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었다. 어서 가라고 등을 떠미는 바람이었을까.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을 걷어내고 비행기에 오르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바다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고향의 바다와는 다른 색. 깊이에 따라 색이 달라지는 건 보았지만 이렇게 고향과 색이 다른 바다는 처음이었다. 정말 처음인지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거진 9년 만에 본 풍경이었으니까. 어린 시절의 기억은 이미 노랗게 빛바래 실은 고향 바다도 이와 같은 색인 건 아닐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하였다.
보러 가고 싶어…. 집 앞의 바다.
보고 오면 지금의 기억과 대조해볼 수 있을 텐데. 그리움이 물씬 밀려 들었다. 가슴을 옥죌 정도의 그리움, 애틋함, 그리고 슬픔. 학원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또 울적해지고 마는 것이었다. 포기해야지. 체념해야지. 그래도 다행인 점이라고 한다면 이제 졸업까지 3년밖에 남지 않았단 것이었다.
3년만 더 버티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할머니 곁으로 돌아갈 수 있다. 당장 내일이라도 할머니가 저를 두고 돌아가시면 어쩌지. 그렇게 엄습하던 공포와 멋대로 커지던 무서운 상상은 전보다 조금 바람이 빠진 채였다.
희망을 갖기로, 멋대로 최악을 상상하지 않기로, 그렇게 세이라가 생각을 고칠 수 있도록 말을 건네준 이들 덕분이다.
조금 몸이 안 좋으시지만 괜찮을 거예요. 바로 저번에도 면회를 와주셨는걸요. 기다려주신다고 했는걸요. 할머니는 세이라를 혼자 두거나 하지 않을 거예요.
조금만 더 기다려주세요. 조금만 더 기다리면 돌아갈게요. 할머니 곁으로, 바다 곁으로.
아─, 그렇지.
바다와 재회하고 나서야 세이라는 다시금 실감하였다. 그녀의 그리움의 반쪽은 바다에 있다는 것을. 누하치와 같은 앨리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비늘이 돋아나는 빵을 먹은 것도 아니면서 세이라는 바다에 잠기는 순간 전율과 같은 것을 느꼈다. 아주 오랫동안 숨을 참아왔단 듯, 짜고 파란 물에 몸을 누이는 순간 그제야 기다렸던 숨을 토해내듯. 아가미도 없이 물속에서 호흡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수많은 파도가, 물결이, 흰 거품 사이로 손을 뻗어 그녀를 반겨주는 기분이었다.
바다에 잠겨 살고 싶다고 생각하였다. 맞닿은 순간 바다의 깊이만큼 그리움이 짙어져 이대로 나가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가 그녀와 피를 나눈 혈육이라면 바다는 그녀의 영혼을 안아주는 어머니 같았다. 겨우 어머니 품에, 요람에 안긴 듯 세이라는 몇 번이고 떠올랐다 가라앉길 반복하며 바다의 품에 흠뻑 젖어들었다.
하루가 저물고 다시 하루가 뜨고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남은 하루가 줄어들고 2박 3일의 일정에 초조함을 느낄 정도였다. 그러나 초조하게 느끼는 건 그만큼 충실한 시간을 보냈단 의미다. 세이라는 2박 3일의 시간을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추억으로 만들었다.
그랬기에 말할 수 있었다.
다음에 또 오기로 해요.
다음에 다시 수영을 가르쳐드릴게요.
다음에는 함께 바다에 들어가요.
다음에
다음에
다음에
다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미래를 입에 담는 건 세이라의 최대의 용기였다.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 지금으로 충분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한 발짝이었다. 이 다음에 보다 좋은 것을 기대하고자 하는 욕심이었다.
──그랬을 터였다.
「세이라는, 진실을 숨기는 것과 솔직히 이야기를 듣는 것 중 어떤 게 더 낫다고 생각해요?」
질문의 의도를 읽어낼 수 없었다. 어째서 갑자기 이런 말을 하는 걸까? 감은 눈 너머로는 여전히 바다가 펼쳐지고 있었다. 손등을 도닥이는 그의 손가락 감촉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많았다.
다음에는 말이죠, 아리사 군과 저 바다 밑으로 내려가 보고 싶어요. 그곳에서 제가 아주 좋아하는 풍경을, 보물 같은 풍경을 보여주고 싶어요.
그의 질문이 먼저니까. 답하고 나면 이 이야기도 들려주어야지. 그는 어떤 얼굴로 답을 해줄까. 아직도 생생한 풍경이었다. 새파란 하늘, 새파란 바다, 하늘도 바다도 담은 듯 일렁이는 물결을 담은 그의 눈동자, 수면 위로 전해지던 체온, 다리를 간질이던 파도의 흐름, 물이 튀기고 잘게 부서지던 웃음소리, 이 다음이 남았을 터였다.
「앨리스들은 바다 근처로 갈 수 없대요.」
그 모든 것이 깨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소리가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와장창, 하고. 파편이 여기저기로 난사되었다. 그 앞에서 세이라는 무릎을 꿇었다.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제게 닿지 않기를 바랐다. 마치 그렇게 하면 그가 들려준 말이 없던 것이 되기라도 할 듯.
어째서…? 왜……?
소리가 먹혀든 것만 같았다. 제 안에서 주체를 못하고 커다랗게 울리는 소리가 몸 안 여기저기를 부딪치고 멍들게 하면서도 밖으로 토해질 줄을 몰랐다. 대신에 자꾸만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어 깊은 구덩이를 냈다.
