트렸다. 차가운 색을 하고 있으면서 겉보기보다 더 뜨거운 사람이었다. 그와 그녀 사이를 가르고 막아서는 아니카를 응시하며 에슬리는 새삼스런 얼굴이 되었다. 자기보다 작고 어린 사람-그러나 본인은 800년 전의 조상이자 선배라고 여기는 것 같은-에게 감싸지는 건 기묘한 기분이다. 저기 있잖아, 나 당신에게 지켜질 정도로 약하지 않으니까.
“게다가 딱히 상처받지도 않았고. 우리 사일란은, 혐오 받아 마땅한 종족이고.”
“……그런 식으로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말투는 좋지 않아요. 에슬리 경.”
어딘지 아픈 사람처럼 가슴께를 손으로 누르며 말하는 아니카를 보고 에슬리는 웃고 말았다. 정말,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대단한 사람이네. 디셈버와는 다르게 어딘지 투명한 고드름, 아니지. 눈앞의 상대는 고드름처럼 차갑지 않다. 그보다는 수정에 가까울까. 만지는 사람의 온도에 따라 제 온도도 변하는 투명하고 깨끗한 보석. 보석을 먹는 종족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자신까지 보석 같은 걸까. 속이 비쳐 그 너머가 보일 것 같은 푸른 수정. 에슬리는 아니카 와일리를 그렇게 보았다.
그러니까 이런 깨끗한 말도 할 수 있지.
그를 비꼬거나 비난할 생각은 아니었다. 에슬리는 그가 싫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그의 종족이 신기하기도 했고 흥미와 우호를 품었다.
다만 그녀가 찌르고 싶었던 건 아니카 한 사람보다는 그를 대표로 하는 800년 전의, ───역사상의 인물들.
디셈버에게 들었다. 기록도 읽었다. 팔라키르가 몰락하게 된 이유는 당시의 마지막 황제, 그 황제가 자신의 역할을 내팽개친 탓이라지? 그리고 폭군 황제에게 반발한 이들이 나라를 올바르게 되돌리겠다고, 그렇게 해서 제국군과 반란군이 격돌하는 일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 격돌 끝에 양 세력 모두가 진실에,
‘진실’이라고 하는 것에 닿아버리고 굴레에서 벗어나는 세계를 모른 척하였다고.
눈앞의 인물은 진실에 닿아, 세계를 지금의 상황에 놓이게 만든 장본인 중 하나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녀를 만들어낸 원인제공자 중 하나이기도 하다. 저도 모르게 비뚤게 기운 고개는 그녀의 비뚠 심성의 대변이었다.
“있잖아, 800년 전의 조상님. 지금의 세계는 당신들이 사랑하고 지키려고 애쓴 노력의 결과야. 노력의 결과로서, 몰락해버렸지. 800년 후는 말야. 멸망을 향해 굴러가는 중인 세계야. 이제 앞으로 한 발짝 더 가면 낭떠러지로 툭 굴러 떨어져, 이 땅에서 당신들이 기억하고 그릴 것들이 하나도 남게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리고 우리 ‘사일란’은, 그런 몰락해가는 땅에 걸맞게, 이런 땅이라도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변하고 변한 돌연변이야. 그러니 ‘보통의 인간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이상하고, 또 꺼림칙하고, 불쾌하겠어.”
그에게 화풀이를 할 생각은 없었다. 진실로. 다만 그럼에도 굳이 이런 말들을 멈추지 않고 내뱉은 건, 아아 그렇지. 어쩌면 어리광이다. 조상님을 향한.
“어때? 이 후손들의 모습은. 꼴사나워 보여? 동정을 할래? 이게 당신들이 도달한 진실의 뒷이야기야.”
옆에서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카누트겠지. 말이 이어지는 동안 아니카의 표정은 시시각각으로 변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 자신이 무언가 잘못한 걸까 눈치를 살피는 눈, 그러다 마지막이 되어서야 저를 향해 찔러드는 악의에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입술을 깨물다가 흘러나온 사과.
내가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 미안합니다. 그럼에도 동정해버려서 미안합니다.
그렇게 흘러나온 말에 에슬리는 한 번 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정말로, 수정 같은 사람이다. 맑고 투명하고 자신의 선(善)을 내보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사람. 제가 내보일 수 있는 선이 사실은 어떤 실효도 없는 말뿐인 선에 불과할지라도 부끄러울지언정 숨기지 않을 수 있는, 맑은 사람.
상대가 이렇게 나와 버리면 도리어 이쪽이 할 말을 잃고 만다. 내가 어린애 같았네. 당신을 탓할 일이 조금도 아닌데.
“당신에게 사과 받으려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미안해. 괜한 화풀이야. ──나도 보고 싶어져. 당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 축복받은 땅, 팔라키르를.”
그곳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이 세계와 다르게.
씁쓸하게 끝맺은 그녀의 말 뒤로 더 이상 대화는 오가지 못했다. 미적지근한 침묵을 사이에 둔 채 그들은 마저 유적의 더 깊은 곳으로 향하였다. 그러다 축축하고 곰팡이 냄새가 나는 계단을 건너 빛이 들어오는 무너진 정원에 도달하였을 때, 아니카와 만났을 때 느꼈던 에너지원을 한 번 더 감지하였다.