앨리스가 혹시 일본 밖으로 나갈까봐 그런 것이라는 덤덤한 설명이, 이미 확인을 마쳤다는 잔인한 선고가 하나, 다시 하나, 제 소리들을 구덩이로 밀어 넣었다. 목이 아팠다.
모든 소리가 그 안으로 빨려드는 것만 같았다. 귀가 먹먹해졌다. 움찔하고 감긴 눈이 뜨이지 않았다. 그렇지, 실은 잠들어버린 게 아닐까. 지금 이 모든 이야기가 그저 악몽은 아닐까. 너무 즐거워한 벌이다. 아니면 심술이다. 그녀의 작은 행복을 깨부수려는 나쁜 요정의 심술. 그러니 현실일 리 없었다. 사실일 리 없었다.
그렇게 믿고 싶었으나 이미 머리보다 먼저 현실을 받아들인 몸뚱이가 눈물을 짜내고 있었다. 바닷속에 푹 잠겨 머리끝까지 꽉 채운 눈물이다. 제 뺨에 흐르는 그것에서 세이라는 바다의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는 더욱 괴로워졌다.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마냥. 뭍으로 나온 물고기마냥. 뻐끔거려도 호흡이 일지 않는다. 숨은 어떻게 쉬는 것이었더라. 폐는 어떻게 움직이던 것이었지. 목은, 입은, 그저 머리가 새하얬다. 백지가 된 머리에 적힌 글자는 딱 두 자였다. ・・・절망.
눈물이 얼룩져 저절로 눈이 떠졌다. 그는 제게서 시선을 돌린 채였다. 그걸 차라리 다행이라 열리며 따끔거리는 입술이 열렸다. 삐죽삐죽 솟은 말이 가시처럼 제 입술을 찌르고, 이어 그를 향한다.
“어째서 제게 이런 말을 들려준 건가요? 아리사 군이 미워요.”
“제게 욕심을 내라고, 포기하지 않길 바란다고 말해준 당신이, 어째서 제게 이런 말을.”
“그럼 전 아리사 군에게 무어라 답하면 되는 거죠. 괜찮아요. 그렇군요, 어쩔 수 없네요. 아니면…, 괜찮지 않아요? 그 말을 들려주란 것인가요. 네, 슬퍼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당신이 밉게 느껴져요.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겨우 조금 더 힘내보려 했는데 또 다시 꺾여버렸어요. ……무엇을 견디면 좋을지 모르겠어요.”
“어리광…, 부리고 싶었어요. 하지만 결국 또 허락되지 않는 일이었네요.”
눈이 따가웠다. 젖은 눈동자에는 그의 표정이 제대로 비치지 않았다. 그저 뿌옇고 파란 빛 너머로 어렴풋하게 아, 그가 이쪽을 보고 있구나. 겨우 그만큼이 전해졌다. 닦아내지 않았다. 지금 그를 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가슴이 아프도록 조여 왔다. 그에게 괜한 화풀이를 한다고, 알고 있어서 더 아팠다. 그가 나쁜 게 아닌데. 생각하면서도 바다로 돌아갈 수 없을 거란 그 사실에 두 발이 잘린 듯 아파서, 제 상처에 눈물짓기 바빠 그를 볼 여유가 없었다.
때마침 학원에 돌아왔음을 알리며 비행기가 착륙한다. 휘청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아침 해가 떠올라 있었다. 여름의 이른 햇살이 눈을 찔러들었다. 아직도 흠뻑 밴 바다의 냄새가 햇살 아래 흔적도 없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닿고 싶지 않았다. 지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고작 지금을 모면한다고 무엇이 달라질까. 허탈함에 손이 몇 번이나 미끄러졌다.
덧칠한 바다의 추억은 여기서 마침표가 찍혔다. 앞으로 영영 이 추억에 새로운 추억이 덧씌워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이 될 추억의 끝자락은 참담함으로 새까맣게 타 세이라는 이것을 좋은 추억이라 도저히 포장할 수 없게 되었다. 품안에서 작은 유리병이 달각였다. 다음에 또 바다에 갈 때까지, 그 날까지 견디기 위해 담은 그녀의 작은 바다였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돌연 품안의 이것이 못마땅해 견딜 수 없어졌다. 그에게서 등을 돌려 떨어지듯 비행기에서 달려 내렸다. 그리고 유리병을 내던졌다. 파작, 무언가 깨지고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기대도 욕심도 함께 부서졌다. 어차피 한 줌의 바다. 그리고 한 줌의 희망이었다. 저것도 금세 여름의 빛 아래 마르고 말겠지. 그리고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던 것처럼 자국조차 남지 않겠지.
차라리 저 병처럼 그녀도 이 자리에 소금기둥이 되어 부서졌으면…….
그럼 아프지 않아도 될 텐데.
“……지금은 아리사 군이 보고 싶지 않아요.”
남길 말은 겨우 그뿐이었다. 세이라는 동이 트는 하늘을 뒤로 하고 방으로 도망쳤다.
다들 여기에 답으로 온 로그를 봐주셔야 하는데(오열봇)
캐릭터는 전혀 몰랐고 오너는 캐릭터를 따라 잊어버리고 말았던 설정이 부딪쳤습니다.
이 때 오너적으로 참 즐거웠던 게(컨트롤러 부서져서 힘들었지만)
9살 할아버지 장례식 때 이후로 한 번도 나가지 못한 밖->심지어 바다->그리운 바다에서 좋아하는 친구들이랑 수많은 추억을 쌓으며 행복함->그 행복이 가장 고조되었던 순간 앞으로 바다에 다신 갈 수 없단 말을 들음->곤두박질