동그랗게 빛나는 그것을 이리저리 살피던 카누트는 아까의 언쟁 이후 펴지지 않던 눈썹을 아주 조금 느슨하게 하며 이거라면 아니카를 돌려보낼 수 있겠다 하였다. 그러나 안심해야 할 당사자는 자신의 처우를 놓고 오가는 이야기보다도 다른 게 신경 쓰이는지 표정이 어두운 채였다.
“……에슬리 경.”
부름에 시선을 주자 수심을 걷어내려는 어설픈 미소가 보인다.
“이상하게 웃네. 아직도 신경 쓰이나봐?”
제가 속 좁은 사람이라 그래요. 그의 답에 에슬리는 그런 게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제가 내뱉은 말을 듣고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굴었다면 오히려 그녀 쪽이 실망해버렸을 테지. 결국 인간들이란 예나 지금이나 눈앞의 제 삶만이 중요한 것이라고. 아, 이걸로 그녀가 누굴 탓할 입장은 아니지만 말이다.
아니카는 그녀를 실망시키는 쪽이 아니었다. 어느 쪽이냐 하면 반대로 또 한 번 놀라게 한 쪽. 잘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장신구가 맑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시야에서 그가 사라졌다.
“왜 내게 머리를 숙이는 거야?”
그에게선 답 대신 다른 말이 들려왔다.
“앞으로의 경에게 남은 시간만큼은, 괴로웠던 시간의 보상이 되길 바라겠습니다.”
그 말 또한 놀라운 것이었다. 말뿐이라 하더라도 이런 걸 빌어줄 줄이야. 그것도 정중한 진심을 담아서. 고개가 다시 올라오는 걸 보며 에슬리는 턱께를 두드렸다.
“재밌는 사람이네, 아니카 경. 남겨진 미래의 사람들의 행복이라거나, 평화라거나, 안정이라거나.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라 나 개인에게 보상이 오길 바란다고 하는 거.”
책임지지 못할 말이기 때문일까. 그리고 지금의 말은, 책임질 수 있기 때문일까. 아티팩트에서 미미한 진동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빛과 함께 꽃잎이, ……눈보라일까? 차갑게도 느껴지는 무언가가 흩날리며 두 사람 사이를 채워나갔다. 시공간이 요동친다. 헤어질 시간이었다. 서로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야 할 때였다. 점차 흐릿해지는 가운데 상대는 이번엔 다시 자세를 바로 하고 예를 갖춰 보였다.
“……남은 세상이 에슬리 챠콜, 당신의 끝까지는 상냥하길.”
당신이 행복하기를.
이곳에 존재했던 것부터 신기루였던 듯 사라지는 상대를 향해 에슬리는 이번에야말로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걱정하지 마. 지금도 나는 행복해.”
그에게 아직 자신의 목소리가 닿을까. 그렇다면 에슬리는 좀 더 들려주고 싶었다. 아무래도 그는 조금 오해를 한 것 같으니까.
“당신이 숨 쉬는 그 세계는 아름답겠지. 800년 후의 우리가 보기엔 이야기 속의 낙원과 같은 땅일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이, 멸망을 향해 가는 세계가 아름답지 않다는 건 아니었어. 과거에 비해 황폐해져서 한쪽은 꽁꽁 얼었고 한쪽은 말라비틀어졌고 괴물은 나오고 사람들의 인심은 안 좋아지고 나 같은 돌연변이나 만들어져서는 배척받고 있는 그런 세계지만 말야.”
ー──그럼에도 나는 이 세계를 아름답다고,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
지금쯤 난데없이 사라진 그녀를 그는 걱정하고 있겠지. 어서 돌아가야지. 돌아가서는 두 팔을 벌려 그를 껴안고 그가 존재하고 그녀가 존재하는 이 순간에 안도해야지. 그리고 실감하는 것이다. 숨 쉬는 행복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미소와 함께 에슬리는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그에게 말을 남겼다.
“나는, 우리는 앞으로도 행복할 거야. 행복하게 살아갈 거야.”
그에게도 있을까? 돌아가 행복을 이야기 할 상대가. ……아마 있을 것 같다. 그가 보이던 선함은 그가 받은 사랑의 크기를 가리켰으니. 800년 전의 조상, 과거의 선배, 하지만 연하, 그런 상대에게 조금 심술궂은 말을 해버렸다고 에슬리는 뒤늦게 조금 반성했다. 그리고 반성만큼의 축복과 기원을 되돌려주었다.
“그러니까 당신도, 800년 후의 내 행복 같은 걸 챙겨주는 당신이야말로 그 아름다운 세계에서 행복하길 바랄게.”
급기야는 같이 러닝한 캐릭터도 아닌 상대와 로그를 주고받고 마는데. 그래놓고 마지막엔 애인 자랑이었습니다.
괴롭혀버려서 미안합니다. 커니카 행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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